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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역설을 쓰는 방법
**왜 이중의 역설이어야 하는가?** 깨달음을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선언하고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으면 깨달은 걸로 친다. 그런데 인가권을 가지고 있는 스승은 깨달았을까? 허무한 수작일 뿐이다. 깨달음을 태권도 단증따듯 하는 사이비 집단도 더러 있다. 무술 유단자라는 개념이야말로 없어져야 할 사이비다. 프로바둑기사들의 단도 없어져야 한다. 아마추어라면 몰라도 프로에 단은 있을 수 없다. 9단이 1단에게 깨지는게 프로의 세계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바로 그 단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는 단이 없지만, 깨닫지 못한 데는 단이 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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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역설을 훈련하라
구조론의 핵심이 ‘이중의 역설’이다. 사실 이건 이전에 무수히 말했을 뿐 아니라, 너무 당연하고 간단해서 구태여 말하는 것도 이상한 편인데,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여전히 이중의 역설을 모르거나 혹은 안다고 해도 익숙하지 않거나 그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 ‘달이 뜨다’는 책 한권이 통째로 이중의 역설만 모아놓았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역으로 이게 핵심이라는 거다. 뭐든 좋은건 다 이중의 역설이라고 보면 된다. 뇌에 찌르르 하고 전기가 오는건 다 이중의 역설이다. 글을 읽다 보면 똥꼬가 뻑적지근한게 감이 오는게 있다. 밑바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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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의 정수
세상을 규율하는 근본은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은 스위치와 같다. 현재상태로 스위치는 켜져 있다.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끄는 것 뿐이다. 혹은 그 끌 계획을 끄는 것 뿐이다. 즉 인간은 언제나 NO만을 결정할 수 있다. 현재상태는 YES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NO와 NO, NO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은 매우 쉽다. 단지 NO라고 하면 된다. 반면 의사결정이 쉬운 만큼 스위치를 차지하기는 어렵다. 나는 하나이나 세상은 여럿이다. 그 관계를 일대일로 만들어야 스위치를 장악한 상황이 된다. 연탄이 백장이면 우리는 백번의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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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정의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정의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자유, 평등, 박애’다. ‘자유, 평등, 정의’라는 슬로건도 있다. 개념들은 서로 겹친다. 예수의 사랑이나’ 공자의 인의나’ 석가의 자비는 겹쳐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건 안에서 이어지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유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해방만 시켜주면 끝인가? 애프터서비스 해줘야 한다. 놔두면 다시 노예가 되어 있다. 노예는 사회적 투쟁의 산물이고 그 투쟁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투쟁을 종식하려면 근원의 해방이 필요하다. 계급해방에 이어 여성해방까지 건드리면 평등이다. 평등이면 땡인가? 그걸로 끝인가? 노예는 집단이다. 여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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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에서 행복으로
**존엄과 행복** 존엄은 절대적이다. 인간은 존엄하고 개는 존엄하지 않다. 개도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것은 인간의 존엄에서 빌린 것이다. 정승집 개를 못 건드리는 이유는 정승의 존엄 때문이지 개의 존엄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날로 진보하지만 개는 100년이 지나도 그냥 개다. 존엄은 사건의 원인측이 결과측을 지배함이며 개는 진보하지 않으므로 지배가 없다. 행복은 상대적이다. 배부른 돼지의 행복과 같다. 여기서 돼지의 행복은 ‘배가 부르다’는 전제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행복은 상대적이다. 나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일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