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랭이 있는 풍경
‘평론가라는 이름의 기생들’

연예인이 자살이라도 했던가 보다. 기자가 자동차 내부 사진을 공개한 게 잘못이라니 어쨌다니 혹은 상갓집에 문상을 간 사람이 그 찬스에 한 번 떠볼라고 잽싸게 명찰을 달았다니 어쨌다니 말이 많더라. 죽은 사람 편하게 가시게 놔둘 일이지 왜들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대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살다보면 때로는 죽기도 하는 거다. 그냥 천수를 다 누리고 호상으로 돌아가시는 분도 있는데 중간에 자살하는 사람이라고 왜 없겠는가? 어차피 인생은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고 신통한 일은 어디에도 없더라.

왜 자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이건 나의 도발! 하긴 기독교는 자살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더라만 그것은 그들의 관습! 왜들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짓고 ‘▶謹弔◀’ 라든가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따위를 내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이상하지 않나? 세상에 인간은 많은데 갑자기 똑같은 짓을 해대니 촌스럽다.

그는 성깔이 까칠해서 이 엿같은 세상을 길게 지켜보고 싶지 않았던가 보다. 40억대 사업 좋지. 이 풍진 세상에 나서 정면승부 한 번 걸어도 보고. 한 방 터뜨려도 보고 안 되면 생 까는 거다. 이 세상과 절교다.

어떤 사람이 노란옷 입고 상가집을 방문했대서 그게 문제라고 한다. 이 가을에 설치는 쥐나 잡을 일이지 만만한 여자나 잡으려는 건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그대, 밑바닥의 시스템은 못 건드리고 만만한 개인이나 씹어대는 그대의 얼굴은 그대로 미치광이.

파시즘의 광기 느끼기 전문의 진중권, 박노자들이 또 한번 찐하게 한번 느껴주어야할 장면은 바로 이런 거. 똘레랑스 전문의 홍세화들이 또 한번 관용을 베풀어서 화끈하게 변호해 주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여자.

나는 이번에 자살했다는 사람이 누군지 또 그의 상갓집에 갔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의도적으로 모른다. TV는 던져버린지 오래. 방송가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마찬가지. 그들과 나는 다른 세계에 산다. 우리 정들지 말자. 적당히 거리를 두자. 양팔 간격으로 벌려 서자. 그래야 이 좁은 바닥을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쓸 수 있지 않겠는가? 실수로 정들어 버리면 이런 말도 못한다.

‘축제’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장례는 축제다. 그러므로 혼란스럽다. 그 자리에 노란 옷 입고 갔다고 하니 대차다. 장례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멱살잡이 소동 일어나주면 더욱 그림이 되고. 고인이 반겼을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운다. 곡쟁이가 운다. 곡쟁이 역할 정도야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듯이 잘도 운다. 그 사람 인생에서 맡은 배역 중에 가장 멋드러지게 연기해낸 배역이 있다면 그 배역일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한 바탕 연극이 아니던가?

다음 사이트 초기화면에서 본 [낸시랭이 소비되는 방식과 그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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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08-09-1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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