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의 색계에 대해서
‘누가 대륙의 심장에 총알을 박아넣겠는가?’
[갑자기 옛날영화 이야기를 해서 뜬금없지만 질문하는 분이 있어서]
이안의 ‘색계’에 대해서는 비디오로 봤기 때문에 집중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특별한 느낌을 얻지 못했다. 70년대 이장호나 배창호버전 한국영화를 재탕으로 보는 기분이랄까 뭐 그런거. 거장답게 그림이 세련되기는 했지만.
철학으로 보면 무게는 제법 잡았지만 알맹이가 빈곤. 인간에 대한 관찰이 있지만 단지 피상적 관찰이 있을 뿐 뚜렷한 결론은 없음. 지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70년대 지식인의 ‘불안한 자기모색’ 운운에 결론은 허무주의 퇴행.
그 이면에는 조국을 등지고 방황하는 지식인의 자기위안이 도사리고 있고. 그 어리광 가득한 몸짓이라니. 언제나 타인이 자신을 이해해주기만을 바라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치고 나가지는 못하고. 언제까지 그러고 살테냐?
미학으로 보면 나름대로 진지했지만 통쾌함이 없다. 탐미주의로 갔지만 탐미적이지 못했고, 초극을 추구했지만 초극하지 못했고,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려 했지만 진정한 바보를 보여주었다. 사랑을 찾으려다 사고를 찾은 셈.
중국의 지식인은 아무래도 대륙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 인정받으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만으로 내몰리고 미국으로 유랑하며 나약해지고 비겁해진 것. 일신의 안일만 추구하는 자기신세 한탄.
‘진정한 것은 없다.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사방이 꽉 막혔다. 단지 불안한 자기모색이 있을 뿐’이라는 식의 실존주의 변명. 박정희 이후 30년 동안 들어왔던 그 지긋지긋한 변명. 김기덕은 잘 찾는 출구를 그는 왜 찾지 못할까?
내용은 스릴러도 에로도 코미디도 멜로도 다 약하더라. 사극도 아니고. 다 섞은 잡탕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잡탕을 꿋꿋이 밀어붙였는지는 의문. 치밀한 심리묘사와 자질구레한 복선의 사용이 돋보였지만 그것도 과잉이라는 느낌.
관객이 동의하지 않는 혼자 게임. 감독 혼자 즐기는 레고블럭 조립놀이. 역사로 봐도 고증이 충실한 점이 맘에 들었지만 그것이 포인트는 아닌듯 하고. 의미있는 역사적 재해석의 시도도 없는듯하고.
이 영화의 큰 틀거리가 된 섹스묘사와 심리게임이라는 도피로에 숨은 것. 왜 정면승부를 회피하는가? 역시 대륙에서 도주한 대만 지식인의 한계. 잘아졌고 소심해졌다. 본류가 되지 못하고 아류가 되었다. 그 증거는 반대편에 선 장예모.
이 영화는 여러모로 장예모의 ‘영웅’을 생각나게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두 영화는 판박이다.
대륙에 남은 자의 입신양명을 위한 변절과, 섬으로 도주한 자의 허무한 이중플레이. 둘이서 누가 더 최악인지를 겨루는 게임. 결론은 둘 다 최악이나 외국인의 품에 안긴 이안보다 독재자의 개를 자처한 장예모가 더 더럽다는 거.
무엇인가? ‘장예모의 영웅’과 ‘이안의 색계’가 가지는 공통점은 둘 다 자객이 죽이러 가서 타겟을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거다. 왜? 왜 그들은 끝내 죽이지 못하는걸까? 왜 그들은 오자서의 통쾌한 복수를 재연하지 못하는걸까? 왜 그들은 월왕 구천도 하고 오왕 부차도 해낸 대업을 못하는걸까?
정답.. 그것은 중국의 현대사가 실패이기 때문이다.
장예모의 변명을 들어보자!
‘대륙은 말야. 워낙 거대해서, 우리같은 세치 혀 밖에 가진 것이 없는 지식인 나부랭이 따위가 감히 손댈 수 없는.. 그 어떤 거룩한 힘의 지배아래 있다는 거지.우리같은 나약한 지식인은 깝치지 말고 걍 찌그러지는게 맞아. 중국의 민주화?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 포기하자구.’
자객은 큰 뜻을 품고 기어이 칼을 뽑지만 그 칼을 끝내 휘두르지는 않는다네. 썩은 무우라도 반토막 잘라보아야 하건만, 끝내 그러지를 못하네! 왜? 대륙이란 원래 그런거라네. 니들이 대륙을 알어? 누가 저 도도히 흐르는 황하를 막을 것인가? 거스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네. 술이나 한잔 기울일 뿐.
비겁한 변명이다. 장예모는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다. 권력의 개일 뿐이다.
이안의 변명을 들어보자.
‘대륙의 상대는 워낙 강하고 섬으로 내몰린 나는 약하다. 누가 나를 지켜줄 것인가? 아무도 없다. 다들 겉으로는 애국 어쩌고 하지만 각자 지 한 목숨 건사하기 바쁜 조무래기들. 아 우울하다 우울해! 우울한 때는 섹스로의 도피가 제격이지. 아 완전한 사랑은 어떤 것일까? 한잔 술이 당기는구나. 홍알홍알. 엉엉.
바보같은 소리다. 나약한 지식인의 변명에 불과하다. 그런 식으로는 진정한 사랑조차 찾을 수 없다. (내맘대로 하라면 장예모의 영웅에는 별 0개를 주고, 이안의 색계에는 그나마 별 두개는 주것다. 거장의 그림솜씨를 평가해서 많이 쳐준 거. 그러나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뚤어졌다.)
과거 고도성장시대에 특별히 사회에 기여할 것이 없어서.. 변방에서 우울하게 모색하던 한국 지식인의 초상을 보는듯. 대만으로 미국으로 내몰리면서 공산국가 중국을 정면으로 비판하지도 못하고, 대륙의 중국인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는 그 어정쩡한 모습이 유신시절 한국을 떠나 해외를 떠돌던 지식인을 연상하게 한다.
지독한 사랑을 추구하다가 여성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노출한게 아닌가 싶다. 결론은 이안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 조국이고 뭐고 다 부질없고 여자에겐 단지 자기를 끝까지 지켜줄 사내새끼 한 놈팽이가 필요할 뿐이라는 식의 비뚤어진 시선. 그는 사랑을 추구했지만 허상을 추구한 거다.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좇아간 거다.
주인공 여자는 그 친일파 끄나풀을 사랑한게 아니고, 스파이로서 오르가즘을 연기했을 뿐이고, 같이 총살당한 동료 광유민을 사랑한 것인데 그 부분이 약했다. 이안감독이 칼을 빼고도 휘두르지 못했다고나 할까. 왜? 그는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진정한 사랑은 그 육체적 접촉의 대상에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깊은 곳에 충만되어가는 것이며, 그것은 밖에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쌓아가는 것. 완성되면 폭발하는 것. 그리하여 낳아내는 것. 영화속의 그들은 불임. 왜? 가짜니까.
진정한 사랑은 있다. 그것은 육체관계를 넘어서는 것.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지만, 진실로 말하면 존재의 심연을 바라보고 있는 것. 신을 향해 포즈를 취하는 것.
진정한 사랑이란? 마지막 순간에 신이 존재하는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것.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마지막에 죽어가며 여인은 어디를 보았나? 그 시선의 끝에 누가 있는가? 친일파? 아니다. 광유민? 아니다. 조국? 아니다. 운명? 아니다. 여성의 본능? 아니다. 초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왜 벽을 깨지 못하는가?
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nid=1067227&code=61101
이 리뷰가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쓴 좋은 리뷰가 아닌가 한다. 문제는 이 글을 쓴 먹물도 개발독재시대에 국가에 기여하고 싶은 열망은 가득하나, 차마 박정희의 개가 될 수는 없어서 떠돌이 경계인으로 머물렀던 70년대 나약한 지식인의 넋두리 관점으로 영화를 보았다는 것.
딱 이안의 포지션. 이안과 글쓴이는 너무나 쿵짝이 맞다. 문제는 이안도 포지션이 다를 뿐 반대편의 장예모와 쿵짝이 맞아버렸다는 것. 이안은 미국인에게 환영받고, 장예모는 중국인에게 환영받고. 결론은 둘 다 개.(독재자의 노예와 외국인의 창부라면 환상의 콤비.)
나는 말한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끝끝내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딛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변명에 그쳐서는 좋지 않다고. 마침내 벽을 깨뜨리고 극을 넘어서야 한다고.
진정한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과 나 사이에 있는거라고. 지구상의 그 누구를 사랑해도 결국은 그 사람의 모습을 빌어 나타난 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자기 안의 사랑을 완성해 가는 거라고.
주인공 남녀는 인간의 속된 사랑을 완성했을 뿐 신의 거룩한 사랑에 가닿지 못했던 거다. 경계인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거다. 언제까지 경계선에서 머뭇거릴테냐? 언제까지 그 따위로 살텐가?
그렇다. 장예모는 진시황을 척살했어야 했고, 이안은 친일파를 쏘았어야 했다. 그래야 중국이 바뀌고, 민주화가 완성되고, 세계가 다시 살아난다. 왜 대륙의 심장에 총알을 박아넣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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