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진정한 관용인가?
‘현대성은 21세기 문명의 해석 관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근 글 ‘민주주의와 관용과 상대주의’, ‘관용은 용서와 다릅니다.’ 등에 언급된 ‘관용’에 주목할 일이다. 왜 갑자기 관용을 말씀하실까? 표면이 있으면 이면이 있다. 보이지 않는 저쪽에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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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대로 관용은 용서가 아니다. 프랑스인의 tolerance가 그러하다. 어원을 찾아보면 ‘무거운 것을 들고 견딘다.’ ‘(상대편의 배려없는 방자함을) 견디며 허용한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무거운 것이 ‘들려있다(tolerate)’. 곧 ‘짐이 지워져 있다’는 뜻이다. 두 어깨에 지구를 짊어진 그리스신화의 거신 아틀라스(Atlas)를 떠올릴 수 있다. 아틀라스의 어원도 tolerate다.
관용을 정치 슬로건으로 써먹은 이는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왜 관용을 주장했을까? 로마는 게르만을 정복했지만 역으로 게르만족 일부가 로마시민권을 얻어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관용은 로마가 게르만족을 포용하는 것이다. 목욕을 안 해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바르바로이(로마에 800개의 목욕탕이 있었을 정도로 로마인은 청결했다.)들이 텁수룩한 수염을 휘날리며 나타나서 ‘나 게르만 부족장으로 이번에 원로원의원으로 선출되었소. 그런데 원로원 가는 길은 어디요?’ 하고 길을 묻는 꼴불견이라니. 그런 못볼 꼴을 보고 견디는 것이 프랑스인의 똘레랑스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 카이사르는 원래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의 국가개념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원래 부족개념이 강한 도시국가를 넘어, 또 민족국가를 넘어, 세계국가를 지향하고 또 그것을 초월하여 더 높은 이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는 개별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정신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문명권’을 뜻하게 된 것이다. 물론 모든 로마인이 그러한 카이사르의 정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겠으나.
시민권 개념이 특히 중요하다. 우리가 아는 ‘국민’ 개념은 ‘세금 내고 대신 국가의 보호를 받는 자’를 의미한다.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관념이다. 로마의 시민권 개념은 주주가 주식지분을 가지고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듯이, 게르만 부족장이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가지고 로마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참여함을 뜻한다.
의미가 다르다. 그 의미가 넓혀진 새로운 시민권 개념에 의해 로마는 국가 단위를 넘어선 초국가적 패권그룹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중요하다. 먼저 안목을 높이고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카이사르 이전에 알렉산더가 있었다. 알렉산더 역시 동서세계의 통합을 꿈꾸었다. 마케도니아 족장 출신으로 정복하여 그리스를 관통하고 페르시아를 넘어 이집트와 인도를 아울렀다. 가슴에는 그리스인의 이상을 품었지만 산악국가 그리스의 폐쇄성을 극복했다.
국가개념을 초월하여 문명단위로 사고한 최초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민족국가 단위의 좁은 관념에 붙잡혀있는 사람이 관용을 이해함은 불능이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의 눈높이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홍세화가 소개하는 오늘날 프랑스인의 관용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수준이다. 프랑스인의 관용은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알제리인이나, 수업시간 교실에서도 히잡을 벗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아랍인, 혹은 터키인이나 유태인 등을 두루 포용하자는 것이다. 그 이면에 철저한 프랑스 중심주의, 드골식 대국주의, 백인-기독교문화권의 배타적 우월주의가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중국인들에게도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관용의 사상이 있다. 그 바탕에 철저한 중화주의가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진정한 관용이 아니다. 가짜다. 국가개념을 초월하여 문명단위로 사고의 지평을 넓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작은 국민을 졸업하고 너른 시민의 바다로 입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극적으로 세금내고 보호받을 궁리를 넘어, 확고한 자기 정치적 지분을 가지고 지구촌 인류운명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적극 참여하여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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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특히 예술분야에 있어서- ‘현대성’의 개념이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현대성의 본질은 인류문명의 확대, 전파, 그리고 진보에 있다. 그것은 좌파의 사회주의와 다른 개념이다.
진정한 진보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20세기의 한계에 붙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고 사고하며 인류문명의 진보를 주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대성’은 21세기에 느닷없이 요청된 사상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탄생기, 성장기, 청년기, 장년기, 완숙기로 펼쳐지는 에너지 순환 일 사이클의 전개에 따라 여러 형태의 현대성이 존재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를 쓰며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낡은 봉건잔재라니-우상의 시대를 끝막고 이성의 시대를 주장했을 때 이미 현대성의 개념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 르네상스는 부활 혹은 재생을 의미했지만 실제로는 흘러간 그리스 구문명의 재발견이 아니라, 밝아오는 근대의 여명기 그 신문명의 힘찬 도전이었다. 그래서 현대성이다.
필자가 말하려는 현대성 개념의 요지는 ‘21세기 문명의 해석’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의 임무다. 우리에게 21세기란 무엇인가? 우리가 21세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8세기의 계몽, 19세기의 산업, 20세기의 혁명으로 펼쳐지는 그 맥락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다.
고대가 문명의 탄생기, 봉건이 문명의 성장기, 근대가 문명의 청년기라면 21세기는 문명의 장년기 혹은 완숙기가 되겠다. 이 시대가 문명의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가는 전환기라면 그 진보한 수준에 걸맞는 새로운 삶의 양식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이상주의라는 종착지를 가진다. 문명단위로 사고한다 함은 결국 이상주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르네상스 정신이 그렇듯이 근원의 이상주의로 돌아갈 때 국가단위, 민족단위를 넘어 문명단위로 사고하게 하는데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상대론적 관점을 버려야 한다. 지배(피지배)계급이 이렇게 하면, 사용자(노동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여당(야당)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북한(미국)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경상도(전라도)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거기에 대응하여 나는 이렇게 응수하겠다는 소아적인 관점을 버리고, 떨치고 일어나 더 높은 레벨에서 문명의 코디네이션에 나서는 것이다.
어떤 이상주의가 있었는가? 예수의 유토피아는 천국 개념이다. 석가의 유토피아는 극락이거나 혹은 열반 개념이다. 공자의 유토피아는 요순시대의 이상향 개념이다. 노자의 유토피아가 무위자연 개념이라면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는 사회주의 개념이다.
당신이 어느 줄에 가서 서든, 그것은 남들이 세워놓은 줄 뒤에 가서 서는 짓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유토피아관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유토피아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재앙은 시작된다. 나와 다른 타인의 유토피아관을 허용하는 것이 관용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똘레랑스는 카이사르의 정적들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프랑스인의 외국인에 대한 허용이 아니라 너와 나의 수평적 ‘공존’을 의미한다. 공존이 관용이다. 그것은 타인의 이상주의가 나의 이상주의와 조화하여 더 높은 차원의 이상주의를 연출하는 것이다. 외부세력에 대한 소극적 허용이 아니라 문명의 진보에 대한 적극적 도전이다. 떨쳐 일어남이다.
그것이 우리가 21세기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 방법으로 변방에서 불명한 존재였던 우리가 기세좋게 중앙으로 치고나가 태풍처럼 몰아쳐서 그 중앙을 접수하고 우리의 존재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방법이다.
프랑스인의 관용 개념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태도에 불과하다.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중앙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변방의 떨거지들도 구색맞추기 수준에서 동아리에 끼워주고 틈새시장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변방의 우리가 그들 기독교문명권의 본질을 칠 때 그들은 돌연 얼굴이 붉어져서 정색하며 태도를 바꾼다. 진정한 관용은 문명의 지평을 열어가는 리더가 문화지체의 지진아들을 격려하며 함께 진도나가주는 것이다.
참된 그것은 21세기를 해석하여 그에 걸맞는 문명을 디자인하고, 코디하고, 연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각자의 다양한 이상주의를 제각기 제 위치에서 완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에게 무대를 세팅해주고 그에게 파트너를 찾아주고 그에게 포지션을 지정해주고 그에게 걸맞는 임무를 주어 서로 조화되게 배치하는데서 온갖 새로운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며. 또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일을 풀어가는 것이다. 적을 제압하거나 혹은 외부의 공격에 맞서 응전하는 식의 수동적인 대응이 아니라. 주어진 온갖 방법들 중에서 순간순간 판단하고 선택하여, 각자에게 걸맞는 이름과 무대와 파트너와 포지션과 임무를 주고 또 서로 충돌하거나 어긋나지 않게 조율함으로써 최고의 역동성과 최선의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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