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 소개와 계획
얄궂은 책 하나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림책이다. 그림에 딸린 글자들의 무게가 만만찮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이전에 어떻게 창의할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바라보는 눈! 안목이다. 심미안이다. 본다고 해서 다는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작고 ‘포착’하여 보는 것이 크다. 맛보고, 해보고, 알아보고, 봐보고…보고 보고 본다는 것은 ‘포커스’를 포착함이다.
결론은 깨달음이다. 나는 여러분께 깨달음을 권한다. 깨달음으로 소통할 수 있기 바란다. 표면의 꾸며진 거짓 소통 말고, 존재의 근원에 가닿는 깊은 내면의 소통 바란다. 포커스를 포착함으로 가능하다.
미학이 깨달음이다. 미학의 요지는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내는 것이다. 민감한 부분이 있다. 살짝 건드려도 깊은 신음소리가 나는 곳 있다. 그곳이 포커스다. 그곳을 포착하는 능력이 안목이다.
계를 형성하고 밀도를 걸어주어 내부가 균일해졌을 때 외부에서 자극을 가하면 소리가 난다. 아기를 낳는다. 자기 자신을 복제한다. 위대한 탄생이 그 안에 있다.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얻는다.
조주의 ‘끽다거’
**임제의 **‘할’
**덕산의 **‘방’
**성철의 **‘산은 산 물은 물’
구지의 ‘엄지손가락’
**마조와 남전의 **‘평상심’
이 모든 것이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끌어내고자 선사들이 개발한 바 먹어준다는 스킬들이다. 만약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바로 세상을 손 안에 움켜쥔 것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미학은 양식학이다. 양식은 어느 레벨에 맞추는 것이다. 왜인가? 전략이 있기 때문이다. 바둑이라면 실리냐 세력이냐다. 권투라면 인파이터냐 아웃복서냐다. 야구라면 빅볼이냐 스몰볼이냐다.
하나를 선택하고 그 기준에 일제히 맞춘다. 그럴 때 내부의 밀도가 균일해진다. 작은 힘으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선수는 시합에 승리할 수 있고 배우는 관객을 웃기고 울릴 수 있다.
작가는 독자를 얻을 수 있고 기업가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학생은 창의할 수 있고 교사는 수업에 집중시킬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어부가 물고기를 그물에 가두듯이 제어할 수 있다.
가장 높은 기준에 맞추기다. 그룹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의 성과를 모두가 공유하자는 것이다. 한 명이 발목을 잡아도 다 안 되는 수 있고, 한명의 성취가 모두에게 되돌려지는 수도 있다.
좋은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자는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최종적으로는 문화로 귀결된다. 정치의 승리자는 자기네의 문화를 퍼뜨려 그 기준에 모두 맞추려 하고 경제의 승리자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우리가 문화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안다. 우리에게 그만한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농부가 밭을 확보한 것과 같다. 씨앗만 뿌리면 수확은 보장되어 있다. 서구에 없는 깨달음의 자원.
발로 차 주고 싶은 궁뎅이다. 꼬마라도 거대한 곰을 물에 빠뜨릴 수 있다. 최소개입으로 최대효과를 얻는다.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움은 그 방법으로 그대의 개입을 재촉한다. 유혹한다.
이 화상은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맞아도 정신을 못차린다. 시민의 최대개입이 필요하다. 이쥐박 역시 국민의 삶에 시시콜콜 간섭한다. 인터넷 감시가 그 예다. 좀 내버려 두면 어디가 덧나나?
덧난다. 이쥐박 아구창에 등창난다. 최소개입. 눈빛만으로 통하기, 힌트만 줘도 알아채기. 그렇다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다울텐데. 그렇지 않나? 가능하다. 계를 형성하고 밀도를 걸어 밸런스를 얻으면 된다.
독자제위께
여러 권을 만들었지만 대략 마음에 드는 책이 되어주지를 않아서 서점에 깔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깔아보려는 희망이 있으나 미비한 점이 있어서 현실화 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새 책을 씁니다. 집필 중인 “백문백답” ‘명쾌하게 답해주는 철학의 질문 백가지’. 이건 정말 사는 사람이 없어도 서점에 깔려야 할 책입니다. 이렇게 열권 쯤 써보면 한권 쯤 가작이 만들어지겠지 싶습니다.
이번에 나온 ‘깨달음을 그리다’는 일단 보기에 편합니다. 우스개 그림을 리터칭하고 깨달음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직했습니다. 하드커버로 제작했으므로 선물용으로도 가당합니다.
한 시간 만에 후다닥 읽을 수도 있고 두고두고 조금씩 맛을 음미하며 볼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그림 하나를 머리 속에 콱 박아서 뇌간지럼증을 유발하는 것이 이 작업의 목적입니다.
몬드리안의 이 그림이 그렇지요. 그림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적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든 저절로 머리속에 그림이 박혀버린다는 거지요.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어쨌든 나는 몇 권을 더 쓸 것이고 세상에 던져볼 것입니다. 아주 살짝 던져볼 셈입니다. 소리가 난다면 그것은 이미 계가 만들어졌고 내부에 밀도가 걸려서 균일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위대한 아기가 탄생할 준비가 갖추어진 것.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더 때를 기다리며 토대를 닦는 작업을 더 해야겠지요. 내가 마저 못하면 또 물려받아서 누군가가 계속 해야겠지요.
자전거만큼 조작하기 쉬운 차를 만들어야겠지만, 동시에 자전거보다는 자동차를 욕심내야 합니다. 예술은 대중의 눈높이로 내려와야 하고 동시에 대중은 예술가의 눈높이를 욕심내야 합니다.
진보는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진보의 나무를 지식인과 대중이 함께 키워가기입니다. 지식이 대중속으로 내려와야 하지만 한편으로 앞서가며 끊임없이 새로운 동기부여를 개척해야 합니다.
한국은 배고픔이라는 동기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딱 여기까지입니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지식이 더 높은 수준의 동기부여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합니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라고. 신의 완전성을 내 안에 세팅하기를 꿈 꾸라고. 신과의 대화를 꿈꾸라고. 누구든 창의하는 자가 작은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대를 세팅하는 목표 어떻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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