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이 옳았던 이유”
‘세상의 중심과 연결되어야 민주주의다’

오기 같은 것이 있다. 끝까지 ‘내가 옳다’고 우기고 싶은 거. 상대방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래도 내가 옳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은 거. 왜냐하면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는 ‘더 높은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려는 거다. 빛과 어둠은 애초에 비교대상이 아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없고 어둠있는 곳에 빛이 없다. 87년 단일화 논란. 일관되게 김대중이 옳다는 입장에 섰다.

설사 김대중 전대통령 본인이 ‘그건 내 잘못이다’고 말한다 해도 내 판단은 바뀌지 않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차이. 개념의 차이. 이 부분은 지금 진행되는 신당논란과도 관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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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내게 각별한 사람이었다. ‘간첩이다, 빨갱이다’ 하는 주변의 수군거림. 그런 말을 할 때 목소리 톤이 변한다. 죄 짓는 사람들이 보이는 특별한 표정이 있다. 그 눈빛 놓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사람이 실없는 말을 할 때, 죄를 지을 때, 어떻게 얼굴색이 변하고, 눈빛이 변하고, 목소리 톤이 변하고, 입꼬리가 실룩거리고, 눈가 잔주름이 파르르 떨리는지 나는 안다.

박정희 죽은 날 혼자 뒷산에 올라 만세삼창을 부른 후 심리적으로 고립되었다. 시위라도 일어나면 합류하려고 시내를 한바퀴 돌았지만 그런 조짐 없었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다는 암담함.

사방이 적. 아주 말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다. 생각이 다르다는게 문제가 아니라 ‘눈빛이 다르다’는 사실이 문제. 인간과 짐승은 눈빛이 다르다. 나는 그 거짓들 속에서 야수의 눈빛을 보았다.

이질감. 메스꺼움. 두드러기. 내 머무를 곳이 아님을 알았다. 빙빙 도는 지구라는 별에서 하차해 버리고 싶었다. 한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떠나 있었다. 그 야수의 눈빛들이 내겐 불편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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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지푸라기 같은 것, 신통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 ≪- 홀로 중얼거리고 다녔던 주술같은 말. 인생은 허무하다. 왜 허무한가? 결론이 없기 때문이다. 신으로부터 버려졌기 때문이다.

설사 많은 돈을 벌어들인들, 괜찮은 이성을 만난들, 그것이 내 주의를 끌만한 사건은 되지 않는다. 돈은 세상의 소속이니 어차피 제 자리로 원위치, 사람들은 태어나고 또 떠나갈 것. 의미가 없다.

왜 살아야 하는가? 바깥으로 난 출구가 있어야 한다. 김대중의 존재는 내게 구원의 빛이었다. 85년 212총선의 기적. 그때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 역시 영영 세상속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세상과 각을 세운 지점이 있다. 내 존재가 의미있으려면 세상을 향해 발언해야 한다. 발언권을 얻으려면 어딘가에 각을 세워야 한다. 이를 악물고 대척점을 찾는다. 김대중은 내게 영감을 주었다.

세상 모두가 쥐떼처럼 멋모르고 한쪽으로 몰려가는데, 홀로 등돌리고 반대편 다른 길을 가는 사람 있었다. 작은 한 사람이 태산처럼 크게 느껴졌다. 전태일과 김대중. 내게도 길이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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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제도? 왕이나 귀족, 독재에 반하는 제도?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존엄의 문제다.

내게는 인간이 고립되지 않고 세상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우리는 신문, 방송, 소문, 공론으로 그 세계의 존재를 안다. 세상이 대략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그 흐름에 맞춘다.

민주주의란 그 흐름을 타고 그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다. 신문을 펼치고 방송을 켜면서, 소문에 귀기울이고 공론의 형성에 기여하면서. 그럴때 세상의 중심과 나는 연결된다. 내 존재는 빛난다.

그런데 그 신문이 날짜 지난 신문이고, 그 방송이 켜지지 않는 방송이라면. 그 소문이 들리지 않고, 그 공론이 나를 배척한다면. 나의 존재는 불투명해진다. 희미한 존재가 된다. 바래어지고 만다.

민주주의는 ‘제도 이전에 가치’다. 탁신은 민주적으로 태국을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들었고 히틀러는 민주선거로 독일을 파멸시켰다. 최장집은 선거를 한 이상 그것도 민주라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한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가치다. 민주는 단지 투표권, 참정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의미에서의 민주는 ‘세상 전부가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서 호흡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성립된다.

그 방송 켜져 있고, 그 신문 날짜 지나지 않았고, 그 소문이 내 귀에 들리고, 그 공론 내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생물이다. 그 생물 살아있다. 그 생물의 뇌는 세계 지성의 네트워크다.

그것이 집단지성이다. 그 생물의 가슴은 대중의 내면에 감추어진 영성, 사회성이다. 그 생물의 피와 살이 있다. 최장집들의 제도우선주의는 기계론적인 발상이다. 불확정성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관념이다.

민주적으로 당선된 부시와 이명박은 민주 편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켰다. 민주주의라는 생물의 혈관을 끊어놓았다. 군부타도? 직접선거? 그게 다란 말인가? 그거 싱겁다.

왜 민주주의 해야 하지? 더 잘 살게 되기 때문에? 아니다. 더 부강해지기 때문에? 아니다. 왜 역사적으로 왕정과 귀족정과 독재가 출현할까? 그게 있어야 내가 세상의 중심과 연결된다고 믿는 자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에 속아서 안 된다. 본질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옛적에 신문고 제도가 있었다. 궁궐 주변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세종 이후 그 북 쳐본 사람은 백성 중에 거의 없었다.

신문고는 백성이 왕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상징물이다. 그것이 민주의 본질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과 연결되는가다. 왕정이나 귀족정, 독재정은 그 ‘세상의 중심’이 명확하게 보인다. 문제는 가짜라는 거.

어리석은 자들은 어떻게든 ‘세상의 중심’이 눈에 띄는 위치에만 있으면, 대궐 앞에 신문고만 매달려 있으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펴보지 않고 환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왕과 독재자가 나타났다.

민주 시스템에서 그 세상의 중심은 무엇인가? 만인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신문고는 무엇인가? 신문과 방송, 소문과 공론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왕도 아니고 조중동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다.

내가 ‘김대중이 옳았다’고 끝끝내 믿은 것은 그러한 고민 끝에서의 가치판단이었다. 살아서 호흡하는 세계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하고, 그 세계의 중심과 내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보편적 인류 양심의 편, 문명의 편, 진보의 편, 역사의 편, 진리의 편, 사회적 약자의 편, 신의 편에 서는 것이 민주주의다. 세계의 중심은 그 안에 있다. 나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여 있음을 안다.

태풍의 눈이 있는 이유는 태풍이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태풍의 눈은 사라진다. 보편적 세계의 중심이 있는 이유는 사회가 진보하기 때문이다. 진보를 멈추는 순간 중심은 사라진다.

우리가 계급을 반대하는 이유, 왕정과 귀족정, 독재정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진짜배기 세계의 중심과 나 사이를 갈라놓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과 독재자가 가짜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임무는 명백하다. 집단지성이라는 세상의 중심을 만들어 그 중심의 존재를 만천하에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중심의 존재를 포착하지 못한 국민이 왕과 귀족, 독재자를 섬기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군중의 정치가 아니라 ‘지성의 정치’여야 한다. 그 지성은 살아있는 지성,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지성, 시대정신과 함께 호흡하는 지성이어야 한다. 움직여야만 그 호흡을 드러낼 수 있다.

진짜는 추상적 가치다. 개인이 문명의 진보에 기여하고, 세계의 지성과 정신적으로 연대하여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우리가 김대중, 노무현을 필요로 한 것은 그 중심과 연결되는 끈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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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주주의 하는가? 내게 생기는게 있기 때문이다. 얻는게 있기 때문이다. 소득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두 손에 챙길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돈을 챙기려 하고 혹자는 권세를 챙기려 한다.

혹자는 왕이나 귀족을 숭배하며, 독재자를 섬기며 가짜 세상의 중심과 연결되는 데서 위안을 얻는다. 내가 민주주의로 얻으려 하는 것은 살아있는 진짜배기 세상의 중심과 직접 연결되어 소통하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10년간 나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알았고 그 뒷편에서 그대한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음을 포착했다. 태풍의 눈과도 같은 그 에너지의 중심을 몸으로 느겼다.

이명박 시대.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 모인 100만 시민은 세상의 중심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명박은 콘테이너로 막아서 그 연결이 끊어졌음을 확인시켰다.

그 싸움이 민주주의 본질이다. 직접선거? 대의정치? 웃기고 있네. 그것도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고안된 여러 수단들 중의 하나이지만 연산군 이래 영조때까지 한 번도 울리지 않은 신문고 된지 오래이다.

작금의 신당논란도 마찬가지. 민주당은 우리와 라인이 끊어졌다. 20대는 특히 유시민이라는 고리를 통해서만 중심과 연결된다. 유시민 없으면 20대는 정치와 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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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09-08-19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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