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지성의 역할모델
‘정치 그리고 지성이란 무엇인가?’

정치는 집단의 의사결정 구조다. ‘개인의지’에서 미디어에 의한 ‘의사소통’, 정당에 의한 ‘의사결집’, 선거에 의한 ‘의사결정’, 권력에 의한 ‘의사집행’으로 가는 1사이클이 있다. 그 안에 에너지 순환이 있다.

의사결정구조 자체가 진화한다. 그 안에 숨은 역동성, 생명성, 역사성을 포착할 일이다. 정치는 그렇게 살아있다. 살아있는 정치의 몸통과 심장과 뇌가 있다. 그 의사결정 구조의 뇌가 지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삶은 개인 단위로 출발하지만, 삶을 전개시킬 무대와 동기와 목적은 그룹 단위에서 조달된다. 그룹의 존재는 불투명하지만 전쟁 등으로 집단의 운명이 결정되는 지점에서 명백해진다.

정치가 개인과 그룹 사이의 고리가 된다. 지성은 개인이 사회화 과정을 거쳐 가족, 지역, 국가를 넘어 최종적으로 세계를 발견하게끔 이끄는 것이다. 문제는 그 세계의 뇌가 조직되어 있는가이다.

개인은 뇌가 있고 그룹은 리더가 있고, 국가는 정부가 있다. 세계는? UN인가? 아니다. 세계의 뇌는 인류의 집단지성 네트워크다. 그것은 무형의 존재다. 그래야 한다. 왜? 진화하기 때문이다.

세계정부 아이디어라든가, 혹은 제국주의 발상의 대두는 세계 단위 의사결정 문제가 제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유형의 것으로 가시화 될 때 도리어 인류의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된다.

지성은 더불어 진보하는 세계의 동그라미 안에서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진화하는 세계정신의 역동성 안에서 자신의 포지션과 임무를 깨닫고, 나아가는 방향성을 깨닫기다.

인류의 눈, 세계의 두뇌 역할을 해야 한다. 유형의 권력이 아니라 무형의 집적된 밸런스 형태다. 세계 지식인의 이심전심에 의한 무형적 연대 관점이 필요하다. 인터넷이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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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주변에 경쟁자가 없으니 지성이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기분대로 막나가도 말릴 자가 없다. 공룡이 눈감고 가도 앞을 막아 서는 자 없다. 그들은 몸통만 컸지 뇌가 왜소하다.

“힘으로 해도 되는데 왜 이성으로 해결해?”

뇌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구소련이 망하고부터 노골화 되었다. 겸손은 사라졌다. 오만해졌다. 경제위기 효과도 작심1년이다.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미국의 못된 점만 따라배우고 있다.

지금 인류문명의 밸런스는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생각있는 사람은 모두 느끼고 있다. 인류는 다시 한번 시험에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구촌 인류의 자정능력이 문제를 해결한다.

진화하는 세계의 밸런스 원리에 의해 결국 다시 회복된다. 다만 그것이 전쟁 등의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먼저 포착하고 먼저 알아챈 사람이 나서야 한다.

유럽은 여러나라 지식이 연대하고 있어서 확실히 지성의 존재감이 있다. 한국은 고립되어 있어서 지성의 위상이 약하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지성은 왜소해졌다. 존재감을 잃었다.

그러나 오백년 선비문화의 전통이 살아있다. 한국인의 가슴 밑바닥 깊은 곳에 지성인의 자부심이 있다. 그것을 어찌 세련된 문화양식으로 세팅하여 가시화할지의 미학적 고민이 관건일 뿐이다.

유럽형 지성은 자기 포지션을 소화하면 그만이다. 공격수는 골만 넣으면 되고 수비수는 골만 막으면 된다. 한국은 고립되고 사이즈가 작아서 중간 완충지대가 약하다. 극단적인 정치적 쏠림현상이 심하다.

유럽은 15억 기독교 문명권 단위로 밸런스가 작동한다. 국가 위에 EU 있다. 밸런스 위의 밸런스가 있다. 대략 북쪽 지역은 진보하고 남쪽 지방은 보수하며 전체적인 균형을 유지한다.

그들은 아프리카나 터키를 문명의 배후지로 삼는다. 남쪽에서 인구가 넘어오면 살기가 각박해져서 보수화 된다. 반면 생산력 혁신이 일어나 그들을 포용할 여유가 생기면 진보경향이 생겨난다.

그들은 역할분담 모델을 성공시키고 있다.

한국은? 5천만 단위로 밸런스가 성립한다. 5천만 중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은 적다. 사이즈가 작아서 쏠림현상이 심하다. 이 상황에서는 누가 집권해도 롤러코스터 정권이 된다.

포지션을 나누면 극단적인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는다. 유럽식 지성 모델은 한국에서 먹히지 않는다.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 빵이 열개면 나눠먹으면 되지만 하나 뿐이면 순번대로 먹어야 한다.

유럽은 빵이 열개라 분배가 가능하지만, 한국은 빵이 하나라 나눠먹자니 남의 빵이 커보인다. 전부 아니면 전무. 너죽고 나죽기. 순번대로 먹으면 되지만 믿지 못하니 누구도 뒷번호를 원치 않는다.

예로부터 한국은 화쟁사상, 통불교의 전통이 있었다. 교종과 선종이 대립 끝에 공존을 꾀한 것이다. 땅이 비좁아 함부로 나누다가는 누구 하나는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 수시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석가의 중도, 공자의 중용, 노자의 무위에 힘입어 통합적인 지식인 모델이 성립되었다. 한국에서 지식은 좌우 극단으로 치달아서 안 된다. 난 공격만 하겠다거나, 수비만 하겠다고 캐릭터 꾸리면 안 된다.

안하무인으로 지껄이는 무개념 지식인 캐릭터, 혹은 곧 죽어도 자존심만 지키겠다는 꼬장꼬장한 학자의 태도는 소아병적이다. 공격이나 수비 포지션을 넘는 심판의 관점, 중재자 관점을 얻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국에서 최후의 중재자, 최후의 균형추는 대중의 소임이다. 대중의 균형감각이 한국을 살렸다. 역대선거 결과가 입증한다. 대중을 어버이로 아는 진짜 지성이 필요하다.

대중의 숨겨진 마음을 읽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차별화 전술보다 공감의 전략이 더 호소력이 크다. 한국의 지정학적 구조, 사회발달 단계에 맞는 지성인 역할모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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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성인가? 세계의 중심과 연결된 자가 지성이다. 세계정신과 소통하는 이가 지성이다. 세계가 아플때 그 아픔이 느껴지는 자가 지성이다. 그 아픔이 전달되지 않는 자가 야만인이다.

진보, 보수 문제는 이성적 판단 이전에 물리적인 생존조건 문제다. 문제는 지식인이 그 물리의 최전선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상아탑이라는 안전한 후방에 있어서 갈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경기가 좀 나아지거나 혹은 경기가 나빠지거나 간에 그들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들에게 이념은 관념화 되어 있다. 그들은 민감한 센서를 잃었다. 안테나 고장난 라디오 된지 오래다.

보수는 일정부분 생존본능이다. 햄스터는 먹이가 부족하거나 영토가 좁으면 서로 잡아먹는다. 인간에게도 그러한 야만의 본성이 있다. 이는 진화과정에서 형성된 유전인자이므로 부정할 수 없다.

‘보수가 옳지 않다’는 가르침만으로 이길 수 없다. 미국인이 뚱뚱해진 것은 ‘비만이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알면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보수심리도 마찬가지.

전쟁이나 불경기와 같은 결정적 위기, 혹은 인터넷과 같은 결정적인 혁신에 의해서만 인간은 야만한 본성을 벗고 반짝 이성을 회복한다. 약간의 여유만 있으면 다시 야만의 긴 잠에 빠진다.

진보는 계몽과 학습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청동제 무구가 지배하던 시절, 귀족들만 무장할 수 있었다.(야금기술 부족으로 철기는 농기구로 쓰임.) 야금기술이 발달하여 철제무기가 보급되자 평민이 무장하게 되어 고대 노예제는 해체되었다.

대중이 결정적인 생산수단을 장악할 때, 혹은 미디어의 획득에 의해 의사소통, 의사결집, 의사결정 수단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설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는 가능하다.

관념좌파들은 대중의 미디어 장악노력을 외면한다. 심형래 디워소동 이면에 도사린 ‘미디어를 장악하려는 대중의 권력의지’를 꿰뚫어보지 못한다. 함부로 대중을 경멸하고 좌절시켜 보수화를 부채질한다.

인간은 꿈이 있을 때 자부심을 가진다. 이성을 회복하고 진보성향을 드러낸다. 왜? 꿈은 공유되면 공유될수록 가치가 빛나기 때문이다. 꿈을 공유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협력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하거나 그림을 하거나 간에 혼자서는 재미없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혹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재화의 소비든 간에 타인과 공유될 때 가치가 빛난다. 혼자먹기보다 함께먹기가 맛있다.

인터넷은 공유될수록 그 가치가 커진다. 대중이 스스로 공유하려 할 때가 진보가 빛나는 지점이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이성을 회복한다. 인간의 꿈은 결코 개인의 욕망을 달성함에 있지 않다.

진정한 꿈의 실현은 함께 하는 세계 안에서 의사소통, 의사결집, 의사결정 형태로 이루어진다. 생산수단의 획득, 미디어의 지배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게 세계의 중심과 연결되고 싶어한다.

세계와 함께 호흡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그 가능성이 차단될 때 좌절한다. 꿈을 잃는다. 그럴때 은폐된 생존본능이 발동된다. 보수화 된다. 보수는 본능이므로 설득되지 않는다.

어떤 논리로도 수구꼴통 아저씨를 납득시킬 수 없다. 지식인이 그들 좌절한 자, 꿈을 잃은 자, 공존하는 법과 공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 낙오된 자들의 생존본능을 자극한다면 고약하다.

그들을 좌절시켜 악한 생존본능을 발동시킨다면 참으로 딱하다. 중요한건 지식이 그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꿈을, 목표를 제공할 수 있는가이다. 대중의 본심을 읽는 능력을 획득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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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09-09-15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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