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에 단계는 없다”

지난주 토론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다. 심리학에서 ‘의식의 단계’를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고 한다. 의식에 ‘단계’는 없다. 의식은 깨어있음이다. 인간은 깨어있거나 잠들어있거나 둘 중에 하나다.

단계는 없지만 방향성은 있다.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돈 주울세라 땅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정신차린 사람도 있고, 한눈파는 사람도 있다. 거기에 긴장과 이완의 법칙이 있다.

‘의식의 단계’ 개념은 예로부터 있었다. 선각이니, 후각이 하며 계단을 나누는 명상그룹이 있고, 불교에도 말나식, 아뢰야식 하는 것이 있다. 구조론에도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단계가 있다.

구조론 5단계는 통합되어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을 이룬다. 단계가 있지만 한 덩어리로 모듈화 되어 있으므로, 실제의 작동에 있어서는 언제나 1단계로만 나타난다. 단계가 없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한 계단씩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으로 바로 간다. 소통과 감응과 증폭과 공명으로 바로 간다. 1단계씩 차례로 부팅하는 것이 아니라 스위치만 켜면 바로 방송이 나와야 한다.

구조의 모듈화로 단계가 없지만, 5단계로 풀이하는 이유는, 불완전하게 다른 것에 빌붙어 있는 것들 때문이다. 사람이 소를 몰고 간다면 소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므로 불완전한 의식이다.

아기가 엄마 등에 업혀 간다면 역시 불완전한 의식이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거름지고 쫓아온 사람, 남의 지시를 받은 노예, 멋 모르고 얼떨결에 따라온 사람, 정신 나간 사람의 의식은 불완전하다.

완전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존재론으로 보면 오직 질에서 양으로 일방향적인 진행을 할 뿐, 양에서 질로 올라서지 않으므로, 낮은 의식단계에서 높은 의식단계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자연계에서 양질전화는 없다. 닫힌계 안에서 모든 것은 높은데서 낮은데로 일방향적인 진행을 한다. 개가 깨우쳐 사람이 되거나, 혹은 쥐가 깨우쳐서 인간구실을 할 수는 없는 이치와 같다.

개는 깨우쳐봤자 훌륭한 개가 될 뿐이며, 쥐는 깨우쳐봤자 영리한 쥐가 될 뿐이다. 의식이 위로 올라가는 경우는 없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잠들어 있거나 그 잠에서 깨어나거나 뿐이다.

인식론은 다르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서며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젖히곤 한다. 그것은 학습된 지식이지 각성된 의식이 아니다. 지식은 누군가 뒤에서 코치해줘야 작동한다.

존재론- 독립적인 일의 한 단위다. 작동할 때는 언제나 질에서 양으로만 움직인다. 높은 단계의 긴장에서 낮은 단계의 이완으로 내려간다.

인식론- 지식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다른 사람의 높은 의식에 빌붙어서 인식의 지평이 상승한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선다.

엄마의 지시를 따르는 꼬마,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개, 상사의 지시를 받는 부하는 낮은 단계의 의식상태에 머무른. 더 높은 수준의 작업을 지시받을 때, 의식 역시 높은 단계로 올라선다.

점원이 독립하여 사장이 되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린다. 더 많이 긴장하게 된다. 이는 사회의 집단작업에 해당되므로 독립된 개인의 의식이 아니다. 불완전한 집단의식은 배제해야 한다.

개미의 군집이라면 개미들 각각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각자 맡은 일을 할 뿐이다. 이는 불완전한 의식상태라 하겠다. 침팬지 무리의 리더는 더 높은 수준의 각성생태에 도달해 있다.

서열이 낮은 침팬지에서 왕초로 올라선 침팬지는 높은 의식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는 그룹에서 승계된 것이지 자신이 찾아낸 것은 아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던 높은 의식이 전수된 것이다.

의식에 단계는 없지만 방향성은 있다. 바깥을 바라보고 외부변화에 대응하는 사람이 있고, 안을 바라보고 내부질서를 통제하려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외교를 맡고, 후자는 내치를 한다.

전통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이다. 전자는 긴장하고 후자는 이완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긴장이 먼저고 이완이 나중이다. 긴장은 외부표적을 포착하고 이완은 내부질서를 거기에 연동시킨다.

하나의 일은 먼저 외부에서 표적을 찾고, 다음 내부를 줄세워 표적의 움직임에 연동시키는 형태다. 이에 의식의 방향성이 성립하며 전자는 개인의 독립적 역할, 후자는 집단의 사회적 역할이다.

깨달음은 긴장후 이완으로 넘어간다. 그 사이에 오르가즘이 있다. 쾌감이 있다. 명상은 쾌감을 즐긴다.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실패다. 쾌감을 느끼려면 먼저 고도로 긴장을 끌어올려야 한다.

외부의 표적을 찾는데 긴장이 있다. 긴장없이 곧바로 이완하면 나태해진다. 선가의 평상심이 나태함은 아니다. 몽롱하게 취한 상태나 잠든 상태가 아니다. 이완상태를 명상으로 안다면 잘못이다.

긴장에서 이완으로 넘어가는 것이며 그럴 때 뇌는 쾌감을 느낀다. 드라마의 클라이막스와 같다.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고도의 긴장상태다. ‘암행어사 출도야’ 하면 편안한 이완이다.

뇌는 긴장해야 하고 몸은 이완해야 한다. 몸이 경직된 것을 긴장으로 여긴다면 잘못이다. 히딩크는 말했다. 한국팀은 정신력이 약하다고. 몸이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몸이 굳어있다면 긴장이 아니다.

참된 긴장은 몸은 풀려있고 마음은 고조된 것이다. 식물이 햇볕을 받듯이, 동물이 먹이를 포착하듯이, 직원이 월급을 받듯이, 외부의 에너지원과 직접 연결되어 충만해 있는 것이 고조되는 것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설레임이다. 두려움은 미처 표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설레임은 표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연동이다. 마음이 포착한 외부표적에 몸이 줄세운 내부를 연동시킨다.

하나의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A 다음에 B, 그 다음은 C, 그 다음은 D로 차례차례 준비되어 있는 것이 연동이다. 연동성이 높을수록 설레인다. 내일 소풍을 간다면 무엇을 해야할지 다 알고 있다.

준비되어 있고 연동되어 있다. 배낭도 챙겨놨고 김밥도 싸놓았다. 날씨만 좋으면 된다. 그러므로 설레인다. 그러나 호랑이가 덤빈다면 그 다음은? 모른다. 연동되지 않는다. 무섭다. 몸이 경직된다.

명상의 요구는 긴장과 이완의 쾌감이며, 그것은 긴장 다음에 이완이며, 구체적으로는 마음이 표적을 확인하여 설레이고, 몸이 연동되어 편안하게 이완된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깨어있음이다.

이완은 마음이 표적을 찾아서 A가 달성되었을 때 그 다음 단계의 목표 B, C, D, E로 순조롭게 넘어가는 것이다. 갖추어져 있고 준비되어 있으면서 연동되는 것이다. 전부 한 줄에 꿰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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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진짜로 명상하는지, 그냥 머리에 힘주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호흡 운운한다면 사기다. 호흡을 멈추면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환각상태에 빠지게 된다.

환각상태를 체험하고 명상을 했노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LSD라고 마약을 사용하는 그룹도 있다. 진짜 명상을 해야 한다. 명상은 쾌감을 수반하는 것이다. 쾌감이 없다면 명상할 이유가 없는 거고.

경험을 말하면 테크닉이 있다. 어떤 제목이든 던져주면 즉시 생각을 만들어올 수 있다. 그 주제로 짧은 글을 쓸 수 있다. 단어 두 개만 주면 즉석에서 ‘시’를 지어준다는 사람도 있다더라.

길거리에서 즉흥시를 판다는데 그 분도 테크닉이 있을 것이다. 생각은 그냥 머리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공식에 맞추어 풀어내는 것이며 공식이 있어야 한다. 나의 공식은 ‘전제를 찾는 것’이다.

어떤 말이든 동사가 중심이며, 그 전제로 명사가 숨어 있다. 명사와 동사가 붙으면 문장이 되지만, 그 문장에도 전제가 있다. 전제의 전제가 있다. 동사의 전제는 명사, 술어의 전제는 주어다.

주어와 술어가 붙으면 진술이다. 그 전제가 예의 ‘전제’다. 전제와 진술이 붙으면 주장이다. 주장의 전제는 근거다. 근거와 주장이 붙으면 인식론이다. 그 전제는 존재론, 존재론의 전제는 완전성이다.

완전성에 도달하면 낳는다. 낳으며 전개한다. 창조한다. 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이다. 새끼를 치는 것이다. 거기에 힘이 있고 기세가 있다.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원을 찾으면 최종적인 성공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에너지를 찾으면 성공이다. 음악이든 회화든 문학이든 반드시 에너지가 있다. 모든 예술은 바깥에서의 에너지를 유도하는 절차다.

에너지는 근원의 자궁에서 나온다. 최종적인 자궁이 있으며 거기서 낳는다. 낳아서 채워진다. 그렇게 뻗어나간다. 그것이 생명성이다. 완전성에 도달할 때 일의 1 사이클이 끝난다. 이야기는 완결된다.

그럴 때 생각의 부스러기들은 전부 한 줄에 꿰어져 연동된다. 쾌감을 느낀다. 오르가즘을 느낀다. 새벽 1시에 벌떡 일어나 마을을 한 바퀴 돌고와야 할 정도로 몸이 달뜬다. 편안하게 이완된다.

명상은 전제를 찾고, 전제의 전제를 찾고, 그 방법으로 계속 추궁하여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리하여 쾌감을 얻는 것이다. 부처의 미소는 그 쾌감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긴장을 끌어올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근원적인 모순, 근본적인 질곡을 드러내야 한다. 앞집 강아지가 병아리를 깨물었어도 생각 속에서는 우주가 흔들리는 일대사건으로 비약되어야 한다.

‘강아지를 야단치면 된다. 끝.’ 이렇게 간단히 결론을 내면 도무지 생각을 진행할 수가 없다. 우주 안에서 강자와 약자의 대결이 존재하는 한 그 강아지와 병아리의 충돌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강아지를 야단치면 된다’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되기는 뭐가 되었지?’하고 한번 더 추궁해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므로 강아지가 병아리를 문다.’ 한 단계 더 올라선 것이다. 더 높은 무대가 깔린다.

우주 안의 모든 약자가 연대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에 맞서야 한다. 여기서 끝내서 안 된다. 더 나아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약자를 연대하게 할 수 있지? 약자를 연대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식이라는 에너지, 깨달음이라는 에너지, 함께 하는 기쁨이라는 에너지를 끌어내야 한다. 그 에너지의 순환에서 얻어지는 창조의 기쁨을 모두가 맛보게 해야 약자의 연대는 진정으로 성사된다.

명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쾌감이 없기 때문이다. 쾌감이 없는 이유는 진척이 없기 때문이다. 진도가 안 나가는 이유는 테크닉을 모르기 때문이다. 약간의 테크닉을 알면 일단 흥미를 가질 것이다.

왜? 좋으니까. 쾌감이 따르니까. 물론 한 두가지 테크닉 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림을 그리더라도 그렇다. 한 두 가지 간단한 테크닉을 가르쳐주면 일단 흥미를 갖고 집중할 것이다. 충분하지 않다.

고도로 긴장을 끌어올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신과 나, 세상과 나, 우주와 나의 근원적인 대립각을 확인해야 한다. 거기서 에너지를 조달받아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에너지, 내가 생각하는 에너지를.

내 몸을 편안히 이완시켜 마음의 표적에 연동시킬 때 쾌감이 있다. 내 삶의 전부를 자유롭게 하여 내 꿈의 표적에 연동시킬 때 행복하다. 사회의 각자에게 자유를 주어 신의 이상과 연동시킬 때 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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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에 단계는 없다. 깨어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둘 중 하나다.

● 의식의 단계는 없지만 의식의 방향성은 있다. 바깥에서 표적을 확인하려는 긴장의 마음과 이에 내부를 연동시키려는 몸의 이완이 있다.

● 의식의 단계가 없으므로 명상은 완전성으로 바로 간다. 가장 높은 단계인 정상에서 스위치가 켜진다. 스위치가 켜지지 않으면 아래의 단계를 밟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 명상은 먼저 외부에서 표적을 얻어마음을 긴장시키고, 다음 내부를 연동시켜 몸을 이완시키며쾌감을 얻는 형태로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을 성립시켜 완전성에 이른다.

● 외부의 표적을 얻는 방법은 진술에서 전제를 찾고, 그 전제의 전제를 찾아 계속 추궁하여 들어가며, 근원의 모순에 이를 때까지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 근원의 모순에 도달할 때 바깥에서 에너지를 조달받아 일의 1사이클을 완성할 수 있다. 그 지점에서 창조는 완성된다.

● 의식은 질에서 양으로 일방향 진행하므로 단계가 없지만, 인식은 구조론의 전개에 따라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단계가 있다.

● 의식은 존재론, 인식은 인식론이다. 존재론은 개인의 의식상태에서 에너지 순환 1 사이클을 완성하는 일의 진행이고, 인식론은 사회적 집단작업에서의 일의 진행이다.

● 존재론에서 의식의 단계는 없지만, 인식론에서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다섯 단계가 있다. 노예의 마음에서 주인의 마음으로 올라서는 정도에 따른 단계다. 이는 사회적 집단작업에서이며 의식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다.

● 지식의 집단작업은 상부구조가 되는 다른 사람의 머리를 빌리므로 마음은 버려두고 몸만 움직여도 되므로 의식이 낮은 단계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리더는 머리를 빌릴 수 없으므로 깨어있어야 한다.

● 사회적 집단작업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로 올라설 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리지만 이는 깨달음이 아니라 그 이전의 리더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다. 전두환도 대통령 자리에 앉혀두면 의젓한체 하지만 진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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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09-11-05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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