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진짜배기가 필요해’ 편과 이어집니다.

구조적인 이해가 중요하다. 몸과 맘과 삶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하나의 존재가 전개하는 과정이다. 존재는 그냥 우두커니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신을 펼쳐서 세상에 드러낸다.

깨달아야 할 ‘나’도 하나의 존재다. 나를 펼쳐내는 단계가 몸이고 맘이고 삶이다. 가난할 때는 몸이 중요하다. 배부터 채운다. 가난을 극복하니 맘이 고프다. 마음의 양식인 지식을 채워야 한다.

배 채우고 지식 채웠다면 삶을 채워야 한다. 더 높은 목표를 제시하자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 셋을 관통하는 근원의 하나를 깨닫는 것이다. 물러나 몸 이전을 깨닫고 나아가 삶 다음까지 깨닫기다.

몸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자연이 있었다. 몸과 맘과 삶을 거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며 1 사이클을 완성한다. 깨닫는다는 것은 그러한 전개과정에서의 완전성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전개하는 존재, 펼쳐지는 존재, 한 떨기 꽃처럼 피어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대로 꽃을 피웠는지가 문제로 된다. 완전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므로 완전성을 포착하게 하는 통짜덩어리 인식이 필요하다. 전모를 볼 수 있는 정상에서의 시야가 필요하다.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내게 하는 상부구조의 건설이 필요하다.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것으로 무엇을 얻는가? 비참을 극복한다. 인생의 고(苦)는 몸의 고단함이 아니요 마음의 우울함이 아니다. 삶의 비참이 진짜다. 그러므로 구원되어야 한다. 몸이 치료되는 것이면 삶은 구원되는 것이다.

구원은 수렁에 빠진 사람이 외부의 손길에 도움받아 빠져나오듯 그 상황에서 완전히 떠남으로써 가능하다. 폭력배가 어둠의 세계를 떠나고, 노예가 주인에게서 놓여나듯 완전히 그 세계를 떠난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상승이 그곳에 있다. 인간을 진정으로 이롭게 하는 것은 몸의 배부름이나 마음의 평안이 아니다. 구원에 의한 상승이다. 혼자서는 상승이 불가능하다. 세상과의 관계맺기로 가능하다.

깨달음에 기초한 폭넓은 사회적 소통을 통한 집단지성의 성립과 그 사회적 인격의 획득에 의해 진정으로 상승이 가능하다. 대승의 정신이 ‘세상을 바꾸는 기획’에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욕망에의 집착에서 찾았으며, 욕망을 끊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약하다. 기독교는 원죄를 주장한다. 그러나 가짜다. 어느 쪽도 답은 아니다.

진정한 구원은 비참을 벗어나는 것이다.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비참은 기독교의 원죄처럼 주어져 있다. 비참은 ‘삶의 허무’라는 존재 그 자체의 본질적인 한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펼쳐내는 것이다. 내 안의 잠재된 능력을 펼쳐내지 못함이 비참이다. 닭이 새벽을 맞아 울지 못하고, 개가 도적을 맞아 짖지 못하고, 말이 달리고 싶어도 달리지 못한다면 그것이 비참이다.

실존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신의 은총에 의해 인격이 부여되는 줄 알았다. 인간의 영혼 속에 인격을 보증하는 윤리와 도덕의 원소가 침투하여 있는줄 알았다.

개에게 없고, 닭에게도 없으며, 쥐에게도 당연히 없는, 신의 콧김으로부터 전해진 특별한 생명의 원소가 인간의 영혼에 깃들어 있으며 그것이 윤리와 도덕을 낳고 인간자격을 담보하는 줄 알았다.

귀족에게는 그것이 많고 노예에게는 그것이 적은줄 알았다. 칸트는 이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정리했다. 그러나 그것은 없다. 과학이 규명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이 그 때문이다.

인간의 비참을 정면으로 직시한 것이 실존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본질은 이성을 앞세우는 칸트의 입장이다. 실존이냐 본질이냐 이성이냐 부조리냐. 과학은 샤르트르의 손을 들어주었다.

과학적 사고는 수학적 사고다. 수학적 사고는 연역적 사고다. 연역의 출발점이 되는 기점이 필요하다. 데카르트가 말한 제 1 원인 말이다. 칸트는 이성을, 샤르트르는 실존을 제 1 원인으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존재를 말했다. 존재는 펼쳐진다. 펼쳐지지 않은 씨앗은 명목이다. 펼쳐진 꽃은 기능이다. 명목은 존(存), 기능은 재(在)다. 인간은 몸에서 맘으로 삶으로 존재 그 자체를 차례차례 펼쳐낸다.

몸은 씨앗, 맘은 줄기, 삶은 꽃이다. 인간이 비참한 이유는 그 씨앗이 싹트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줄기로 자라난 싹이 꽃 피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꽃 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부조리다.

인간의 모든 고민을 근원의 두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누가 물어봤냐고?’다. 둘은 ‘그래서 어쩌라고?’다. 누가 어디서 어떤 주장을 하든 피해갈 수 없는 이 두 질문 앞에서는 당혹해 한다.

돈이 많은 자든, 지식이 많은 자든, 권세가 있는 자든, 명성을 얻은 자든 이 두 질문 앞에서는 초라해지고 만다. 사회라는 게임의 규칙 안에서 대접받는 돈과 지식과 권세와 명성이 부조리 앞에서 허무다.

전자는 ‘왜 사는가?’다. 후자는 ‘어떻게 살것인가?’다. 전자는 존재의 명목을 묻고 후자는 존재의 기능을 묻는다. 명목은 씨앗이고 기능은 꽃이다. 과거에는 거짓 대답으로 숨는 방법을 썼다.

귀족으로 태어난 것을 삶의 명목으로 삼고 존귀한 대접을 받는 것을 기능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귀족제도는 폐지되었다. 씨앗이 다르고 꽃이 다르다고 우겼다. 과학에 의해 그 거짓말은 폭로되었다.

종교도 나름대로 대답을 한다. 천국을 명목으로 삼고 기도를 꽃으로 삼았다. 그러나 거짓되다. 삶 안에서 그 명목과 기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실존 개념이다. 그 방법으로 허무를 극복해야 한다.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존재의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가? 허무가 있다. 존재는 어떻게 허무를 극복하는가? 꽃피움으로써 가능하다. 내 안의 가능성을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대승의 기획에 참여하기다.

● 존재의 씨앗은 명목 - 왜 사는가? (누가 물어봤냐고?)
● 존재의 꽃은 기능 -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어쩌라고?)

세상이라는 극장을 찾아왔다. 누구도 나를 무대 위로 불러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간신히 무대 위로 기어올랐으나 정작 그 무대에서 부를 노래가 없다. 그러므로 완전성을 고민해야 한다.

존재 그 자체의 본질적 한계다. 존재는 씨앗이며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깨달음은 비참을 극복하는 것이며 소통≫집단지성≫사회인격에 의해 더 높은 레벨로 상승함으로써 비참이 극복된다.

그것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 무대 위로 오르기 위하여 이상주의라는 명목이 나오고 그 무대 위에서 한 곡조 뽑기 위하여 미학이라는 기능이 나온다. 그것으로 삶을 완성하기다.

● 존재는 불완전하다.
● 존재의 불완전성을 노출시키는 것은 허무다.
● 존재는 명목과 기능, 곧 씨앗과 꽃으로 자신을 전개시키므로 불완전하다.
● 존재의 불완전성과 그 불완전성을 극복하게 하는 완전성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 자연에서 온 인간이 몸≫맘≫삶을 거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1 사이클의 에너지 순환을 완성시키는 것이 깨달아야 할 완전성이다.

●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은상승 뿐이다.
● 구원은 상승하여 그 세계에서 완전히 탈출하는 것이다.
● 존재의 불완전성 허무가 삶의 비참으로 나타나기에 인간은 상승해야 한다.
● 내 안의 잠재한 가능성을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실현함으로써 인간은 구원된다.
● 사회의 명목인 이상주의(집단지성)와 기능인 미학(콘텐츠)으로 전개하는 대승의 기획에 참여함으로써 존재는 꽃 피우고 비참은 극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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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09-12-2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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