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여서 설명함

미(美)를 이해한다는 것은, 미를 인간을 위해 기능하는 것으로 대상화 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미(美)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이 미(美)라는 요상한 바퀴벌레가 식욕이 얼마나 왕성한지, 처음 르네상스 때만 해도 피렌체 주변에서나 겨우 서식할 뿐이었는데, 점점 서식지를 넓히더니 요즘은 주로 애플이나 아우디의 제품을 숙주로 삼아 마구 증식하면서 바야흐로 전 지구를 장악할 태세로 인류를 위협하고 있으니 장차 21세기 문명이 통째로 미(美)라는 바퀴벌레에게 접수당할 위기에 놓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을 획득하느냐가 중요하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인간의 쓸모를 떠나, 미 자체가 독립적인 자신의 의지로 폭주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원리는 학문이나 자본이나 문명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된다. 미(美)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나, 학문이나, 문명의 진보도 같은 원리라서 예컨대 자본이 인간을 위해 기능하는게 아니라, 자본이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터무니없이 폭주하여 오대양 육대주를 지금 맹렬하게 먹어치우고 있는 거다. 냉전해소 전후로 세계사의 전개를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획득하지 못하고 실용주의 관점에서 ‘그딴게 무에 쓸모가 있느냐?’는 식으로 보면 곤란하다. 수준이하가 된다.

뇌구조를 이해하거나, 영어를 학습하거나, 유전인자를 이해하는 것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생태계의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한다. 학습을 한다는 것도 주입식으로 그냥 머릿속에 뭔가를 잔뜩 집어넣고 보자는게 아니라 뇌 안에 지식의 생태계를 건설하여 가는 것이며 그 생태계 안에서 지식의 나무가 스스로 자라게 물만 주는 것이어야 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알아먹는다거나 뭔가를 봤다거나 하는 따위는 깨달음이 아니다. 깨닫는 대상인 무언가가 없어야 한다. 무언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나무 그 자체가 내 안에서 스스로 자라는 것이며 인간은 그저 바운더리를 제공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볼 뿐이다.

‘대상화’ 시켜서 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마 알 것이다. 요즘 좀 아는 사람들이 무개념 마초들을 비판할 때 ‘여성을 성적인 대상화’ 어쩌구 하는 표현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 반대로 ‘주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그것에 기여한다는 말이다. 이건 앞에서 언급한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를 본 사람은 다 아는 거고. 쉽게 말하면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에 내가 그것에 다가가서 그것에 기여하여 그 자체를 완성시켜 주려고 하는 관점이 주체적인 관점이고, 내가 그것을 이용하여 어딘가에 써먹으려 하는 관점이 대상화 시키는 거다.

◎ 얼빠진 마초들.. “저걸 어따 써먹지?”

◎ 좀아는 사람들.. “어떻게 저걸 완성시켜 제 소리를 내게 할 수 있지?”

그 대상이 나를 위하여 기능해야 한다고 믿으면 대상화가 되고, 반대로 내가 그 대상을 위하여 기여하고자 하면 주체적 관점이다. 좋은 원석이 있는데 제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 보석을 솜씨있는 장인에게 주어서 제 빛을 찾아주고 싶은 욕망을 누구나 가지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욕망은 그 보석을 내가 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보석은 본래 자체의 빛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 뿐이다.

좋은 종(鐘)이 있는데 당목이 없어서 치지 못한니 그 울림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되게 궁금할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 소리 한 번 들어보고 싶을 것이다. 굵은 나무를 깎아다가 좋은 당목을 만들어서 그 종으로 하여금 제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 그 종을 완성시켜 주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한 성(聖)의 마음, 그 대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남산 앞에 사각형 빌딩이 시야를 가리고 있다면 그 빌딩을 치워서 서울시민 누구나 그 남산의 아름다운 자태를 볼수 있도록 하고픈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성(聖)이다.

여성에 대한 태도이든, 미에 대한 태도이든, 깨달음에 대한 태도이든, 자본에 대한 태도이든, 생명에 대한 태도이든 인간은 그저 그 보석의 빛을 가리는 방해자를 제거할 수 있을 뿐, 보석 자체는 손을 대서 안 되는 것이다. 그 대상에 자체의 엔진이 있고, 동력이 있으며, 그 대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전진할 수 있으며 인간은 걸치적거리지 않게 길을 비켜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수평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방법으로 완성시켜줄 수 있을 뿐이다. 티끌만큼도 거기서 내게로 가져올 수 없다. 꽃을 사랑한다 함은 꽃이 잘 피도록 창가에 놓아서 햇볕을 보게 하는 것이지, 꽃을 따서 내게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동양이 서구에 뒤처진 이유는 동양의 경우 학문을 실용적인 ‘도구’로 보았기 때문이며, 서구의 경우 학문을 논리학, 수학을 중심으로 한 ‘공리공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논리학이란 동양에서 명가로 통하는데 그게 기실 말장난이요 수학이란 것도 별자리의 운행을 계산할 때 외에는 써먹을 데가 없는 것이다. 단지 학문하기 위한 학문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학문 그 자체를 완성시켜 주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지금이야 뭐 수학을 온갖 일에 써먹고 있지만, 피타고라스가 처음 수학을 연구할 때는 별로 써먹을 데가 없었다. 단지 그 자체를 완성시켜 주는데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수의 비밀을 파헤치는 그 자체로 순수하게 기쁨을 느꼈다. 인의예지란 것도 하늘의 원형이정과 일치시켜 4계절의 운행법칙을 인간의 삶의 법칙과 일치시키려는 것인데, 또한 학문하기 위한 학문이지 그게 무슨 당장의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가 그 자체로서 반듯한 모양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며 그 진리의 반듯한 모양을 찾아주는데 쾌감을 느꼈던 거다.

만물에게는 제 반듯한 모양이 있으며, 이 풍진 세상에서 얽히고 섥혀서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적다. 인간에게는 그 각자에게 각자의 반듯한 제 모습을 찾아주고 싶은 성(聖)의 욕망이 있다. 진리는 진리답게 진리의 제 모습을 찾아주고 싶고, 꽃은 꽃답게 피어나게 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보석은 빛나게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만물의 갖추인 감추어진 역량을 남김없이 드러내게 하고 싶은 것이다. 모두가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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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결혼한다’가 아니고 ‘결혼하면 사랑한다’. 진선미주성의 의미가 이거다. 자전거는 균형을 잡아야 달리는 것이 아니고, 달려야 균형이 잡힌다. 수영은 물에 떠야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니고, 헤엄을 쳐야 물에 뜬다. 이 말을 고지식하게 듣고 당장 수영장으로 달려가서 무턱대고 헤엄을 치다가 물 잔뜩 들이키고 와서 필자를 고소하겠다고 위협하면 그것도 곤란하다. 자전거를 못타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함부로 자전거를 타다가 자빠져서 무릎이 까지고 나서 내게 치료비를 청구한다면 그것도 무리수다.

성주미선진으로 가야하지만, 결국 진선미주성으로 간다. 자전거를 달려야 균형이 잡히지만 결국 균형을 잡고 자전거를 달리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항상 강조하는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이 일어난다. 이 말은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그렇다. 성주미선진으로 가야하지만, 결국 진선미주성으로 가는 이유는 그 진 안에 다시 작은 성주미선진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가야 하지만, 실제로는 낮은 질서에서 높은 질서로 가는 이유는 그 낮은 질서 안에 다시 성주미선진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성(聖)을 학습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진(眞)을 학습하게 되는 이유는, 그 진(眞) 안에 다시 작은 성주미선진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낮은 단계에서 패턴을 완성한 다음에 이를 증폭하여 전체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는 이미 환경이라는 바깥뇌가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생태계 전체로 보면 역시 성주미선진으로 간 것이다.

  • 성주미선진으로 가야한다.
    -실제로는 진선미주성으로 단계를 밟아 올라간다.
  • 진 안에 다시 작은 성주미선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 진 안의 작은 성주미선진을 완성한 다음 전체에 덮어씌우기 한다.
  • 바깥뇌를 포함한 전체로 보면 인간이 깨닫지 못할 뿐 성주미선진으로 가고 있다.

예컨대 부대를 편성한다면 처음 군단을 만들고, 다음 사단과, 연대와, 대대와, 중대와, 소대를 차례로 만들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소대를 먼저 만들고 다음 그 패턴을 군단에 덮어씌우기로 복제하는 것이다. 수신한 다음에 제가하고, 치국하고, 평천하 하는게 아니라, 평천하 한 다음에 수신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수신 안에 작은 평천하가 숨어 있다. 내 안에 우주의 복사판이 있다. 그러므로 내 안의 우주를 평천하 하면 수신이 완성되는 것이며, 제가와 치국은 건너뛰고 바로 그 완성된 패턴을 천하에 덮어씌우기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비약하는 것이다. 중간단계를 생략하고 정상으로 바로 간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평천하를 하겠다는 마음을 품어야 수신이 가능한 것이며, 그러한 참된 마음이 없는 자는 수신을 할 수 없다. 그렇다. 처음부터 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내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며, 내 하나가 완성되어야 비로소 신의 친구가 될 수 있고, 그 사이에 잡다한 것은 필요없다.

  • 페달을 밟아야 균형이 잡힌다.
  • 실제로는 균형을 잡고 페달을 밟는다.
  • 균형잡기 안에 작은 페달밟기가 숨어 있다.
  • 페달부터 밟는다는 마음으로 해야 균형이 잡힌다.
  • 지구중력을 포함한 전체로 보면 여전히 페달밟기가 먼저다.

자동차는 가야 시동이 걸리지만 실제로는 시동을 걸어야 간다. 그러나 그 시동걸기안에 다시 작은 가기가 숨어 있다. 구동모터가 회전하여(가서) 엔진을 돌리는 것이다. 그 구동모터의 작동도 들여다보면 납축전지 안에 이미 작은 전기의 가기가 숨어있다. 하여간 운전자가 키를 돌리는 것이 이미 ‘가기’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운전자의 심장이 뛰기 때문이고, 결국 운전자의 심장은 이미 가고 있었던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심장은 24시간뛰는 것이다. 인간은 가지 않아도이미 가고 있었던 것이며, 심장의 가기를 인체의 가기로, 인체의 가기를 키의 가기로, 키의 가기를구동모터의 가기로, 구동모터의 가기를 엔진의 가기로, 엔진의 가기를 자동차의 가기로, 자동차의 가기를 여행자의 가기로 계속 복제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심장이 이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가는게 먼저다. 시동을 걸어야 가는게 아니고 가야 시동이 걸린다. 어떤 경우에도 성주미선진이다. 그런데도 초딩들이 실제로는 진선미주성으로 가는 것은 바깥뇌의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체로 보면 여전히 성주미선진이다. 항상세력을 보고 전체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말하자면 내가 일해서 돈을버는 것이 아니라 지구촌자본의 나무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며 그 자본나무의 성장이 내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백점을 맞는 것이 아니라 지구촌 지식나무가 성장해서나의 성적표에도 그 꽃 한 송이가 핀 것이다.

사랑해야 결혼하는게 아니고 결혼해야 사랑한다. 이 표현을 고지식하게 들으면 대화가 안 되는 거고, 결혼이라는 글자에 집착하지 말고, 예수가 마음에 간음한 자도 이미 간음했다고 말했던 그 의미로다가, 첫눈에 작게라도 ‘결혼’해야, 다시 말해서 결단을 내려야, 행동을 취해야, 액션을 해야그 만큼이라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당장 예식장을 잡으려 달려갈 필요는 없고, 첫 만남에서 뭔가 방아쇠가 당겨져야 한다는 말이다. 액션이 중요하고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것을 작게라도 멋지게 완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완전한 신뢰가 필요한 거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지는 않더라도 하여간 그런거 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고 하지만 평천하의 마음을 품지 못하면 수신은 애초에 불능이다. 처음부터 지름길로 바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정상으로 바로 쳐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학습도 이와 마찬가지다. 알파벳을 모아 단어를 만들고, 단어를 외운 다음에 그것으로 문장을 조립하겠다면 넌센스다. 처음부터 짧은 문장으로 시작해야 한다. 완성형으로 바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원본을 완성하고 그 다음에 대량으로 복제하는 것이다. 복제는 뇌 안에서 자동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원본만 제대로 완성하면 학습은 저절로 된다.이를 위해서는 보조하는 바깥뇌의 존재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상황 자체가 지능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세력 안에 있고, 생태계 안에 있고, 공동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가 그림 안에 있고, 음이 피아노 안에 있고, 소설이 글자들 안에 있고, 영화가 필름 안에 있다고 착각하는 한 그 함께 이루어 가는 바깥뇌의 존재를깨달을 수 없다. 미는존재가 세상과 소통하는 열쇠이며, 그림은 소통의 단서일 뿐이다. 음은 세상의 공기 안에 있고 연주자는 그것을 끌어낼 뿐이며, 소설은대중의 마음 안에 있고 작가는 매개할 뿐이며, 영화는 관객의 무리지어 나아가는 문명의 방향성 안에 있고 감독은 그것을 포착하게 도울 뿐이다. 그러한 본질을 깨우쳐 알지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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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0-08-0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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