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프로이드의 잠재의식 개념이나 융의 무의식 개념 등은 그 모호성에서 불교의 공(空) 개념이나 무(無) 개념과 유사하다. 점차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된다. 현대 심리학이 길을 잃고 미로에 빠져들게 된 단초가 여기에 있다. 이드니 리비도니 하는 단어들은 불교의 무상이나 무아니 하는 수상한 단어들을 떠올리게 한다. 애초에 과학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 잘못된 용어 사용이다.
수학자가 숫자를 쓰지 않고 ‘1 2’를 ‘하나 더하기 둘’로 표기하며 애를 먹는 것과 같다. 수학자는 수를 써야하고 과학자는 과학의 언어를 써야 한다. 언어체계부터 정립되어야 한다. 현재로는 전혀 정립되어 있지 않다. 구조로 보면 명쾌하게 답이 나와준다. 구조는 과학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구조는 포지션으로 말한다. 수학자가 수를 쓰듯이 과학자는 구조어를 써야 한다.
학계에서는 ‘무의식 개념’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이냐를 두고 아직도 논쟁하고 있는 모양이다. 구조의 포지션으로 보면 정신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다. 생각, 감정의 하부구조는 분명하게 의식되고 정신, 의식의 상부구조는 잘 의식되지 않는다.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은 의식되지 않는 상부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의식되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이드니 리비도니 하며 모호한 단어로 포장할 일은 전혀 아니다. 인간은 수다쟁이가 말을 하면서도 자기 입에서 1초 후에 어떤 단어가 튀어나올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 말이란 한번 컨셉을 잡으면 단어와 단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말이란 컨셉만 잡아주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거지 ‘어떤 단어를 어떤 순서로 이어붙여야겠어’ 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마음도 컨셉을 잡으면 저절로 진행된다. 무의식이다. 항상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상황이 정해져 있다.
인간의 말이 거의 대부분 무의식에 지배되는 판인데, 정신이 제대로 의식될 리가 없다. 그러나 쉽게 알 수 있다. 정신은 시스템 원리가 작동하는 포지션 구조 안에서 유도된다. 포지션 구조가 문법을 대신하고 있다. 문법이라는 메커니즘에 컨셉을 태우면 저절로 말이 나와준다. 마찬가지로 조직의 발전, 생명의 진화, 시장의 경쟁 등 시스템 원리가 작동하는 포지션 구조 안에서 정신이 유도된다.
상대와 내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관계로 맞서있는지에 따라 정신의 포지션이 결정된다. 자신이 갑인지 을인지다. 주종관계인지 아니면 대등한 관계인지다.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났다면 보나마나 긴장해 있는 것이다. 가슴이 쿵쿵 뛰고 식은 땀이 나지 않아도 이미 긴장해 있다. 무의식이란 그러한 포지션을 보는 것이다. 물론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봤다면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 그 호랑이를 만난 장소가 산길이냐 아니냐 동물원이냐에 따라, 호랑이가 갑이 되고 자신이 을이 되는지 아니면 사람이 갑이 되고 호랑이가 을이 되는지가 정해진다.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상부구조로 바꾸면 사리가 분명해진다.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전개에서 앞선 단계가 무의식이다. 정신은 나와 대상이 만나는 방식이다. 내가 세상과 어떻게 만나는가다.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나는가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만나는가다. 이때 자신이 처한 환경 자체가 인간의 사유를 대체한다. 그것이 바깥뇌 개념이다. 집단지능은 이 원리로 작동한다.
잠재의식도 원리는 같다. 마음은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 순으로 전개되지만 인간의 행동은 99퍼센트 반복되는 일상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정신≫의식≫의도≫생각의 전개과정은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 처음 겪는 상황에서만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진행과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관습이 쌓여 점차 편견에 찌들고 타성적이고 보수적인 태도가 되면 처음 겪는 상황도 과거에 겪은 상황으로 오판한다. 관행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때는 인지부조화 현상이 일어난다. 처음 겪는 상황이므로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 순서로 마음을 작동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때 팩트를 왜곡하는 것이 인지부조화다.
고양이만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면 어떨까? ‘아냐. 저건 고양이가 틀림없어.’ 하고 자신이 눈으로 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이런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도 ‘아냐. 속임수가 있을 거야.’하고 믿지 않는다. 요즘 인터넷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처음 겪는 상황을 억지로 과거에 경험한 상황에 끼워맞춘다.
타블로 사건은 처음 겪는 예인데 ‘아냐 과거 신정아 사태와 똑같아.’하고 끼워맞추는 것이다. 왜? 그래야 집단의 행동통일이 쉽기 때문이다. 집단의 행동통일이 이루어져야 자신의 행동이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처음 겪는 새로운 상황이라는 점이 밝혀지면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을 새로 해야 하는데 그게 번거롭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의 효율성이라는 지엽적 합리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그만 전체적인 비합리성의 오류에 빠지고 만 것이다. 어떻든 이 방법으로 의사결정의 속도를 빠르게 했으므로 부분적으로는 합리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한다.
잠재의식이란 과거에 진행해 둔 마음의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 전개를 재활용하는 것이다. 프로이드가 유년시절을 트라우마를 강조하는 것은 사고능력이 떨어지는 유년시절의 경우 자아가 미성숙하여 본능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유아의 본능이란 무조건 어른을 개입시키게 유도하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맹수의 습격을 받으면 죽은체 하는 동물이 있다. 죽은체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절해 있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깨어나 도망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생존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위기에 처하면 이와 비슷한 짓을 한다. 일종의 자해행위를 하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원시의 생존본능이 작용한 일종의 자해행위일 경우가 많다. 원시의 정글에서는 그러한 자해가 부분적으로 생존확률을 높이기도 한다. 문명사회에서는 의미가 없다. 인지부조화 행동도 원시사회에서는 확실히 생존확률을 높이는 측면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잠재의식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인격이 미성숙하거나,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훈련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특히 문제로 되는 과거 경험의 재활용이다. 프로이드의 리비도 개념은 이러한 정신의 메커니즘을 모르니까 억지로 설정한 포지션이다. 정신작용이 일어나는 최초의 출발점이 있어야 하니까 아무 데나 깃발 꽂아놓고 리비도라고 명명하고, 근거가 궁하니까 억지로 성(性)과 연결시킨다.
정신작용의 최초 출발점은 나의 자아와 대상이 만나서 이루는 포지션 구조 그 자체다. 그것이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전개에서 첫 번째 정신이다. 그러한 포지션 구조가 얼마간 뇌의 역할을 대행한다. 상대와 나의 관계가 부자관계냐, 형제관계냐, 부부관계냐에 따라 나의 상대적인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며, 이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그것이 정신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세상과 나의 관계설정을 의식적으로 재정립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서구에는 깨달음 개념이 없으므로 리비도니 무의식이니 하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포지셔닝이 중요하다. 세상 앞에서 나를 갑으로 볼것이냐 을로 볼것이냐다. 독립된 주인의 관점으로 볼것이냐 아니면 종속된 노예의 관점으로 볼것이냐다. 아기 때는 당연히 종속된 관점으로 본다. 위기가 닥쳤을 때는 무조건 울음을 터뜨려 현장으로 어른을 불러들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유치한 짓을 한다는데 있다. 자아가 미성숙하면 그렇게 된다. 그것이 노예근성이다. 상대방의 행동을 보고 거기에 연동시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 말이다. 당연히 예속되고 만다. 한국은 후진국이어서 국가 자체가 전체적으로 잘못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동북아 중심국가로 일어설 생각을 못하고 미국이나 일본 혹은 서구에 빌붙으려는 태도 말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점차 의식이 퇴행하여 판단력이 떨어지고 머리가 나빠진다.
집단무의식은 바깥뇌의 작용에 따른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포지션 구조를 보고 직관하는 것이며, 그러한 포지션 구조는 집단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나누어 가질 때 잘 작동한다. 축구시합이라면 공격수와 수비수 간에 포지션이 나누어져 있다. 포메이션 구조 안에서 자신이 맡을 역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창의적인 경기를 할 수 있다. 축구지능이 높아지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포메이션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면? 축구 초창기에는 포메이션 개념이 없었다. 그때는 우르르 몰려다니며 모두가 공격하고 모두가 수비를 했다. 이때는 축구지능이 떨어진다. 그러자 펠레 혼자서 펄펄 날아다니게 되었다. 지금은 펠레가 나서도 협력수비로 잘 막아낸다. 포메이션 활용에 의해 축구지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늑대무리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정밀한 협력사냥을 한다. 한쪽에서 젊은 수컷이 공격하면 늙고 경험많은 두목 늑대는 반대로 돌아가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그것이 바깥뇌의 작동이다. 이심전심의 원리다. 이때 생각하지 않고 직관하기 때문에 집단 무의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포지션 구조 자체가 일종의 문법 역할을 한다는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뇌의 역할을 대행한다.
천칭 저울 위에 두 사람이 올라가 있다. 이쪽 저울에 오른 사람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저쪽 저울에 올라선 사람도 한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이것이 이심전심이다. 구조가 작동하는 원리에 따라 각자의 역할이 지정되는 것이다. 이때 말로 전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신의 역할을 알게 된다.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무의식이다. 혼자서는 그럴 일이 없으므로 집단무의식이다. 군중심리가 작동하는 현장에서 이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http://gujoron.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