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태어나고도 가장 늦게 이루어지게 된 학문이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많은 종교들이 다투어 천국행과 극락행을 표방하며 허풍을 떨고 있으나 이는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고, 종교의 실질적인 기능은 신도의 마음 다스림을 돕는데 있으니 종교의 탄생과 더불어 심리학의 관점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원시신앙 단계에서 주술사들이 부적이나 터부나 토템 따위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이 이미 넓은 의미에서 심리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수만년 전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가 그려졌을 때 이미 인류의 심리학적 시도는 출범한 것이다.

심리학이야말로 인문학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종교와 철학과 예술과 인문주의 사상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을 규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체계적인 접근의 시도가 있었고, 동양에서 말하는 도학이니 성학이니 심학이니 하는 것도 상당부분 심리학의 관점에 기울어 있다. 그러나 심리학은 21세기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학문적으로는 미완성이다. 학계의 경향이 구조주의, 기능주의, 행동주의, 형태주의, 정신분석, 실존주의 등으로 각개약진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학문적 체계가 뚜렷하게 정립되었다면 ‘무슨주의’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는 한의학의 미묘한 포지셔닝과 비슷하다. 서울대는 여전히 한의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외국에도 중국을 제외하고는 한의학을 인정하는 데가 없다시피 하다. 한의학이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고 있지만 인정될만한 학문적 체계는 없다. 한의학이 근거로 삼는 음양오행론이나 사상체질설, 경락설 따위는 옛사람의 허황된 상상 혹은 근거없는 희망에 불과한 것이다. 한의학이 학문으로 인정된다면 점장이의 부적이나 푸닥거리도 약간의 효험은 있으니 대학에 학과 개설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하면 논리의 비약일 터이다. 한의학은 학문과 비학문의 경계면에 불안정하게 걸쳐져 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심리학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경계면에 서 있다. 이렇게 낱낱이 따지고 들면 대부분의 인문학 분야가 학문과 비학문의 경계면에 불안정하게 끼어 이리저리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답답할 뿐이다. 구조로 보면 답이 나온다. 구조는 학문의 툴이다. 인문학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하는 체계의 문제를 구조가 해결한다.

심리학 역시 구조의 도움을 얻어 학문의 체계를 얻어야 한다. 심리학이 구조주의, 기능주의, 행동주의, 형태주의, 정신분석, 실존주의 등으로 흩어져서 장님 코끼리 더듬듯 하는 이유는 전체를 총괄할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조는 조직의 성장발달 원리를 제시한다. 마음은 수억년 전 원시생물의 반사가 진화한 것이다. 고무망치로 무릎을 때리면 다리가 움찔하는 무릎반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벌레를 핀셋으로 자극할 때 뇌가 없어도 신경이 살아있으면 자극에 반응한다. 그러한 자극은 외부에서 물리적으로 가해진다. 생물의 진화는 그러한 외부의 환경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과정이다.

눈으로 들어온 빛깔과 귀로 들어온 소리를 인간이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을 복제하여 뇌에 머무르게 하고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와서 내부에서 머무르게 하는 바로 그것이 마음이다. 구조원리에 따라 인간은 ‘감정≫생각≫의도≫의식≫정신’의 순으로 외부의 자원을 내부로 들여오는 수준을 상승시켜 왔다. 말단의 감정은 하등동물의 반사와 같이 자극에 대한 직접반응이며, 생각은 언어를 통하여 외부의 자극을 내부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고, 의도, 의식, 정신으로 상승하며 점차 내면화의 수준을 높여온 것이다. 외부환경을 더 깊숙이 자기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여기에 방향성이 있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마음은 구조원리에 따라 외부환경을 내부에서 처리하여 다시 외부로 발산한다. 그 일의 진행하는 순서에 따라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일방향성을 가진다. 여기서 내면화 된 정도가 낮으며 가장 바깥에 있는 정신이 가장 먼저 시작된다는 점이 각별하다. 마음은 반드시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왔다가 다시 외부로 배출되는 패턴을 가진다. 여기서 외부환경에는 자신의 신체도 포함된다. 육체 역시 외부환경을 내면화 하는 생장구조원리에 의해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체의 일부가 질병에 걸려 아프다면 자기 내부에서 오는 신호이지만 뇌가 받아들이는 것은 바깥에서 전해지는 소리나 냄새, 촉각, 시각적 자극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마음이 외부환경을 처리하는 순서는 자동차가 외부에 있는 연료탱크를 내부의 엔진으로 들여왔다가 다시 외부인 지표와 접촉하는 바퀴로 에너지를 출력하는 것과 같다. 자동차는 바퀴가 진화한 것이다. 바퀴에 기어와 엔진과 구동모터와 연료탱크가 차례로 붙어서 자동차가 되었다. 그 역순으로 에너지는 진행한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에너지 처리과정을 인간이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오는 감정은 확실하게 인식된다. 그것은 물리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감정반응은 호르몬을 분비하여 무릎반사처럼 물리적으로 자극한다. 그러나 한 차원 위의 생각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것이며, 언어를 사용할 때만 분명하게 자각된다. 모든 생각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므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언어가 없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포지셔닝 원리에 따라 상대의 포지션 선점에 대응하는 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의 절반을 상대방이 지배하고 있어서 자기 생각을 자기가 모른다. 무수한 반복을 겪어야 그나마 약간 알게 된다. 인간 역시 무지하기로는 동물과 큰 차이 없다. 언어의 사용과 반복적 훈련에 의해 자기 생각을 겨우 알 뿐, 대부분의 행동이 상대방과 자신의 관계가 적이냐 동료냐에 따라 대응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거의 어떤 분위기나 기세에 휩쓸려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의도는 교양있는 사람이 깊이 사색하고 학습하여 아는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모른다. 상대방이 공격하면 방어하는 식이어서 상대가 먼저 자극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의 의도를 결정하지 못한다. 의식은 소수의 지성인이나 아는 것이며,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정신과 의식과 의도와 생각을 모르며 심지어 감정조차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다. ‘홀린다’는 말이 있다. 분위기에 홀리기도 하고 말솜씨에 홀리기도 한다. 그럴 때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이 연인을 사랑하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것이 무의식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훈련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무의식을 의식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이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 순으로 전개하는 과정을 확연히 아는 것이다. 무의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이유, 곧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정신이 근본 외부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포지셔닝 형태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느냐다. 그 처한 상황을 아는 것이 정신이다. 그것이 정신차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이며,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내가 전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태어나보니 이미 내가 존재하고 있었고, 살다보니 내가 일성성 속에 안주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각성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뒤늦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주변과의 관계맺기에 따른 상대적인 포지셔닝 형태로 진행된다. 집안에는 가족이 있어서 그 내부에 질서가 있다.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 있다. 직장에서도 자기 위치가 정해져 있다. 그러한 포지션 구조가 자기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고민하지 않게 된다. 어떤 흐름에 끌려가는 것이다. 집단이 가는 흐름에 휩쓸려 가면서 그 집단 중에 누구도 그 집단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될 때 비극이 일어난다. 북극의 레밍처럼 일제히 무리지어 잘못된 곳으로 질주하면서 깨닫지 못했던 2차대전의 광기와 같다.

가족을 잃어 상실하거나, 혹은 이혼을 당하거나, 혹은 실직을 당하거나, 질병을 앓는 등의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을 받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자 하지만 이미 익숙해 있는 포지션을 바꾸어 주변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것은 커다란 부담으로 된다. 그러므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관계를 의식적으로 재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정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그 정신은 환경과의 관계맺기에서 포지셔닝 형태로 일어나며, 그 구조 안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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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리비도설은 황당한 소설에 지나지 않지만 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것이 구조원리상 제 1번 포지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제 1원인처럼 연역논리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문제이든 출발점만 찾으면 거의 반은 성사된 셈이다. 프로이트는 확실히 잘못된 출발을 했지만 구조원리상 반드시 하나의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바로 지적한 바는 평가할만 하다.

소설은 가짜라도 등장인물의 포지션 설정은 유의미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열역학을 공부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새로 대두된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구조적 사고를 한 것이다. 열역학은 복잡계를 단순화 하는 극한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진화론은 조직의 발달원리를 규명한다는 점에서 단계적 진화를 풀어내는 구조론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리비도는 성적 에너지다. 성이라는 것은 생뚱맞은 거고 문제는 에너지다. 에너지는 사건이 제 1 원인이다. 구조는 에너지가 가는 길이다. 에너지로부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훌륭한 접근이다. 문제는 그 에너지를 욕망이라고 서둘러 주장한 데 있다. 과연 그럴까? 욕망은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전개 중에서 욕망은 맨 나중에 오는 감정에 속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의 원인측이 될 수 없다. 예컨대 배가 고프다면 그 자체는 욕망이 아니다. 그냥 배가 고픈 거다. 배가 고픈 것이나, 하늘이 흐린 것이나, 소리가 시끄러운 것이나 정확히 같다. 배가 고픈 자극을 해석하여 밥을 먹고 싶다고 의도하는 이것이 욕망이다. 여기에는 이차적인 해석이 가해진 것이다. 하늘이 흐리기 때문에 우울해서 그림이 예쁜 영화를 보고 싶다거나, 소리가 시끄러워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싶다거나 하는 것이나 같다. 배가 고픈 것은 내부의 자극이고 소리가 시끄러운 것과 하늘이 흐린 것은 외부의 자극이지만 이는 인간의 의식적인 판단이고 뇌의 관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모두 외부자극이다. 뇌는 인간의 신체 바깥까지 자기의 일부로 인식하기 때문에 모두 내부자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학자들은 눈의 망막까지 뇌로 보지만 구조원리에 따라 작용반작용의 범위 전체를 뇌로 보아야 한다. 그 경우 인간의 시선이 닿는 부분이 전부 뇌의 범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외부자극과 내부자극의 구분은 의미없다. 생물의 진화가 외부환경을 내면화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성욕이 그러하다. 만약 성욕이 제 1원인이라면 어머니에게도 성욕을 느껴야 한다. 프로이트는 논리가 궁한 나머지 자기는 4살 때 어머니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욕정을 느꼈다고 둘러댔지만 이는 뻘소리에 불과하다. 실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의미는 없다. 인간이 어머니를 보고 욕정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단계를 거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몽골유학생 여성은 몽골 고원의 비좁은 겔 안에서 그러하듯이 한국학생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서 남학생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고 전한다. 여인의 나체에서 곧 성욕으로 바로 넘어가는 것이 이상하다. 아프리카의 나체족이라면 전혀 그런 일이 없다. MBC 다큐 아마존의 눈물에 등장하는 조에족은 늘 누드로 살지만 바로 성욕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욕망이란 다분히 후천적인 학습의 결과이며 무수한 사건의 경험이 쌓여서 의식적으로 연출된 것이다. 에너지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더라도 ‘정주영은 어린시절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부자가 되어야지 하고 결의했다’고 써야지 ‘정주영은 원래 재물욕이 있었다. 그래서 돈을 벌고자 했다’고 쓰면 안 된다. 그것은 설득력없는 잘못된 전개이다. 변학도는 원래 욕심이 지나친 나쁜놈이라는 식으로 쓰면 안 된다. 원래 그렇다면 무죄다. 원래 인간이 그렇게 태어났다면 나쁜 것이 아니다. 이는 정신병자가 범죄를 저질러도 시설에 격리될 뿐 처벌받지 않는 것과 같다. 변학도는 교양이 없어서 잘못된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 오류를 깨우쳐주기 위하여 징벌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신은 자신의 상태와 환경간의 충돌에 따른 모순구조이다. 그러한 모순의 크기만큼 에너지의 낙차가 발생하며 학습하기에 따라서 그것이 욕망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맞닥들인 환경이 배고픔이고 자신의 상태가 굶주림이라면 그만큼 식욕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는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전개에 따른 의식적인 학습의 결과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무수하게 경험한 것이 축적된 것이다.

욕망의 오류는 숫자가 너무 많다는 데 있다. 구조원리로 보면 제 1원인은 항상 하나여야 하며 둘이면 이미 제 1원인이 될 수 없다. 즉 첫 번째 포지션을 차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성 환원주의를 주장하며 모든 욕망을 성욕 하나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는 억지에 불과하다. 욕망이 어디 성욕 뿐이겠는가? 손이 시린 것도, 발이 아픈 것도 편안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욕망의 종류는 인간이 접촉하는 대상의 숫자만큼 많다. 그러므로 욕망은 논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연역적 전개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없다. 욕망은 2차적인 결과일 뿐이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여파가 미칠 때만 욕망이 연쇄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며 하나의 사건 안에서는 욕망이 사건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배가 고프다거나, 손이 시리다거나, 오줌이 마렵다거나, 똥이 마렵다거나, 섹스가 마렵다거나 정확히 같다.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러한 환경과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상태의 모순을 읽는 것이 정신이다. 정신은 대칭원리에 따른 포지션구조를 파악한다. 숲에서 호랑이를 만났다면 호랑이가 갑이 되고 자신은 을이 된다. 이때는 도주해야 한다.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도주하는 것이 아니고, 호랑이가 상황을 장악하여 갑이 되었기 때문에 을인 자신이 도주하는 것이다. 자신이 상황을 결정지을 수 있느냐가 정신이다. 호랑이를 만나고서야 살고싶은 욕망이 있게 되는 전혀 아니다. 살고싶은 것은 항상 그러하다. 그러나 호랑이를 만나고서야 인간은 살고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이건 논리적으로 안 맞는 거다.

인간은 환경을 장악하고 지배하려 하며 지배하지 못할 때 포지션 구조를 깨닫게 되며 그것이 정신이다. 정신차리는 것이다. 정신차린다는 것은 환경 앞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 환경에는 외부상황 뿐 아니라 자기의 내부상황도 포함된다. 잠이 덜 깼다거나 혹은 술에 취했다거나 혹은 눈꼽이 끼어 앞이 안보인다거나 하는 상황을 포착하고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전개에서 정신은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포함한 일체의 환경 앞에서 그 충돌지점과 모순을 발견하고 그 모순을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며 욕망은 그러한 상황이 반복되어 훈련된 것이다. 성욕이란 결국 성적인 환경 안에서 집중력을 잃고 불편해진 모순 상태에서 그 모순과 충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의도이며, 여기에는 분명히 정신과 의식과 의도로 마음이 전개된 것이다. 남성은 수면 중에 발기를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신체현상일 뿐 욕망이 아니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 발기된 상태를 어딘가에 써먹으려고 의도하면 비로소 욕망이 되는 것이며 이는 마음이 전개된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사건의 출발점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그러한 사건이 반복되기 때문에 당연시되어 욕망으로 세워서 사건의 동기로 삼으려고 한다면 좋지 않은 거다. 욕망은 사건의 제 1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필요한 만큼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거다.

스포츠에 비유하면 프로야구는 정신이고 팀은 의식이고 승부는 의도이고 시합은 생각이고 선수는 감정이다. 선수가 모여서 야구를 하지만 선수가 곧 야구는 아니다. 선수와 야구를 동일시 한다면 착각이다. 욕망이 모여서 정신을 이루지만 여럿이 모였기 때문에 제 1 원인은 아니다. 욕망은 환경과 자아의 반복적인 충돌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동기부여의 에너지가 반복적으로 학습된 것이다.

리비도설은 소설이지만 프로이트는 중요한 점을 시사했다. 마음의 제 1원인이 무엇인가이다. 연역적 논리전개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성욕이 아니라 환경과의 관계맺기다. 환경과의 대칭구조에서 내가 갑이 되느냐 을이 되느냐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정신이다. 불구덩이에 빠졌다면 환경이 갑이다. 물에 빠져있다면 역시 나의 자아가 을이 된 것이다. 자신이 갑이 되어야 한다. 결국 정신은 자신이 물에 빠져 있는지 혹은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는지를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을 못 알아채고 있는 것이 정신이 나간 것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망은 그 지점에서 주로 인간이 환경에 대해 비교우위가 되지 못한다는 거다. 물론 훈련하여 욕망을 극복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욕망은 극복될 수 있으므로 제 1 원인이 아니다. 불구덩이에 빠졌다면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이 제 1 원인이다.

욕망은 무수히 많지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한 바 잘못된 태도이며 근본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 이 다섯 뿐이다. 존엄은 말 그대로 환경에 대해 자신이 갑이 되는 것이다.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지배자의 위치에 서서 자신의 모든 외부환경과 내부환경을 통제하는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가난 질병 무지 범죄 고립을 타개하는 것이며 내부적으로는 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유는 자신의 바운더리를 넓혀가는 것이다. 즉 환경과의 모순에 따른 충돌이 일어날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다. 배가 고프다면 일단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못하면 배고픔을 해소할 수 없다. 섹스가 마렵다면 역시 움직여야 한다. 움직일 수 있는 바운더리를 확보해야 한다. 권력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운신할 수 있는 범위의 크기만큼 문제해결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배고픔을 해소할 확률이 올라가는 것이 자유이다.

존엄은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며, 자유는 배고픔에 대항할 수 있는 포지션의 우위에 서는 것이다. 사랑은 구체적인 대응수단을 가지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가져야 한다. 성취는 그 밥을 먹는 것이고, 행복은 그에 따른 포만감을 느끼는 것이다. 존엄은 첫째 배가 고프지 않는 것이고, 자유는 둘째 밥을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며, 사랑은 셋째 밥을 얻는 것이고, 성취는 넷째 밥을 먹는 것이고, 행복은 다섯째 포만감을 느끼는 것이며 이 모두는 하나의 사건에 따른 연속적인 과정이다. 이 전체과정이 모두 욕망이다. 결국 인간은 존엄욕, 자유욕, 사랑욕, 성취욕, 행복욕을 가질 뿐이며 그 외의 성욕이나 식욕, 명예욕, 안전에 대한 욕구, 기타 등등 무수한 욕구들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열거한 것으로 의미없다. 입체적인 모형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존엄 안에 자유가, 자유 안에 사랑이, 사랑 안에 성취가, 성취 안에 행복이 포함되어야 한다. 따로 존재한다면 가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욕망은 오직 존엄 하나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이를 환경 앞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낸 것이다. 존엄은 환경과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이 포지션의 우위에 서는 것이다.

마음은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일방향적 전개를 가진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이 다음 사건을 촉발한다. 이때 감정이 맨 나중에 오므로 인간은 마지막에 오는 감정에 주목하고 거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욕망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전개는 인식론의 순서를 따르므로 존재론의 순서와 반대로 진행된다. 행복≫성취≫사랑≫자유≫존엄의 순서가 된다. 성욕, 식욕, 명예욕, 안전에 대한 욕구, 건강에 대한 욕구 따위 인간이 지어낸 모든 욕망은 굳이 분류하면 행복에 포함된다. 인간은 행복하고자 하며 실패한 다음에 성취를, 성취하고자 하여 실패한 다음에 사랑을, 사랑하고자 하여 실패한 다음에 자유를, 자유하고자 하여 실패한 다음에 존엄을 깨닫게 되지만 이 순서는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전개순서와 맞지 않는 잘못된 것이기에 시행착오를 일으킨다. 이를 뒤집어 존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자신을 존중할 때 모든 마음의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므로 석가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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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0-10-1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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