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읽기
마음은 일을 한다. 마음이 하는 일을 알면 마음을 바로 다스릴 수 있다. 마음이 하는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일은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인간의 다른 여러 가지 일들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다섯 단계가 있다.
◎ 현장도착≫도구장악≫방향설정≫시간진행≫성과획득
농부가 밭을 갈더라도 먼저 ‘정신’이라는 들판에 가서, ‘의식’이라는 트랙터에 올라타고, ‘의도’라는 공간적 작업방향을 정하고, ‘생각’이라는 시간적 밭갈이를 진행하고, ‘감정’이라는 수익을 획득하는 다섯 단계가 있다.
마음을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첫 번째 정신은 자동차의 운전자와 같다. 먼저 정신차려야 한다. 그것은 바른 운전자를 태우는 것이다. 엉뚱한 사람을 운전석에 태웠다가는 사고가 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운전자가 외부에서 온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마음의 문제는 외부의 환경에서 비롯된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외부에서 전해지는 소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마음은 본래 원생동물이 외부의 자극을 처리하는 데서부터 진화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부로 나가야 한다. 나가서 더 높은 세계와 만나야 한다. 소극적으로 제 자리에 머무르며 마음 안에서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서는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다. 원인은 항상 외부에 있다.
마음이라는 자동차가 달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른 운전자가 탑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태울 마음을 태워야 한다. 더 높은 운전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더 높은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두 번째 의식은 운전자가 자동차의 각 부분을 장악하여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식이 없다면 어떨까? 자의식이 없고, 역사의식이 없고, 시민의식이 없다면, 도무지 의식화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자동차는 브레이크가 없고, 엑셀레이터가 없고, 클러치가 없고, 트랜스미션이 없고, 핸들이 없는 자동차와 같아서 통제할 수 없다. 운전자가 자동차를 장악할 수 없게 된다.
자동차의 여러 부품들이 잘 결합되어 있어야 하며 모든 부품이 중앙의 통제를 받을 수 있도록 일렬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브레이크≫클러치≫트랜스미션≫엑셀레이터≫핸들의 조작순서는 지켜져야 한다. 의식은 마음의 내부를 하나의 컨셉에 맞추어 정렬시키는 것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더라도 한 순간에는 하나의 조작을 해야 한다.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를 동시에 밟을 수는 없다. 클러치를 밟지 않은 채 트랜스미션을 조작할 수는 없다. 의식은 생각과 감정의 하부구조를 정신과 의식의 상부구조에 종속시켜 매 순간 뇌에서 하나의 명령이 내려가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상하는 이유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명령이 동시에 내려오기 때문이다. ‘당구 한게임 치고 싶다’는 명령과 ‘오늘 내로 일을 해치워야 한다’는 명령이 동시에 내려오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의식화 하는 방법으로 일의 우선순위를 판단함으로써 마음의 정렬시켜 마음의 갈등을 풀 수 있다. 의식화 한다는 것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지 판단하여 두는 것이다. 의식을 가질 때 마음은 바닥짐을 실은 범선처럼 안정을 얻어 큰 바다를 누빌 수 있다.
세 번째 의도는 그 자동차가 가다가 도중에 만나게 되는 갈림길이다. 어느 길로 갈 것인지 본인이 선택을 해야 하며, 한번 선택을 한 다음에는 일관되게 그 길을 가야 하고, 만약 오류가 발견되면 재빨리 유턴을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오류를 알면서도 의도를 바꾸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생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더불어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보며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다가 잘못된 길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흔히 ‘속 보인다’고 말한다.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남의 속은 잘 들여다 보면서도 정작 자신의 속은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자신의 의도를 훤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직관에 의해 방향을 선택한다. 사회적인 균형감각에 따른 방향감각이 있는 것이다.
의도는 공동체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포지션 형태로 성립하기 때문에 직관적인 감각으로 작동한다. 다 그러한 것은 아니고 무지한 보통사람이 그러하다.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도를 자각해야 한다.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에 따른 판단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눈치를 보다가 동료의 선택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길을 선택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방향감각이다.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이라면 그러한 방향감각으로 충분하지만 인간이라면 그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이 적대하는 사람이 왼쪽을 선택하면 자신은 반사적으로 오른쪽을 선택하고, 자신이 추종하는 사람이 이쪽을 선택하면 자신도 이쪽을 선택한다. 늑대는 이 방법으로 훌륭하게 사슴을 몰이하지만 인간이 이 수준에 머무른다면 곤란하다. 이 경우 자신이 독립적으로 판단한 진정한 길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를 바꾸지 못하게 된다.
대부분 공동체 안에서의 직관적인 균형감각, 방향감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사회관계 안에서 누가 주(主)고 누가 종(從)이며, 또 누구와 적대적이고, 누구와 친한지를 보면, 그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속이 다 보인다.
의식화 해야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고, 그럴 때 잘못된 자신의 의도를 바꿀 수 있다. 그럴 때 마음은 다스려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료와의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빠져나와 정신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그것이 의식이다.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않고 타인에게 의존하여 판단한다면 어리광이다.
자기 인생의 전략을 가져야 한다. 삶의 컨셉을 얻어야 한다. 타이틀 있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의식이다. 이 길을 왜 가는지, 지금 어디로 가는지, 현재 어디쯤 와 있는지 알고 있어야 내일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의도는 분명하게 정립된 의식 안에서 잘 작동한다.
네 번째 생각은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역시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생각이 바뀌어야 감정이 바뀌며, 감정이 바뀌어야 행복해진다. 대부분의 생각은 짧은 순간에 직관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순간에도 뇌는 판단하고 있다.
권투선수가 일초 안에 몇 번의 주먹을 내밀지만, 그 순간순간에도 뇌는 분명하게 판단하고 있다. 상대의 주먹을 피하고 나의 주먹을 휘두르며 근육에다 수백가지의 명령을 내려보낸다. 학계에서는 ‘자동적 사고’라 해서 무의식 상태에서 생각이 진행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생각을 읽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를 모르듯이,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생각을 읽지 못한다. 빠르게 말하는 아나운서는 일초의 짧은 시간에 수십단어를 쏟아부을 수 있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뇌는 지켜보고 있다. 뇌는 분명히 생각하고 있다.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과거에 생각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작동할 때는 과거의 생각을 재활용하면서 YES와 NO만 판정하기 때문에 생각은 순간적으로 스쳐가고 자신이 잘 의식하지 못한다.
생각이 잘못되면 순간적으로 어색함이 스쳐지나간다. 그것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축구선수가 빠르게 공을 패스하듯이 포지션들 사이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쳐가는 관절부분이 있고 그 지점에서 어색함을 포착할 수 있다.
놀부는 흥부 얼굴만 봐도 괜히 괘씸하고, 때려주고 싶고, 골탕먹이고 싶다. 심술이 나오는 것이다. 자동적 사고에 의해 그냥 그런 느낌이 드는 것처럼 보인다. 천만에! 여기에는 자신이 갑이고 흥부는 을이며, 상대방을 나에게 종속시켜 다루기 쉽도록 조치를 해놓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분명히 포지션을 읽은 것이다.
문제는 놀부 자신이 그러한 자신의 의도를 모른다는 점이다. 놀부가 흥부를 괴롭히는 이유는 그러한 행동이 자연스럽고, 떳떳하고, 마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흥부를 제압하여 자기 밑으로 종속시켜 둘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에 놀부의 뇌는 계산할 것 다 계산한 것이다. 통박을 굴린 것이며 이해타산을 따진 것이다. 그래도 손해 안 본다는 자신감이 바닥에 깔려 있다.
어린 시절 필자는 동생의 행동이 영 신경이 쓰였다. 동생이 뭔가 잘못하고 있으며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동생의 얼굴만 봐도 ‘또 뭔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는군.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통이 난 것이다. 수시로 주먹다짐을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느 순간에 그것을 깨닫고 이후로 한 번도 개입하지 않았다. 의도를 바꾸어야 생각이 바뀐다. 의도는 자신이 포지션의 우위에 서려고 하는 것이다. 상대방과 나 사이에 깔려 있는 밑바닥의 긴장 자체를 원초적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섯 째 감정은 마음이 이러한 일처리 과정을 거쳐 그 결과물로 행동을 촉발하게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이다. 호르몬의 작용으로 호흡이 빨라지고 근육이 경직되며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스트레스 상황이다.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욕망하여 다른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나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감정의 처리는 그 연쇄적인 파급을 차단하는 것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행동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화가 났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잘 타일러서 그만두게 하려고 하다가 상대방이 어깃장을 놓으면 한 대를 쥐어박게 되고, 그때부터는 이성을 잃고 폭력으로 치닫게 된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 폭력을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 상대방을 혼내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의 폭력에너지를 쏟아붓기 위하여 폭력을 쓰게 되며, 자기 기력이 완전히 소진될 때 까지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폭력중독이다.
처음에는 사건이 감정을 끌어내지만 다음에는 감정이 감정을 끌어내게 된다. 감정은 에너지를 쏟아부어 행동을 촉발하려는 것이다. 이미 에너지가 작동했기 때문에 액션 자체가 목적이 된다. 즉 그 지점에서 애초에 원인이 되었던 사건은 끝나버리고 에너지의 작동이라는 다른 사건으로 불똥이 옮겨 간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별개의 사건임을 인식해야 멈출 수 있다.
감정의 에너지 분출은 다른 사건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된다. 그것이 욕망이다. 이 경우 같은 사건이 단순히 반복되게 된다. 같은 사건의 반복은 의미없으므로 배척해야 한다. 감정단계에서 하나의 사건이 완결되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새로운 사건은 감정의 에너지 찌꺼기인 욕망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환경변화에 의해 일어나야 한다.
다시 정신의 포지션으로 돌아가야 한다. 욕망에 휩쓸리지 말고 정신차려야 하는 것이다. 욕망에 따른 행동은 게임중독, 도박중독처럼 의미없이 반복되는 것이며 이는 마음의 일처리 실패일 뿐이다.
◎ 정신 - 상황타개를 위해 상대방을 주먹으로 치라고 지시한다. ◎ 욕망 - 한 대만 때려도 되는데 공연히 열 대를 때리고 더 때리려 한다.
마음의 작동원리로 보면 열대를 때리든 백대를 때리든 같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사건의 원인이 아니고 분량조절일 뿐이다. 욕망은 내부로부터의 소식이며, 사건의 진짜 원인은 반드시 외부에 있고, 외부의 환경변화를 포착하여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이 사건의 진짜 원인이다.
정신없이, 의식없이, 의도없이, 생각없이, 욕망에 따라 하는 행동은 같은 행동의 무의미한 반복이며 이는 단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뇌의 호르몬 조절 실패에 불과하다. 호르몬은 한분 분출되면 그 뿐 도무지 회수가 안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뇌기능의 에러다. 욕망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마음에 감정이 나타나면 ‘나로 하여금 행동을 촉발하게 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구나’ 하고 간파하여 감정이 자신의 몸을 충분히 덥혀서 과감하게 액션을 취할 수 있게 된 단계에서 ‘이 정도 몸을 달구었으면 충분해. 여기까지!’ 하고 스톱시켜야 한다. 이는 연습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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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0-10-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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