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에 물이 담겨있다. 그릇의 물을 비우는 것이 무(無)다. 그러나 물을 비우는 일에 집착한다면 그 또한 곤란하다. 물을 비우려는 마음조차 비워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이 발견된다. 동양철학에서 강조하는 공(空)과 무(無)와 허(虛)는 그릇에 담겨있는 내용물을 비우는 것이다. 다 비우고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을 발견하는 것이 진짜다.
감정은 생각이라는 그릇에 담겨지고, 생각은 의도라는 그릇에 담겨지고, 의도는 의식이라는 그릇에 담겨지고, 의식은 정신이라는 그릇에 담겨진다. 그릇의 내용물을 모두 비워야 그릇들을 포갤 수 있다. 중간에서 개입하는 브로커를 배제하고 직결로 만나게 하는 것이다. 그릇들을 전부 포개서 직결로 연결시켰을 때 한 번 개입하여 한꺼번에 모두 옮길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하다. 그릇이 서로 포개어져 구조의 tree를 이루고 점차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보의 흐름에 올려태우는 것이다. ‘나’라는 씨앗이 마음이라는 밭에 뿌리를 내리고 환경이라는 햇볕을 얻어 자라난다. 정신의 뿌리에서, 의식의 줄기와, 의도의 가지와, 생각의 잎이 자라면, 감정의 꽃이 된다.
배가 속도를 낼 때는 파도가 무섭지 않다. 마음의 나무가 성장할 때는 병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고 정신의 성장이 멈출 때부터 병리는 시작된다. 개인은 성장을 멈추어도 우주는 성장한다. 공동체는 성장한다. 인류는 진보한다. 그 진보의 흐름에 반응하여 내 마음도 우일신 할 때 마음은 평안해진다.
모든 사건의 원인은 욕망이 아니라 정신이다.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릇이 깨진 것이 문제다. 욕망은 같은 사건이 2회 이상 허무하게 반복된다는 의미이며 이는 실패다. 그릇에서 물이 새기 때문에 같은 짓을 계속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물이 새지 않는 그릇이 있다면 욕망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서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이 여럿이고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 문제다. 욕망을 포개서 하나로 줄여야 한다. 하나로 줄이면 그것이 존엄이다. 욕망을 존엄 하나로 줄였을 때 깨지지 않는 그릇은 얻어진다. 그럴 때 마음은 다스려진다.
###호랑이에 물려가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보통이다. 환경과의 정직한 대면을 거부하고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두 눈을 질끈 감고 호랑이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인지부조화다. ‘난 지금 고양이와 함께 산책하는 거야. 설마 내가 호랑이에 물려가기야 하겠나?’하고 편하게 생각해 버린다.
인간은 문제를 보고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답에 맞추어 문제의 심각성을 규정한다.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호랑이라고 말하고, 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늑대라고 말하고, 맨주먹 뿐인 사람은 도둑고양이라고 말한다. 정신차려야 한다.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가 노력하고 성취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인류문명의 진보라는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본의 전 지구적인 팽창이라는 호랑이에 물려가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시장이 권력화 되어 정치를 위협하고 있는 현실이 호랑이에 물린 것이다.
http://gujoron.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