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란 무엇인가? 구조론의 방법인 극한의 법칙을 적용하여 보면 본질이 드러난다. 극단적인 상태를 상정하여 보는 것이다. 공동체가 처한 가장 극단적인 상태는 무엇인가? 전쟁이다.

  전쟁만큼 나쁜 것은 없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영웅이라는 자들은 모두 전쟁을 해서 이름을 얻었다. 근대 이후 열강들은 전쟁을 통해 입지를 다졌다. 거의 전쟁을 많이 한 순서대로 강국이 되어 있는 편이다.






  전쟁 자체는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공동체의 진보이며 역사이래 공동체의 발달은 전쟁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전쟁이 곧 진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지구촌 한 구석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진보는 전쟁을 통해 전면화 되곤 했다.






  지금은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전쟁 없이도 진보는 전파된다. 그러나 국경으로 막히고, 종교로 막히고, 관습으로 막혔던 봉건시대에는 전쟁만이 장벽을 허무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때가 많았다. 물론 종교의 전파나 무역도 일정한 소통의 기능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무역 또한 총칼을 앞세우는 때가 많았다.






  구조로 보아야 한다. 감상을 버리고 쿨하게 가자는 거다.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이다. 그러나 공동체 개념은 추상적이다. 가족의 의미는 누구나 알지만 부족으로, 국가로, 문명권으로 확대되면 공동체의 의미가 모호해진다.






  아프리카 축구선수들은 부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패스를 하지 않는 수가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팀들이 월드컵에서 고전하는 이유가 부족주의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이런 미묘한 부분은 잘 관측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역이다, 성별이다, 학력이다, 연고다 해서 온갖 차별의 장벽을 높이고 갈가리 찢어져 서로 격리되어 있다. 소통은 막혀 있다. 그러나 어디에 어떻게 막혔는지는 애매하다.






  MBC 다큐 아프리카의 눈물은 오지에 사는 부족민들이 자기네가 어느 나라에 속하여 있는지도 모르면서 태평스럽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류는 공동체적 존재이지만 공동체의 의미는 불명하다.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왜 사는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삶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나는 누구인지'의 물음에 대한 답이 공동체의 진보에서 찾아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인간은 언제라도 공동체의 중심 깊숙히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자기의 소속한 공동체를 모른다. 삶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왜 사는지 모른다. 나는 누구인지 모른다. 자기의 삶이 가고 있는 방향을 모른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혹은 전쟁에 준하는 큰 충격을 받으면 인간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공동체의 의미를 찾게 된다. 형편이 어렵게 되면 가족을 그리게 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전쟁이 터져야 차별이 없어지는 경향이 있어왔다. 더 큰 갈등이 일어나야 작은 갈등을 넘어서는 것이다. 역사이래 늘 그래왔다.






  링컨이 실은 흑인의 자유를 위해 남북전쟁을 결단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남북전쟁에 승리하기 위하여 노예해방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정신을 차리고 공동체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가 찾아야 할 정답은 언제라도 공동체의 진보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다. 인간은 상당부분 전쟁을 통해 국경을 헐고, 장벽을 헐고, 소통을 일으켜 공동체를 진보시켰다. 그렇다. 전쟁은 나쁘지만, 어떻게든 장벽을 헐고, 국경을 헐고 소통을 해야 한다. 소통해야 할때 소통하지 못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구한말 조선이 서구와 소통하지 않아 결국 일본에 침략을 당했듯이 말이다.






  전쟁이 어떻게 공동체에 긴장을 조성하여 정신을 차리게 하는 방법으로 인류를 소통시켰는지 알면, 전쟁을 하지 않고도 소통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이 거기에 있다. 전쟁의 비밀을 통해 전쟁을 넘어서자는 거다.






  고인 물은 썩는다. 막힌 둑은 터진다. 생산력의 힘, 창의력의 힘으로 건설적인 소통을 못하면 인류의 공동체는 고인물이 되어 썩는다. 한편 생산력이 진보했는데도 온갖 차별의 장벽을 세워 인위적으로 소통을 차단하면 그 둑은 터진다. 바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서로는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생산력으로 소통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썩는다.



  ● 생산력, 창의력의 진보를 공동체에 반영하지 못하면 전쟁이 터진다.






  인류는 물적 생산력과 지적 창의력으로 소통해 왔다. 물적 생산력은 산업으로 소통하고 지적 창의력은 문화로 소통한다. 생산력이 죽고 창의력이 죽으면 소통이 막혀 인류는 밑바닥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반면 생산력이 증가하고 창의력이 혁신되었는데도 널리 소통하여 이를 전면화 하지 못하면 역시 전쟁이라는 비극이 일어난다. 양차세계대전은 인류의 생산력 증대, 창의력 증대를 소통능력이 따라가지 못한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물론 전쟁이 아니고도 변혁은 가능하다. 혁명도 있고, 정변도 있고, 민주적인 선거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과거사 청산이 안 되는 점도 있다. 독일과 싸워 전쟁을 한 프랑스는 나치를 청산했는데, 일본과 전쟁을 못한 한국은 친일청산이 안 되고 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역적들에게 발목이 잡혀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점을 냉철히 따져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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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 년 전의 일이다. 진보 사이트에서 논쟁한 일이 있는데 계급의 철폐와 여성의 지위 향상은 상당부분 전쟁이라는 형식을 거치며 일어났다'고 썼더니 페미니스트들이 일제히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거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전쟁은 흉악한 마초남자들이 만들었고, 여성은 평화지향적이라는 거다. 전쟁은 여성들에게 재난일 뿐이라는 것이다.






  쿨해져야 한다. 감상은 버려야 한다. 피상적으로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다면 오히려 편견이다. 페미니스트 여성이 오히려 여성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남자=전쟁, 여자=평화의 이분법이라면 오히려 여성차별적인 편견이다. 이것이 반드시 여성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다.






  물론 전쟁의 책임은 남자에게 있다. 그러나 구조로 보면 달라진다. 주도권 개념으로 보면 여자든 남자든 역할을 늘리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무조건 유리하다. 즉 더 큰 책임을 가지는 쪽이 유리한 것이다. 남자의 책임이 클수록 남자에게 유리해진다. 모두 남자에게 책임을 넘긴다면 도리어 여성의 입지는 축소되고 만다. 남자 대 여자라는 관점을 폐기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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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에 의해 일정부분 계급제도가 해체되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것은 명백하다. 전쟁을 많이 했던 스파르타에는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아마존의 여전사 이야기를 상기할 수도 있다. 몽골에서는 특히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 징기스칸이 친구이자 숙적이었던 자무카와 싸울때 징기스칸의 어머니 허엘룬은 직접 갑옷을 입고 징기스칸과 함께 출전하였다. 징기스칸은 부대를 13쿠리엥으로 조직했는데 그 중의 제 1쿠리엥(쿠리엥은 원진을 치는 전투병단)을 허엘룬이 맡아 큰 공을 세우고 식읍 3천호를 챙기기도 했다.






  몽골인에게 전쟁은 부족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는 일이다. 남자 여자 따질 일이 아닌 것이다. MBC에서 방영한 다큐 아마존의 눈물에서 여성들이 남자를 두들겨 패는 장면이 있었다. 왜 여자가 남자보다 강할까? 여자에게는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남자가 반격하여 주먹을 휘둘렀다면, 그 여성의 자식들이 가만 있겠는가? 때때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강력한 공동체를 형성한다. MBC에서 방영한 아프리카의 눈물에서는 장가를 못간 노총각 다르게가 집이 없어 비를 맞고 밖에서 자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이 경우는 세력이 없어 고립된 것이다. 남자는 성인이 되어야 세력에 가담할 수 있다.






  여성은 기본적으로 자녀가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일정한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남성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부족사회에서 남자들은 전투에 나가서 죽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세력형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부족민의 경우 거듭되는 부족전쟁으로 40세까지 사는 남자는 드물기 때문에 개인적인 세력형성에 큰 관심이 없다. 대신 전사공동체 안에서는 강하게 결속된다.






  ● 여성 - 개인을 중심으로 작은 규모의 세력을 형성한다.



  ● 남성 - 전사집단을 중심으로 큰 규모의 세력을 형성한다.






  원시 부족사회에서는 부족의 전통이 할머니를 중심으로 모계 상속되고 남성들은 부족의 전통도 모르고 전쟁만 일삼다가 죽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부족의 서사시나 의료적인 지식 등 부족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부분은 여성 제사장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남자들은 부족전통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왜 몽골은 강한가?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몽골에도 귀족이 있고 노비가 있지만 농경사회의 계급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전투가 일어나면 모두 평등해진다. 왜? 조금이라도 평등한 부족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때문이다.






  몽골의 부족들은 수시로 전쟁을 벌여 노예를 잡았기 때문에 많은 노예가 있었지만, 징기스칸은 그들을 받아들여 전사로 길렀다. 넓은 초원에서 노예가 도망쳐 버리면 잡을 수 없다. 신분상승을 꾀하는 노비들이 부족을 탈출하여 징기스칸 휘하로 모여들었다. 징기스칸은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은 전쟁에서 얻은 재물을 모두 부족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늘 곤궁했고, 그 때문에 전쟁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사실을 알고 충성스런 너케르(가신)들이 모여들었다.






  혁명을 하자 프랑스는 강해졌다. 강해졌기 때문에 그 힘으로 나폴레옹은 유럽을 통일할 수 있었다. 전쟁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좋은 체제와 나쁜 체제가 경쟁하면 반드시 좋은 체제가 승리하게 되며, 그 이유는 좋은 체제의 경우 국민이 가진 역량의 백 퍼센트를 동원하기 때문이다.






  귀족도 평민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오직 실력만이 있는 사회라야 국민의 역량을 백퍼센트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별있는 사회를 원한다. 담장을 높이고, 국경을 막고, 소통을 차단하려고 한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전쟁에 패하고 만다.






  전쟁이 인류를 진보시키지는 않으나 이미 일어난 진보는 전쟁에 의해 전파되곤 했다. 기득권자들은 언제라도 진보를 원하지 않으며 봉건시대에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은 전쟁 외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한 것도 양차 세계대전이 계기가 되었다. 남자들이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군수공장에 일할 인력이 절대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전쟁 전에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일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전쟁이후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승만이 토지개혁을 하고 의무교육을 도입한 것도 북한과의 대결구도와 관련이 있다. 만약 이승만이 토지개혁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625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토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이 획득한 토지를 지키기 위하여 북한과 싸우려 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전쟁을 통해 진보를 달성할 필요는 물론 없다. 그러나 대결이 불러오는 긴장이 사회를 진보하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국회에서는 여야가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다. 이 또한 사회를 진보시키는 힘이다. 만약 여야가 대결하지 않고 사이좋게 나눠먹는다면 그것이 더 치명적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늘 여야의 대결을 비난하지만 대결해야 한다. 야합이 더 치명적이다. 완전한 대결이 일어나는 구조로 세팅해가야 한다.






  본질은 세력화다. 공동체는 진보하며 그 과정에서 세력화 한다. 공동체의 세력화가 극한에 도달하면 국가는 전쟁을 하고 노조는 파업을 하고, 월드컵은 결승전을 벌이고, 슈스케는 존박과 허각 중에서 한 사람을 고른다. 그 단계까지 긴장을 고조시켜 가야 한다. 그래야 본질이 드러난다. 공동체의 의미가 드러난다.






  긴장이 최고조에 도달하였을 때 인류는 '왜 사는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삶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감각적으로 알게 된다. 그 긴장이 물론 전쟁에 의한 긴장일 필요는 없다. 축제에 의한 긴장일 수도 있고, 스포츠에 의한 긴장일 수도 있고, 사랑에 의한 긴장일 수도 있다.






  인간은 사랑할 때 예민해진다. 공동체적 본능이 살아난다. 사랑할 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알게 된다. 자신을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여기고 그것을 당연시 하던 사람도 사랑에 빠지면 180도로 변한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된 자신을 보고 놀라게 된다.






  전쟁할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종류의 긴장은 그 소속한 공동체의 전체에 파급되어 메아리로 되돌아오며, 그때 인간은 공동체의 존재를 발견하고 정신차리게 되며, 소통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을 알게 된다. 그렇다. 인류는 언제라도 소통의 능력을 길러 집단지능을 형성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은 그 공동체의 중심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고립되어 혼자 생활하는 사람도 그 혼자만의 무대 안에서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그 혼자만의 세계 깊숙한 곳에서 중심이 되고자 한다. 단 둘만의 커플이 되어도 그 둘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그 둘이 만들어낸 세계의 가장 깊숙한 심연에 도달하려고 애쓰게 된다. 공동체의 규모와는 관련이 없다. 누구든 소통을 완성시켜 무형의 공동체를 유형화 하려고 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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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의 진보에 의해 인류는 성장한다. 남자가 힘이 세다 해도 여자들이 세력화 하면 남자가 못 당한다. 부자들이 힘이 세다 해도 빈자들이 세력화 하면 못 당한다. 그리고 그 세력화의 끝에는 전쟁이 있다. 전쟁이 최후의 수단이다.






  SBS의 긴급출동 SOS에서 많이 다루듯이 고립되고 폐쇄된 지역에는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학대받는 일이 흔하다. 노출되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무수한 CC카메라에 노출되어 사생활을 빼앗기고, 조지 오웰의 '1984년'이 되었다고 항변하지만, 봉건시대에는 모든 마을 사람이 그 마을 구석구석을 시시콜콜 다 알고 있었다. 이웃집 부엌에 숟갈이 몇개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봉건사회야말로 현대사회 이상으로 완전히 노출된 사회, 사생활이 없는 사회, 조지 오웰의 감시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마을 끝집 세살꼬마가 우는 소리가 늘 우리집까지 들렸다. 지금은 아기울음 소리가 담장을 넘지 않는다. 이건 좋은 소식이 아니다.






  프랑스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통치하는 방법은 모두의 사생활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대개 궁정에 불려와서 왕과 함께 궁전에서 살아야 했으며 궁정에서 귀족들의 사생활은 완벽하게 노출되었다. 왕은 그 궁궐 안 구석구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아침마다 귀족들은 왕을 알현해야 했으며, 오늘은 누가 임금에게 첫번째 옷을 입혀주는 영광을 입게 되는가로 다투어야 했다. 왕의 세번째 건너에서 양말 한쪽을 넘겨주는 역할만 맡아도 가문의 영광이었다. 궁녀들은 모두 귀족들의 사생활을 밀고하는 왕의 간첩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생활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루이 14세의 통치수법이었다. 이는 진시황이 사생활을 완벽하게 감춘 사실과 완전히 반대된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사생활을 감춘 진시황은 환관에게 놀아나다가 아들대에 이르러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왕은 대중적 인기를 얻어야 하며 그 방법은 끝없이 궁정의 스캔들을 생산하여 평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유럽에서 옛날 신문들은 왕실과 귀족들의 무도회 소식 외에 다른 기사는 없었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찰스군의 부인 다이아나 씨도 없는 요즘은 엉뚱하게 페리스 힐튼이 마치 공주라도 된 양 행세하며 그 일을 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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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1-01-1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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