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 옥주현은 댓가 치렀다?
‘본질은 언론방송의 사설권력에 대한 분노.’

칼럼에 옥주현을 언급하였더니 조회수가 대박이다. 다들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걸까? 그 많은 안티를 불러모았을 정도로 옥주현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란 말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중이 먹고 살겠다는 한 연예인의 몸부림에 그렇게 집요한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스토커도 아니고 말이다.

본질은 따로 있다. 대중들은 나가수를 통하여 뭉클한 무언가를 느꼈다. 내면에서의 울림소리를 들었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번떡임을 보았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대중들은 한국의 시민사회라는 공동체를 향하여 발언하고 싶은 것이며, 옥주현에 대한 과도한 안티는 대 사회적인 발언권을 얻기 위한 논리적 장치일 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김어준은 라디오 방송에서 ‘옥주현은 충분히 댓가를 치렀다.’고 말했는데 나는 김어준이 잘못 짚었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은 아직 자기 안에 들어차 있는 것을 반의 반도 표현하지 못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사건의 진짜 주인공은 옥주현이 아니라 대중이다. 옥주현은 제삿날 엄숙한 분위기 모르고 깐죽대다가 혼나는 아이처럼 철없이 나대다가 재수없게 걸려든 거다. 옥주현이 불쌍하긴 하다.

“웃자고 만들었는데 죽자고 하니까요, 너무 힘드네요. 허허.” 최근 만난 모 방송사 예능국PD의 쓴웃음이다. [스타뉴스 김수진 기자]

분위기 파악 못한 이는 실수한 김건모 뿐이 아니다. 이 기자도 지금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다. 문제의 그 예능 PD도 마찬가지고. 분명히 말한다. 지금이 웃을 상황인가?

남을 비판하기는 쉽다. 타인의 단점을 발견하는 것도 쉬운 일이다.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진정하다. 대중이 옥주현의 단점만 보고 장점은 보지 못한다면 그것도 좋지 않은 것이다. 아마 김어준은 그 점을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옥주현의 장점도 봐주자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어준이나 옥주현이나 다들 방송으로 먹고 사는 동업자 처지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다. 옥주현을 고리로 해서 대중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김어준은 왜 보아내지 못하는가? 옥주현의 장점도 보자고 말하면서 대중의 장점은 왜 보지 못하는가? 왜 대중들의 내면에 가득 채워져 있는 에너지를 보아내지는 못하는가? 왜 그 채워진 에너지에 점화하지 못하는가? 멋진 빅뱅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더 큰 지평이 열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자고로 치수사업은 흐르는 물을 막아서는 실패하고 물꼬를 터주어야 성공한다고 했다. 대중의 넘치는 에너지를 막아세워서는 곤란하다. 명박산성 곤란하다. 자신의 의도대로 대중을 제어하려 해서는 안 된다. 김영희 PD처럼 다치는 수 있다. 오히려 대중의 넘치는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물론 그 표적이 불쌍한 옥주현 개인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현장은 어떤가?

포탈 사이트에는 지나치게 많은 옥주현 관련 기사들이 뜬다. 지금 대중과 언론권력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여 있다. 언론권력이 ‘바닥에 드러누워 노래하고 어쩌고’ 따위의 수준이하 기사로 융단폭격을 해서 역성들어줄수록 중간에 낀 옥주현만 더 희생된다. 옥주현 주변사람들은 정신차리기 바란다.

그렇다. 본질은 권력 대 권력의 투쟁이다. 사실이지 이 싸움은 오래되었다. 아마 10여년 전부터일 것이다. 아이돌이 방송의 메인스트림으로 군림하면서 대중들은 모든 것이 배후에서 연출되고 조정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마디로 저것들이 대중을 ‘가지고 논다’는 모욕감을 느낀 것이다.

대중들은 기획사의 농간에 모욕받아 왔다. 방송 PD의 농간에도 모욕받아 왔다. 언론사의 바람잡이 짓에도 모욕받아 왔다. ‘아나. 사탕줄께 따라와라.’는 식이었다. 대중은 지난 10여년간 꾸준히 모욕받아 왔으며, 그동안 쌓인 울분을 폭발시킨 것이다. 대중은 배후에서 작용하는 일체의 사설권력에 반대한다.

그런데 그동안 조용하던 대중이 갑자기 왜? 무엇 때문에?

예술은 세상이 손잡고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저 재미만 있으면 된다거나, 그저 감동만 주면 된다거나 하는 식이면 곤란하다. 그냥 재미로 하고 감동으로 하는 것은 B급이다.

대중가요는 원래 장삿속으로 하는 B급문화이지만 어느 수준의 성취를 이루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가수들이 노래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다. 감동을 주었기 때문도 아니다. 세상이 실제로 가는 방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21세기가 어디로 가느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사건은 전형적으로 21세기적인 사건이다. 인터넷 시대에 걸맞는 사건이다. 20세기는 영웅의 시대였다. 20세기는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박정희, 김일성 같은 자도 20세기에는 영웅으로 일컬어졌다. 왜? 세상이 영웅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영웅이 안 되면 혼줄날 판이었던 것이다.

20세기는 영웅이 공장에서 포드시스템으로 찍어져 나왔다. 처칠영웅, 드골영웅, 스탈린 영웅, 카다피 영웅, 낫세르 영웅, 간디 영웅, 체 게바라 영웅, 카스트로 영웅, 모택동 영웅, 히로히또 영웅, 히틀러 영웅들이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진짜 영웅도 있었고 짝퉁 영웅도 많았다.

대중들은 영웅 따라배우기가 하루의 일과였다. 이제 그런 시대는 갔다. 그 웃기던 시대는 갔다. 코미디는 여기까지. 21세기는 ‘강한 개인’의 시대이다. 이제 사회는 더 이상 지도자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머저리 부시가 주제에 영웅짓 하려다가 바보 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세상이 바뀌었다. 나가수 사건은 그 새 시대로 가는 하나의 이정표다.

바야흐로 세상이 바뀌려 할 때는 예술이 먼저 신호탄을 쏘아올린다. 르네상스가 그러하고, 인상주의 화풍의 등장이 그러하고, 팝아트의 등장이 그러하다. 이 작은 하나의 사건에서 거대한 물줄기의 변화조짐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고흐는 원래 목사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림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고흐의 그림에 모작이 많은 이유는 누구나 쉽게 베껴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후원자였던 가셰박사가 가장 많은 고흐 모작을 그렸다는 설도 있다. 고흐의 그림이 위대한 것은 그림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고흐가 세운 이정표를 따라 세상이 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의 진정한 주인은 진리다. 진리와 일치해야 진짜배기 예술이 되는 것이다.

‘듣기에 좋다? 실력이 있다? 기술이 뛰어나다? 열심히 한다? 감동받았다?’ 웃기고 있네! 수준 좀 올리자. 언제까지 그 바닥에서 굴러먹을 것인가?

가끔 보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거나, 혹은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진솔하게 잘 묘사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웃긴 소리다. 김기덕 영화에 무슨 얼어죽을 감동이 있고 리얼리티가 있다는 말인가?

하긴 김기덕의 등장 이전에는 남자배우들이 피부를 안 태우고 하얀 살 그대로 농부 역할로 나왔는데, 김기덕 감독의 등장 이후 살을 태우고 나오는건 정착이 됐다. 양반집 머슴이 피부가 뽀얗다면 그게 될말인가 말이다. 그러나 이런건 본질이 아니다. 진짜배기가 아니다. 곁가지에 불과하다.

김기덕은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이정표를 보았다면 그리로 곧장 나아갈 일이지 거기서 무슨 리얼리티를 찾고 감동씩이나 찾으려 든다는 말인가? 유치하게 말이다. 수준 떨어지게 말이다.

세상이 실제로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김기덕 영화의 근본은 ‘강한 개인’이며 이는 유럽인에게 없는 것이다. 서구의 그들은 노조나 조합이나 시민단체나 집단위주로 조직하여 기득권과 싸운다. 그러면서 무수한 영웅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구식이다. 퀴퀴한 20세기 냄새를 벗어던지지 못한다.

배트맨부터 슈퍼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에 엑스맨까지 이 얼마나 유치한 영웅놀음이란 말인가? 서구정신은 본질에서 그 유치한 영웅놀음으루부터 벗어날 수 없다. 진정 ‘강한 개인’은 석가와 혜능, 노자, 공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지적 자산이 축적된 동양정신에서 찾아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 시대에는 누구나 갑자기 스타가 될 수 있고 이제는 진짜 강한 개인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인류가 진보하여 마침내 석가와 혜능, 노자와 공자의 지혜를 써먹을 수준까지 발전하여 왔다는 거다. 언제까지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출동이나 기다리고 있겠는가 말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시대가 먼저 인류에게 요청하는 것이며 홀로 깨어있는 자 있어 김기덕 감독이 처음 응답한 것이다. 21세기는 개인의 시대이다. 사람의 시대이다. 지도자의 시대가 아니다. 김기덕이 멋진 개인의 시대 프로젝트를 띄웠다. 예술은 그 인류공동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다.

21세기인들은 배후에서 조정하고, 연출하고, 제어하는데 분노를 느낀다. 김영희 PD는 좋은 의도로 김건모의 재도전을 연출했지만 대중들은 그동안 배후에서의 조정에 충분히 모욕받아왔다.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무기가 있는데, 이 쌍방향 의사소통의 시대에 아직도 대중을 갖고 놀려고 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중의 권력을 인정해야 한다. 대중이 일관된 의사를 표현한다면 언론권력이 이를 수용해야 한다.

대중이 중구난방으로 변덕을 부린다면 곤란하지만, 지금처럼 일관된 신호를 보낼 때는 언론권력이 대중권력에 굴복해야 한다. 어떤 이유든 대중을 조정하고 제어하려 한다면 곤란하다. 갑과 을이 바뀌었으니 분위기 파악해야 한다.

아이돌이 알려진 것은 20여년전 ‘뉴키즈 온 더 블록’의 내한 이후일 것이다. 보도에 ‘뉴키즈 온 더 블록’의 의미를 ‘노예판매대 위에 새로 올려 세워진 어린이 노예들’이라고 풀이하던데, 그 이름이 아이돌의 의미를 제대로 나타냈다.

아이돌이라고 하면 우상이라는 뜻이지만 반대의 경향이 있다. 아이돌은 노예처럼 소비자의 요구에 잘도 복종한다. 비틀즈처럼 꼴통부리지 않고 대중이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다 한다. 그러므로 아이돌은 21세기가 요구하는 강한 개인과 맞지 않다. 네티즌들은 옥주현 뒤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림자를 본다. 배후에 누가 있다고 믿는다. 아이돌이 기획사에 의해 관리되듯이 ‘보이는 손’에 의해 조정되고 연출되고 편집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옥주현 혼자 고독하게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10여년간 단 한 차례의 속임수도, 연출도, 조정도, 편집도, 기획도 없었는가? 그동안 방송은, 기획사는, 언론은 꾸준히 대중을 갖고 놀았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른바 ‘쉴드 쳐준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온갖 수준이하의 보도들이 난무한다. 언론권력이 대중들과 일전불사 하겠다는 식이다.

아이돌은 21세기가 가는 방향이 아니다. 강한 개인의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다. 유럽에서 제법 한류바람이 일었다고 하지만 그건 단지 시장논리에 따라 수요가 있으니 공급하는 것 뿐이다. 통일교가 리틀 엔젤스를 가동하여 세계 180개국에 종교를 수출한 원조 한류공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와 비슷하다.

과연 문선명이 원조 한류스타인가? 통일교가 세계 180개국에서 아무리 많은 달러를 긁어모았어도 한류공신이 될 수 없듯이 이수만도 원초적으로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달러는 달러일 뿐, 장사는 장사일 뿐, 수출은 수출일 뿐.

왜? 그 방향이 21세기가 나아가는 방향은 아니니까.

필자가 한류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한류라는 것이 생기기 훨씬 전인 15년 전부터 한국이 조만간 세계 최고가 된다고 꾸준히 말해왔다. 이유는 딱 하나다. 한국의 포지션이 좋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서구문명과 동양문명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착각하면 곤란하다. 일본의 사상이 옳아서 한때 일본이 세계적으로 잘 나간 것이 아니고, 기독교 사상이 옳아서 서양이 이렇듯 발전한 것도 전혀 아니다. 오직 포지션이 좋았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이 아랍을 쳐부수어서 아랍일대를 황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랍의 지식인들이 무어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남부유럽으로 대거 이주하여 르네상스를 촉발시킨 것이다. 징기스칸이 중세 암흑시대의 잠든 유럽을 흔들어 깨운 것이다.

최근 정동영이 참여당과 민노당의 통합논의를 긍정하는 등 좋은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정동영이 갑자기 개과천선하고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금 정동영의 포지션이 좋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리더 자리에 갖다 놓으면 일을 망치고 말지만, 볼보이 자리에 갖다 놓으면 매우 일을 잘 하는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며 정동영의 지금 위치는 적재적소인 것이다. 정동영이 칭찬을 들으려면 나대지 말고 그 포지션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한류가 뜨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한국의 포지션이 좋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출이 늘어나는 것도 ‘지는해’ 일본 옆자리에서 ‘뜨는해’의 좋은 포지션 때문이지, 결코 이명박과 강만수의 삽질 때문은 아니다.

예술의 목적은 소통의 레벨을 끌어올림으로써 기준을 제시하고 그 기준에 맞추어 인류 공동의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한 개인의 작업이라도 인류의 진보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예술은 본질이 진보이며 보수예술은 있을 수가 없다.

예술은 인류공동의 프로젝트이다. 나가수가 예술인 이유는 임재범과 이소라가 부른 노래가 A급이어서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인류공동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을 나가수붐을 통하여 표출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한다. 이 무대의 진짜 주인공은 한국의 대중들이다.

작가가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대중이 알아보지 못하면 파묻히고 만다. 도공이 잘 만들어진 도자기를 깨뜨리는 것은 기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대중의 안목을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대중들은 이소라가 기준을 끌어올렸다고 믿고, 옥주현이 기준을 낮추었다고 믿는다. 기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예술이다.

미식가들은 좋은 맛을 추구한다. 어떤 요리사가 정진하여 마침내 ‘신의 맛’을 만들어 냈다면 미식가들이 감탄하고 좋아할까? 천만에. ‘이거 자연산 아니잖아.’ ‘이거 분위기와 안 맞잖아.’ ‘이거 창의성이 부족하잖아.’ ‘맛은 좋은데 정성이 부족해.’ 미식가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는다. 왜냐? 바로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옥주현에게는 트집을 잡는다. 21세기 분위기와 안 맞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인류 최고의 예술가는 인류 최고의 맛이나, 멋이나, 흥이나, 감동이나, 기교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거기다 딱지를 놓은 사람이다. 그것에다 딱지를 놓는 논리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인류공동의 프로젝트에 임하여 그 기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예술이며 대중은 이소라를 초청하고 옥주현을 거절하는 방법으로 그 기준을 끌어올리고자 한 것이다. 기준은 언제라도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정상의 뾰족한 자리여야만 모두의 눈에 동시에 보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리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면 멋진 일이 아닌가? 노벨문학상 하나 못 받았을 정도로 척박한 한국이지만 말이다. 다른건 못해도 좋다. ‘기준’ 하나만은 세계최고라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인류 공동체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단련되어 있다. 석가, 혜능, 노자, 장자, 공자, 원효라는 좋은 자산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아니던가?

6년을 꼼짝 않고 정진한 석가의 기준, 제자가 한쪽 팔을 자르고서야 비로소 고개를 돌려 바라봐준 달마의 기준, 글자 한 자도 모르는 주제에 당대 최고의 지성에게 덤빈 혜능의 기준, 인간사회의 기준이 아닌 우주와 자연의 잣대를 제시한 노자의 기준, 패도를 물리치고 왕도를 제시한 공자의 기준, 그 높고도 높은 기준을 두고 ‘그래봤자 예능인데’ 하며조잡한 기준을 들이댄대서야 될 말인가? 그 높은 레벨에서 노닐 배짱이 없는 자는 이 논의에서 빠지는 것이 맞다.

인류 전체의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할 목적을 가진 예술의 세계에서, 최고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최고를 보았다. 그 최고는 기교만으로 도달되는 세계가 아니다. 감동만으로 도달되는 세계가 아니다. 진도 팍팍 나가주는 21세기가 가는 방향성과 맞지 않으면 원초적으로 배제된다.

http://gujoron.com**
**

drkim's profile image

drkim

2011-06-15 23:43

Read more posts by thi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