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625를 아는가?**

625의 의미를 제대로 짚어주는 사람을 필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대개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며 수준이하의 논의를 하고 있더라. ‘너희가 먼저 도발했지 않느냐?’는 식이다. ‘너희’가 어딨냐? 당시는 해방직후라서 남남으로 완전히 갈라선 것이 아니고 같은 한 덩어리였다. 본래 하나인 것을 억지로 둘로 쪼개놓으니 복원력이 작동하여 뭉치려는 힘이 강했고 그 때문에 전쟁에너지는 포화상태였다.

4.3으로 이미 전쟁은 발발된 것. 카다피나 탈레반의 예에서 보듯이 자기 국민을 죽이는 정부는 존립할 자격이 없다. 당나라도 연개소문이 자기 국민을 죽인다는 구실로 침략해 왔다. 4.3으로 북은 빌미를 얻었다. 그런데 남은 남대로 북의 도발을 유도할 심산이었다. 6개월 전부터 첩보는 들어왔지만 북한 출신 이승만, 역시 북한 출신 채병덕은 개성에서 아침먹고, 평양에서 점심먹고, 신의주에서 저녁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북한 출신에다 외국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남에 지지기반이 없었던 것이 이승만의 큰 약점이었다. 그는 중국의 공산화로 인하여 초조해져 있었다. 김구 선생 역시 남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수립에 적극 참여할 의지가 없었다.

이승만은 휴전선에서의 분쟁을 활용하여 미국의 무기지원을 얻을 셈이었고 김일성은 분쟁에서 밀리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남의 오판을 유도할 셈이었다. 북이 의도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자 중국의 공산화로 초조해진 이승만과 풋내기 친일파 채병덕은 진짜 평양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미국은 미국대로 이승만에게 무기를 주면 북진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한국은 논이 많아서 북한 탱크가 논에 빠져서 움직이 못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없다는 말도 나왔다. 미국과 이승만은 서로 불신하고 있었던 거다. 이게 문제. 더구나 장개석이 옆에서 삽질하는 바람에 한국까지 덤태기를 쓴 거.

지금 기준으로 625를 보면 곤란하다. 이념을 앞세워도 안 된다. 그건 결과론이다. 해방당시 미국은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보고 있었고, 일본은 미국의 적국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적지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에 상륙하면서 환영하러 나온 한국인을 향해 발포해 버렸다. 적으로 본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적이 아니라는 근거는 임정인데 미국은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625가 일어난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국이 한국을 괄시한 것이고, 그 이유는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이 미국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카쓰라-테프트 밀약으로 조선을 일본에 넘겨준 당사자가 미국이니. 더 큰 이유는 미국이 중국을 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이 공산화 되지 않았다면 장개석이 대륙을 지배했을 것이고 당연히 백범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미국은 일본을 용서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소련의 약진 때문이다.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경제가 57년부터 살아났는데 그 덕에 한국경제도 살아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친일파 박정희가 나타난 것이고.

무슨 뜻인가? 이차대전때 미국은 철천지 원수 일본을 아주 밟아놓을 생각이었고 살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미쳤나? 적을 왜 살려줘?’ 그런데 소련이 득세하는 바람에 소련을 막기 위해 일본과 한국을 키워야 했던 것이다. 냉전의 혜택을 서독과 일본이 본 것이고, 그 연장선 상에서 한국에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개는 한국 입장에서 매우 엿같은 것이다. 그 중심에 장개석이 있다. 대륙이 공산화 되지만 않았어도 한국에서 625가 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산진영과 서구진영이 대결하는 최전선이 중국과 소련 사이의 만주 일대여야 하는데, 장개석이 멍청한 짓을 하는 바람에 엉뚱하게 한반도가 불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장개석은 졌을까? 물론 멍청하기 때문이다. 근데 멍청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중일전쟁에서 미국은 중국을 지원했는데 중국에 공군이 없었으므로 미국은 중국인을 훈련시켜서 비행사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중국인은 도무지 멍청해서 조종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중국인들은 멍청할까? 왜 훈련을 시켜줘도 중국인은 비행사가 못되는 것일까? 결국 미국 용병들이 돈 받고 버마전선에 투입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왜 중국인들은 못난 찌질이인가? 요즘 중국은 잘 하고 있는데 말이다.

정답 – 전투기 조종사 모집하는데 중국인들이 자기집 늙은 하인들을 데려왔기 때문이다. 이건 뭐 구한말 서양인이 테니스 치는 것을 보고 조선 양반들이 ‘그런 힘든 일은 하인들 시키지 왜 그러셔?’ 하는 풍경이다. 중국인들은 중일전쟁 중에도 꽌시를 앞세우고 개인 인맥 위주로 움직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개인간에 알음알음으로 전해졌고 공적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유로 말하면 예컨대 이런 거다. 미군 장교가 중국군 장교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장소에 늦게 나타난 중국군 장교가 거만하게 가마를 타고 와서, 하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잡심부름 시키고 있으면 미군 장교는 돌아버릴 것이다. 권총을 빼서 쏴버리고 싶을 것. 한 술 더 떠서 기생을 스무명이나 부르고, 풀코스 중국요리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고 일단 ‘밥부터 먹자’는 식으로 나오면 이건 뭐 말이 안 통하는 거다.

결론적으로 미군과 중군은 소통이 되지 않았다. 이승만과 미국도 소통되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 전차가 남한 논에 빠져 못 간다는 헛소리가 나온 것이다.

미국이 물자를 지원해도 그냥 사라져 버린다. 미군.. “어제 보낸 물자 어디갔죠?” 중군..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어제 보낸 물자 어디로 갔느냐?” 중군 졸개 1..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어제 보낸 물자 어디로 갔느냐고 나리께서 묻고 있지 않느냐?” 중군 졸개 2..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어제 보낸 물자 어디로 갔느냐고 나리께서 묻고 있지 않느냐고 어른께서 전달해오지 않느냐?” 중국군 졸개 3 “여봐라……”. 이렇게 7단계를 계속 반복하고 있으면 어떨까? 이건 뭐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거다. 패죽일 수도 없고.

맥아더가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34살 먹은 풋내기 친일파 채병덕 참모총장 겸, 육해공군 총사련관을 자른 것이었다. 왜 그를 잘랐을까? 무능해서 자른게 아니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해서 자른 것이다. 위에 비유로 이야기한 중군의 내부사정과도 비슷하다. 말이 통해야 뭐든 해볼 수 있는 거다.

맥아더가 한강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물었다.

맥 : “넌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것인가?”

국군 : “옛! 각하께서도 군인이고 저도 군인입니다. 아시다시피 군인은 다만 명령을 다를 뿐입니다.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기 전까지 저는 여기에 계속 서 있을 것입니다.”

맥 : “그럼 명령이 없을 땐 어떻게 할 것인가?”

국군 : “그렇다면 저는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것입니다.”

맥 : “오 장하다 자네말고 딴 병사들도 그런가?”

국군 : “예 그렇습니다.”

맥 : “아 참으로 훌륭하구나. 지금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국군 : “각하!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북한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게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인터넷 검색에서 발견한 걸 다듬었는데, 실제로 맥아더와 병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다면 맥아더는 그냥 한국을 포기했을 것이다. 중국을 포기했듯이. 이런 머저리들을 위해 미국이 왜 귀한 자기 피를 낭비해? 말도 안 되는 거다. 이건 뭐 장교가 가마타고 와서 기생 부르고 뻘짓하는 비유와 무엇이 다른가?

졸병이 맥아더에게 ‘무기내놔라 탄약내놔라’ 하는 판인데 무슨 소통을 해? 이건 말이 안 통하는 거다. 패죽일 수도 없고. 일개 졸병이 맥아더 원수 앞에서 조건을 걸고 협상을 하고 흥정을 하자고 한다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니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 군단>사단>연대>대대>중대>소대>병으로 명령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왕이 개인적으로 믿을만한 심복을 보내 현지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전쟁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임진왜란때도 선조임금이 신립을 내려보내서 ‘현지에서 되는대로 병사를 모아봐라’고 하는 판에, 현지의 병사들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신립장군 말을 들을 리가 없으니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는 방법 외에는 전투를 하도록 만들 방법이 없었다. 전투경험 없는 병사에게 전쟁을 시키는 자체가 어불성설.

진관체제나 제승방략체제 하에서는 상관에서 부하로 이어지는 수직적 명령전달체계 자체가 없었다. 직속개념 자체가 없는 오합지졸은 오직 이기는 전쟁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장개석은 병사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했고,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주려면 무조건 병사를 많이 모아 숫적 우세를 과시해야 한다. 보급은 없는데 병사만 많으니 개판이 될 밖에.

모택동군 역시 단지 직속부대가 강했을 뿐 뒤에 항복해서 들어온 부대들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혁명을 겪고 나서야 약간의 근대화가 되었다. 북한은 아직도 개인 인맥 위주로 돌아가는 봉건시스템이다. 중국 역시 꽌시 어쩌고 하고 있다. 이게 다 봉건주의다. 중국은 근대화 되었는가? 필자는 회의적이다.

‘가!’ 하면 가는 나라인가? 아니면 ‘저 말입니까?’ ‘근데 왜요?’ 하고 되묻는 나라인가? 한국은 625를 겪고 나서야 약간의 근대화가 되었다. ‘가!’ 하면 가는 시스템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정부의 상층부는 그렇지 않았다. 맥아더가 찾아와도 조건을 걸고 흥정을 하려고 했다. 어떻게든 미국을 속이려 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미국을 여러번 속였다. 그거 잘했다고 박수치는 사람도 많다. 봉건 영주처럼 행세한 것이다. 아프간에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본질은 의사결정이다.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는 명령이 말단까지 곧장 전달되는가 아니면 명령이 전해지는 각 단위마다 의사결정을 새로 하는가다. 이게 안 되면 아무 것도 안 된다. 아프리카 가서 사업해보면 이런거 느껴질 거다. 당사자와 계약 다 끝냈는데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쟤 우리집 하인인뎅?” 하고 원점으로 되돌린다. 첨부터 다시 10단계를 거치며 계속 새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한국도 그런거 있다. 접대 어쩌구 하며 음성적 통로를 통해 스킨십을 해야 일이 추진된다. 봉건과 근대 사이에는 큰 벽이 있으며 그 벽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은 625를 겪으며 부산에서 평양까지 왔다갔다 하는 중에 그것을 얻었고, 중국은 문화혁명을 통해 단일한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다. 물론 많은 한국의 봉건인들은 여전히 전라도 경상도 타령하며 단일한 의사결정시스템을 부인하고 ‘너희가 이렇게 나오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응수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이 거기서 나온 거.

진리가 직속이다. ‘진리’의 결을 따라가는 마인드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가 뭐라하든 일단 반대로 돌면서 사태를 교착시켜 놓고, 시간을 벌어 그 사이에 잔대가리를 굴리며, 찔러볼 거 다 찔러보고, 쑤셔볼 거 다 쑤셔보고 난 다음에 현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자들과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일단 반대로 돌며 찔러볼 거 다 찔러보려는 자들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희생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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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1-06-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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