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의 보수회귀

민노당이 통합을 거부했다는데 뭐 결과적으로 잘 된 거다. 갑작스런 오세훈 변수의 등장으로 여러 정치적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 통합의 주도권은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으로 대표되는 재야, 시민단체 세력으로 넘어갔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입지가 없어졌다.

통합의 목적은 집권이다. 집권만 보장된다면 굳이 색깔이 다른 자들과 무리하게 공존을 꾀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한 마디로 빼다가 똥된 거다. 손을 내밀 때 잡았어야 했다. 이제 버스는 떠났고 지금 이 인원만으로도 승산은 충분하다. 오세훈 덕분에 저절로 교통정리가 되었다. 대중이 이심전심 소통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결정되었다. 애드벌룬 떠주었고 신호탄 쏘아졌으니 가면 된다.

앞으로 시민단체가 진보집권을 목표로 하는 대통합의 주도권을 잡는 것으로 대략 방향이 결정되었고, 민주당, 참여당도 입지가 약해졌으며 민노당, 진보신당은 대통합대열에서 이탈하여 중립을 지키는 걸로 결론이 났다.

결론은 진보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전제로 미국 민주당 수준의 스펙트럼이 넓은 진보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바깥에 있다. 다 그렇지야 않겠지만 그쪽 골수분자들은 그렇다.

자본주의 바깥에 사회주의가 있다는 주장이 입증된 예는 없다. 그들의 기반은 비과학 위에 있다. 말하자면 종교 비슷한 거다. 허는 실을 이기지 못한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구도는 망상일 뿐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실제로 있다. 은행에 가보면 알 수 있다. 현찰이 있고 실체가 있는 거다. 사회주의는? 그 실체가 없다. 없는걸 가지고 떠들면 곤란하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기승전결의 구조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체(體)라면 사회주의는 용(用)에 해당한다. 용(用) 없는 체는 있지만, 체(體) 없는 용은 없다. 운전수 없는 차는 있지만 차 없는 시대에운전수는 없다. 자본주의라는 차를 먼저 마련한 다음 사회주의라는 운전수가 역할을 하는 거다.

체가 먼저고 용이 따르는 것이며 자본주의를 먼저 인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 사회주의를 말해야 말이 되는 거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원천부정하며 전통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과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종교집단 비슷해서 대화가 불능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아이디어는 과학의 진보에 의한 생산력 혁명이라는 대전제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며, 인류가 저온핵융합에 성공하기까지 그럴 일은 없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장차 태양전지가 에너지 혁명을 가져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다. 지금의 태양전지 효율을 두배만 올려도 인류의 에너지난은 해결되고 남는다. 에너지난 해결되면 대학까지 무상교육 가능하다. 그러나 그건 에너지난이 극복되고 난 다음에 말하는게 수순이고.

본질은 생산력이다. 인류가 생산을 늘려온 기술은 딱 정해져 있다. 첫째가 자본증식, 둘째가 토지집중, 셋째가 자원채굴, 넷째가 발견발명, 넷째가 교육소통이다. 이 밖에는 가치라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든 뭐든 이 구조 안에서 기능하는 것이며, 이 밖에서 뭔가 수작은 먹히지 않는다. 첫째 자본증식은 다 아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이는 구조론의 5단계 중에서 앞선단계가 뒤따르는 단계를 종속시켜서 효율을 제고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어차피 종속관계가 있는 거다. 갑을관계가 있다. 갑이 을을 제한함으로써 효율이 향상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명백히 효율을 향상시킨다. 실제로 현장에서 가치를 생산해내는 거다. 뭔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질이 입자를 제한하고, 입자는 힘을 제한하고, 힘은 운동을 제한하고, 운동은 양을 제한한다. 그러므로 효율이 향상된다. 어부가 그물을 던진다면 물고기의 동선을 제한하는 거다. 그러한 제한에 의해서 가치가 체포되는 거다. 사냥감을 잡고 수확물을 얻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더라도 이 구조 안에서 합리화, 최적화를 주장해야 한다. 갑을관계를 인정하고 그 전제 하에서 갑이 무리한 요구를 못하게 하는게 맞다. 군대에서 계급제도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사적인 심부름이나 체벌, 모욕을 못하게 해야 하는 거지 명령계통 자체의 부정은 곤란하다.

전쟁터에서 총알이 날아오면 병사의 동선은 제한된다. 참호에서 머리 들면 총알맞아 죽는다. 분명히 물리적 제한이 실제로 있는 거다. 이는 자연의 실재다. 그 실재하는 물리적 제한을 규정해놓은 것이 명령계통이다. 자본주의 생태계에도 그러한 제한이 실제로 있고 그 제한으로 에너지를 가두어 효율을 생산한다.

둘째 토지집중은 주로 도시화를 통해서 달성되는 것이며 그 외에도 항만개발 도로개설 등으로 인한 가치상승이 있다. 생산요소들을 지리적으로 적절히 배치하는 데서 가치가 극적으로 향상된다. 대운하 같은 것은 미친짓이고, 공항이나 항구가 제 위치에 있어야 한다. 대부분 경제개발에 성공한 나라들은 좋은 항구를 가지고 있고 가난한 나라들은 아예 항구가 없다.

대부분의 부는 토지집중을 통해서 달성된다. 사회주의가 토지집중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토지를 집중하면 더 이상 집중할 토지가 없어지기 때문이지 토지집중 자체를 반대한다면 곤란한 거다. 그린벨트를 해제하면 토지가 공급되어 주택난이 해결되지만 더 이상 해제할 그린벨트가 없어지는 거다.

곶감을 빼먹으면 맛있지만 더 이상 빼먹을 곶감이 없어진다. 그러나 곶감은 원래 빼먹으라고 있는 거다. 언젠가는 빼먹는게 맞다. 사회주의가 균형자 역할을 할 뿐 방해자 역할은 곤란하다. 어떤 주의를 하든 토지집중이 가치를 생산하며 이는 스탈린이 러시아를 도시화 한 것도 마찬가지다.

셋째 자원채굴은 그야말로 석유 파서 돈 버는 건데 러시아나 브라질이나 아랍의 석유부국들이 그러하다. 무제한으로 석유를 빼먹는것보다 석유 덜 빼먹고 석유값을 올리는게 에너지난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 대체에너지가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그런 이야기를 해도 결국 석유는 빼먹으려고 있는 거다. 저온핵융합에 성공하거나 태양전지 효율이 개선되고 가솔린 자동차보다 우수한 전기자동차가 개발되면 그 석유 팔아먹을 데도 없다.

넷째 발견발명, 다섯째 교육소통에 있어서도 사회주의가 발언할 영역은 크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이 다섯가지 안에서 장기적으로 사회의 리스크를 감소시켜 효율을 올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효율의 증가를 수반하지 않는 사회주의라는 것은 없다. 손해보는 장사를 한다는 사회주의는 우주 안에 없다. 사회주의 개념이 존재하는 것은 이득이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당장 손해를 봐도 장기적으로 이득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라고 주장되는게 상당부분 밑돌 빼서 위에 고이는 식이라서 장기적으로 리스크를 늘려서 결국 효율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가치창출 없이 그냥 사회주의라는건 없다. 흔히 사회주의 이름으로 도덕적 당위를 주장하곤 하지만 우스울 뿐이다. 사회주의가 실제로 가치를 창출한 범위 안에서 인정받는 거다. 사회주의도 현찰이고 현찰을 제시하는 사회주의가 진짜다. 복지하면 수요확대로 일정범위 안에서 경제성장한다. 이건 입증된 거.

진짜 사회주의자라면 사회주의가 어떻게 가치를 창출했느냐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가치를 창출해 보여야 한다. 성공사례를 내놓아야 한다. 그 성공사례가 있다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있는 거다. 그런거없이 막연히 에헴하고 우쭐해 하는 것은 사실 유치한 거다.

솔직히 오늘날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자들의 마인드로 보면 조선시대 사대부 마인드와 같다. 그들은 서로 뭉쳐서 안면을 트고 세력을 만들었으며 그 동아리 바깥의 사람들을 멸시하고, 그 멸시를 통해서만 가치를 창출하는 거다. 다시 말해서 조선시대 양반계급 비슷한 강단중심의 인맥집단을 결성한 것이며 소망교회가 하는 인맥장사와 본질에서 같은 거다.

조선시대 양반은 법에 없는 집단이었다. 법적으로는 양천제라서 양인과 천민이 있을 뿐이다. 양반은 여러 관습의 집합이며 그 본질은 희소성의 가치와 타자의 멸시다. 양반이 먹고 사는 방법은 지속적으로 상놈을 멸시하여 견디다못한 부유한 상놈이 양반가문에 딸을 시집보내오게 하되 토지를 딸려오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하는 짓도 희소성의 제고와 타자에 대한 멸시다. 그들은 희소성을 높이기 위해 ‘넌 진보가 아냐법’을 쓴다. 자의로 진보를 좁게 해석하며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A급진보 B급진보 하고 급을 나눈다. 어차피 이 바닥에서 진보장사로 먹고살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으며 그 대가리숫자 외에는 전부 밀어내야 하는 것이다. 먼저 깨어난 뻐꾸기 새끼가 궁둥이로 지빠귀 알을 제 둥지에서 밀어내듯이.

개발시대에는 사회의 제반 리스크가 적으므로 리스크 감소를 통한 효율제고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적 가치의 입지가 없다. 예컨대 사회주의자가 ‘강을 오염시키면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고 백 번 말해도 그 강이 오염되는데 30년 세월이 걸리고 그 사이에 자본은 먹고 튄지 오래다.

양자강 같이 큰 강이면 수십 년을 오염시켜 왔어도 아직 덜 오염되었을 것이다.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커져서 블랙스완이 나타날 확률이 올라간다. 보이지 않는 사이에 이미 오염이 한계치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동안 꾸준히 오염시켜 왔기 때문에 조금만 폐수를 흘려보내도 물고기 떼죽음 사태가 일어난다. 자본주의가 그동안 꾸준히 망쳐왔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입지가 있다. 그러한 기승전결 구조 안에서 사회주의를 말해야 진짜다.

자본이 가치를 생산하는 방법은 간단히 모아놓는 건데, 그 이득은 빠르게 나타나고 그 피해는 늦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리스크는 잠복하여 있다가 어느 순간에 터지는 것이며 그 시점이 사회주의자가 힘을 쓰는 타이밍인 것이다.

자동차가 처음에는 멀쩡하다가 어느 시점에 줄고장이 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미리 보험에 들어놓아야 한다는게 사회주의다. 단독주택은 흩어져 있으므로 수리하기가 쉽지만 아파트 재건축은 어렵다. 이렇듯 모아놓음에 따른 손실은 항상 나중에 나타난다.

한계효용의 법칙이다. 한국의 생산은 꾸준히 증가해 왔고 한국인은 그만큼 더 행복해졌다. 그러나 그 행복의 효율은 계속 낮아진다. 예전에는 생산이 배로 늘어날 때 배로 행복해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여러 사회주의적 대안이 기능하는 것이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하나의 연속선 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러 말 할거 없고 참여정부를 부정하는 자와는 손 잡을 이유 없다. 왜? 아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젠 걔네들 없어도 이긴다.

아인슈타인이 틀렸단다. 청천벽력이다. 이렇듯 과학은 위태롭다. 과학은 자기부정의 연속이다. 그러나 과학은 의연하게 가던 길을 계속 간다.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람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왔다갔다 하면서도 차츰 자리를 잡아가지만, 근거없는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들은 천년동안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냥 화석이 된다. 그 화석은 시대구분을 하는데 쓰인다.

구조론은 기승전결이다. 그것은 끝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http://gujoron.com**
**

drkim's profile image

drkim

2011-09-26 18:00

Read more posts by thi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