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사랑 결혼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한다. 이것이 보통 사람의 생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 것은 사회적 형식에 불과하다. 그게 통속적인 거다. 인간은 그냥 사는 거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거다.
지나가던 객이 공연히 끼어들어 ‘너희들 뭐야?’ 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답이 궁해져서 ‘우리 사랑하는 거야’, 혹은 ‘우리 결혼했어’ 하고 둘러대는 거다. 이런 사회적 조작들을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
결혼은 존재규정이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공연히 그 사람을 ‘처녀’니, ‘과부’니, ‘미시’니 하고 딱지를 붙인다. 그래서 사람이 달라졌는가? 아니다. 사람은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주변의 의도있는 시선들이다.
달라진 것은 주변의 시선이며 거기에는 목적과 의도가 숨어 있다. 처녀면, 혹은 과부면, 혹은 미시면 그 주어진 입장에 따라서 어떻게 수작해보려는 거다. 그러한 사회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의도를 가진 자들이다. 그것으로 규정되는 당사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면 처녀니 과부니 미시니 하는 것은 없다. 단지 그렇게 규정하려는 자의 불순한 의도가 있을 뿐이다.
결혼은 존재규정이다. 그 규정은 사회의 것이며 의도가 숨어 있다. 때로는 불순한 것일 수 있으며 때로는 왜곡된 것일 수 있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홍길동이 박길동으로 되지는 않는다.
대통령 간판 달았다고 쥐가 인간되지는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벙커에서 찍찍대기는 마찬가지다. 목적과 의도를 배제하고 순수한 존재 그 자체를 보라. 그리고 훈련하라. 진짜배기를 보아내는 연습을.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는 순서는 확보된 사실을 사회에 전파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실제로 자연이 주변의 시선에 신경쓰며 작동하지는 않는다. 진실로 말하면 그 반대다. 결혼해서, 사랑하고, 만난다.
결혼, 사랑, 만남이라는 사회의 참견을 배제하고 용어를 바꾸자. 결혼은 존재규정이니 존재가 주인공이다. 존재하므로 사랑을 내뿜는 것, 서로가 동시에 사랑을 내뿜어서 서로 감염되었을 때 전광석화같은 만남이 그 안에 있다.
결혼했기 때문에(자연으로 보면 존재하기) 사랑하는 것이고(자연으로 보면 빛나는 매력을 보이기), 사랑했기 때문에 만나는 것(자연으로 보면 위대한 일치와 그로 인한 소통하기)이다.
툰치소크멘이 강수진을 사로잡은 5단계는
1) 보았고
2) 원했고
3) 결심했고
4) 실행했고
5) 성공했다.
..로 발표되고 있지만 이는 확보된 사실을 사회에 알리는 형식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성공했기에 실행했고, 실행했기에 결심했고, 결심했기에 원했고, 원했기에 보았다. 물론 여기서 성공, 실행, 결심, 원함, 보았음을 명시하는 단어들은 사회적 형식어에 불과하다. 언어가 가짜다.
사건은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나 상대방의 승인이 떨어져야 그것을 공식화 할 수 있으므로, 상대방이 승인하는 순서대로 진술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왜? 상대방이 생까면 무효화하고, 철회하고, 없었던 일로 할 안전장치가 있어야 하니까.
보다, 원하다, 결심하다, 실행하다, 성공하다의 순서는 사회의 쓸데없는 참견자들로부터 자기네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한 표현을 찾아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는 얼마간의 위선이 숨어 있다. 진짜가 아니다. 거짓되다.
구조로 보면
1) 탑 포지션 차지
2) 확보한 스펙의 가동
3) 쌍방향 크로스체크 시작
4) 마이너스 행동 구사
5) 보았음의 확보.
‘보았음’에서 사건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지만 허술하다. 뭘 봤다는 거지? 그림자를 봤다는 건가? 뒷모습이라도 보았나? 명찰을 봤다는 건가?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 거짓된 표지를 내밀고 다닌다. 그걸 봐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 가진 만큼 안다. 존재만큼 가진다. 그러므로 존재가 탑 포지션이다. 자기존재를 완성하여 탑 포지션을 차지했을 때, 그 존재의 밀도만큼, 그 존재의 완성도만큼 가지는 것이며, 가진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인다.
호주머니에 한 푼도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 앞에 미인이 지나가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면 돈도 있고, 직업도 있고, 명성도 있고, 신분도 있다면, 그제서야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훤히 들여다 보인다.
갖추어야 할 돈, 직업, 신분, 명성, 몸매들은 모두 ‘있는 것’들이다. 즉 존재다. being이다. being은 상호작용이다. 그러므로 완성도 문제가 제기된다. 존재해야, 그리고 그 존재를 완성해야 비로소 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그 존재의 완성으로 하여 탑 포지션을 차지해야 하며, 그 포지션을 받쳐주는 스펙이 구사될 때, 동원된 자원이 활용될 때, 비로소 상대방을 알기 시작하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가 허술할 때 볼 수가 없다.
도무지 무엇을 보았다는 말인가? 눈으로 보았다는 말인가? 마음까지 들여다 보았다는 말인가? 본질까지 충분히 보았다는 말인가? 자기존재가 무너져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경찰이 아닌 바에 검문할 수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 막아서서 소매자락 붙잡고 캐물을 수도 없고, 선 보는 자리를 마련할 수도 없고 보기는 무엇을 어떻게 본다는 말인가?
존재는 존재에 반응한다.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존재다. 자기 존재를 완성했을 때 상대방의 완성된 존재가 포착된다. 자기 존재가 허술한채로 누군가를 보았다는 말은 마치 ‘내가 어제 여의도 MBC사거리 앞에서 지나가는 김태희 봤다’는 말 만큼이나 허무한 것이다. 그게 본 것인가? 그것은 전혀 본 것이 아니다.
알아야 본다. ‘나는 김태희를 안다’고 말하면, 김태희와 나는 ‘아는 사이’라는 의미가 된다. 과연 김태희와 나는 아는 사이인가? 아는 사이가 아닌데 어떻게 볼 수가 있지? 모르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애초에 거짓말이다. 서로 ‘친연’한 사이가 아닌데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 친연.. 친척이나 친구, 친지로 성립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는 것.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친연할 수 있다. 예컨대 나의 취미가 등산이고 상대방의 취미도 등산이라면 등산이라는 가상의 ‘혈연’으로 맺어진 친연이 있다. 같은 등산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혈족을 만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군가를 제대로 보았다면 상대방과 나는 친연으로 이미 이어져 있는 것이다. 만나기 전에 이미 두 사람은 연결되어 있었다. 소리굽쇠 실험과 같다. 북 옆의 북을 치면 북은 울지만 종은 울지 않는다. 종 옆의 종을 치면 종은 울지만 북은 울지 않는다. 친연하면 반응한다.
원래 머리 속에 구조론의 인자가 약간 들어있는 사람이 구조론연구소에 반응하는 것이다. 알게 되고 보게 된다. 전혀 그것이 없는 사람은 보고도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수히 지나갔다.
옛날 서양의 귀족 부인들이나, 미국의 백인 여성들은 남자 하인들, 혹은 흑인노예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나체를 보이며 옷을 갈아입곤 했다. 상대방의 신분이 낮으므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제왕은 무치라는 말이 있다. 옛날 임금들의 성생활은 모두 공개되어 있었다. 날자와 시간까지 정해져 있었다. 궁녀 6명이 왕의 침실에 붙어 있는 밀실 3곳에서 밤새 숙직하며 임금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게 되어 있다. 왕은 감시자를 신경쓰지 않는다.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일본의 가부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쿠로코(黑子)가 왔다갔다 하며 무대장치를 옮겨도 관객들은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과 같다. 그 지점에서 존재는 완벽하게 부정된다.
존재는 상호작용이다. ‘있다’는 것은 반응한다는 것이다.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으로 된다. 상대방이 반응하게 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엄마따라 여자목욕탕에 간 남자아이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상대방이 반응하는 위치에 내가 있었다면 이미 성공이다. 그 성공에 의해 스펙이 사용되고, 쌍방향체크가 일어나고, 자원이 소모되면서, 만남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쌍방 중 1인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으면 취소된다.
‘없는 셈으로 치기 모드’에 들어간다. 반응했어도 일방의 반응은 반응하지 않은 셈으로 친다. 가부키의 쿠로코가 무(無)이듯이, 있는 모든 것을 취소하고 리셋모드로 들어간다. 원했고 결심했고 실행했고 성공했던 모든 과정을 취소한다.
그러므로 만남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전개들은 모두 제로가 된다. 올드보이 마지막 장면에서 최면술을 구사하여 미도의 기억을 날려버리듯이 완전히 날려버리게 된다.
자연은 에너지의 결을 따라간다. 밥을 먹었으므로 똥을 싸는 것이지 똥을 쌌으므로 밥을 먹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닭이 먼저고 알이 나중이다. 밥에는 칼로리가 있지만 똥에는 칼로리가 없기 때문이다. 닭은 자기 안에 에너지가 있지만 알은 그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알은 어미닭이 에너지로 품어주어야 작동한다.
에너지가 있어야 사건의 원인측이 될 수 있다. 만났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했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다. 존재가 원인이다. 상호작용을 반영하는 being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being은 돌멩이처럼 그냥 우두커니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팔팔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스위치가 켜진, 전구에 불이 들어온, 현재 작동하고 있는, 진행되고 있는 것이 being다. 그것이 존재다. 그렇게 팔팔하게 살아서 상호작용하며 존재하므로 사랑이라는 빛을 내뿜는 것이다. 매력을 내뿜는 것이다.
그 매력과 매력이 교차할 때,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지점에서 매력을 내뿜었을 때 위대한 일치가 일어나는 것이며,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만남이다. 그것으로 사건은 종료다. 본래의 친연에 의해 그 모든 것은 일어난다.
물론 그 만남은 표면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만남, 영혼의 만남, 본질의 만남을 의미한다. 얼굴만 봤다고 본 것이 아니다. 알아야 보는 것이며, 원래 아는 사이라야 볼 수 있다. 친연해야 원래 아는 사이가 될 수 있다.
처음 만났더라도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면, 친연성이 있다면, 서로 아는 것이며 볼 수 있다. 소리굽쇠처럼 이쪽의 사정에 저쪽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공명하기 때문이다. 표면이 아니라 이면까지,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까지, 마음 뿐이 아니라 영혼까지, 내 전부를 들어 상대의 전부를 만날 수 있다.
내 완전한 존재가 갖추어졌을 때, 상대의 완전한 존재가 반응하고, 나의 전부에 상대의 전부가 반응할 때, 온전한 만남이 있고,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혼이니 약혼이니 하는 사회적 안전장치는 쓸데없다. 그것들은 불완전한 자의 보조엔진일 뿐이다.
온전히 만났는가? 나의 전부에 상대의 전부가 반응했는가? 본래의 친연성이 갖추어져 있었는가? 원래 아는 사이인가? 볼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게 아니면 가부키의 쿠로코와 같다. 무(無)다.
다섯 살 꼬마 순이가 다섯 살 꼬마 철이를 만났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만남이 아니다. 얼굴만 봐놓고 만났다고 우긴다면 곤란하다. TV에서 스타를 봤다고 본 게 아니듯이, 관객의 입장에서 무대 위의 배우를 얼핏 봤다고 만난 것은 아니듯이, 본질이 만나지 않으면, 영혼이 만나지 않으면, 그것은 만난 것이 아니라 장차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만남 이후에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남으로 사건은 종결되는 것이다. 한 순간에 다 만나는 사람도 있고 평생 만나도 덜 만난 사람도 있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 만나는 사람도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만나 있는 사람도 있다.
친연이 존재한다. 그것은 태초부터 존재해 왔으며 세상의 안쪽과 바깥쪽을 두로 꿰고 있다. 그것이 때때로 요동을 쳐서 세상 무대 위에 온갖 사건을 연출해낸다. 너와 나는 친연한가? 이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친연하지 않으면 만나도 반응하지 않는다. 불꽃이 튀기지 않는다. 단지 만난 척 할 뿐이다. 남들이 귀찮게 캐물을까봐. 하긴 이 세상 소풍 와서 이 세상 만나지도 못하고 그냥 간 사람이 부지기수라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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