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은 대칭이다. 세상은 음과 양, 선과 악, 강과 약, 정과 반, 공과 사,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 진보와 보수, 시작과 끝,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온갖 형태의 대칭을 이루고 있다.
대칭은 마주보고 시소를 이룬다. 이때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하나도 연동되어 같이 움직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가운데의 축이다. 대칭과 축의 관계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푸는 근원의 열쇠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축의 존재를 모른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축은 상부구조에 숨겨져 있고 운동은 하부구조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하부구조의 운동을 통해서 사물을 이해하므로 상부구조의 존재를 모른다.
바퀴는 돌아도 축은 돌지 않는다. 운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축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바퀴는 겉에서 보이는데 축은 안으로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잘 살펴보지 않으면 축의 존재를 알 수 없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상부구조에 숨어있는 축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이다. 멀고 가까움이 있다면 소실점이라는 축이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있다면 질량이라는 축이 있다. 대칭에는 반드시 축이 있다.
피아, 강약, 고저, 상하, 장단, 원근, 내외, 전후, 안팎, 음양, 남녀, 인과, 경중, 완급, 좌우, 대소, 선악, 미추, 득실과 같이 대칭을 나타내는 개념은 무수히 많다. 수백, 수천가지 대칭개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그저 대칭되어 있을 뿐 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곧 인간이 그만큼 무지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N극과 S극은 아는데 둘을 동시에 통제하는 자기장을 모른다면 모르는 거다.
축을 찾아야 한다. 음양 사이에서 빛을 찾고, 남녀 사이에서 공동체를 찾아야 한다.
뉴턴이 F=MA를 찾아낸 것은 곧 질량과 속도 사이에서 힘이라는 축을 찾아낸 것이다. 원래 없던 개념을 뉴턴이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대칭된 어휘들에서 축을 찾아내야 비로소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식이란 모두 대칭된 두 항 사이의 축이다. 1 2=3이라면 3은 1과 2 사이의 축이다. 어떤 문제의 답을 안다는 것은 축을 안다는 것이다. 왜? 축을 모르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축을 장악하면 혼자서 대칭의 좌우 양측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다. 1을 투입하여 2를 얻을 수 있다. 거기서 효율이 얻어진다. 그 효율이 세상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된다. 비로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씨름선수는 상대의 무게중심, 곧 축을 장악함으로써 승리한다. 야구선수는 상체와 하체의 중심축을 제어함으로써 효과적인 피칭을 할 수 있다. 타자 역시 방망이 중심에 공을 맞추어 축을 성립시킨다.
음악가는 고저와 장단 속에서 리듬이라는 축을 찾고, 화가는 원근과 명암 사이에서 구도라는 축을 찾고, 소설가 역시 주인공과 악역의 대결에서 주제라는 축을 찾아냄으로써 작품을 구성할 수 있다.
정치는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축을 찾는 경쟁이다. 경제 역시 수요와 공급 사이에서 제어하는 축을 찾는 게임이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다. 축을 찾아냄으로써 비로소 문제가 풀리게 된다.
축과 두 대칭의 관계를 비례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이 공식이다. 그 공식을 지식으로 삼아 우리는 세상을 정복해 나간다. 곧 지식의 탄생이다. 이는 수학의 방법이지만 실은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잘 살펴보면 인간의 몸도 축과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몸통이 축이면 손발은 대칭이다. 허리가 축이면 왼발과 오른발이 대칭이다. 머리가 축이면 몸과 마음이 역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때 항상 축이 대칭의 위에 올라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차원 위에 있다. 상부구조에 속해 있으면서 하부구조를 지배한다. 머리가 몸과 마음을 일 시킨다. 허리가 왼발과 오른발을 교대로 부려먹는다.
인간이 만든 도구들도 이 원리를 따르고 있다. 컴퍼스는 두 다리가 대칭을 이루었는데 위에 손잡이가 축을 이루고 있다. 역시 시소와 같은 모양이다. 천칭 역시 가운데 축이 좌우의 두 접시를 통제한다.
디딜방아 역시 공이부와 다리부가 대칭을 이루었는데 가운데 굴대가 있다. 막대기는 축이 없을 것 같지만 사람이 그 막대기를 쥘때 축이 성립된다. 돌멩이는 축이 없을듯 하지만 지구의 중력을 버티는 축이 있다.
돌멩이를 공중에 던지면 무게중심, 운동의 중심, 힘의 중심형태로 축이 성립한다. 자연이 빚은 모든 사물의 모습도 그러하다. 나무가 두 팔을 벌리고 대칭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산과 강도 대칭을 이루었다.
산과 강의 대칭에는 육지가 있고, 육지와 바다의 대칭에는 지구가 있고, 하늘과 땅의 대칭에는 세상이 있다. 빛과 어둠, 고기압과 저기압, 더위와 추위, 등 모든 것이 대칭과 대칭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대칭은 알려져 있지만 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축을 알아내면 학문이 만들어진다. 그냥 바람이 분다고 하면 축을 찾지 못한 것이다. 기압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찾아야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축과 대칭의 관계가 질서다. 질서는 곧 차례다. 축이 먼저고 대칭이 따라간다. 축이 앞에서 바퀴를 이끈다. 상하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에는 고유한 질서가 있다. 하나의 질서가 하나의 존재다.
축이 대칭을 장악하고 있는 사정을 권(權)이라고 한다. 권은 원래 저울추를 의미한다. 대칭의 시소는 천칭저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세상은 권리, 인권, 권력, 권위, 권한과 같은 권의 집합이다.
하나의 권이 하나의 존재다. 동물은 권이 없으므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 동물에게는 투표권도 참정권도 인권도 소유권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자기 안에 권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나의 내부에 시소가 있고 그 시소를 지배하는 축을 장악해야 한다. 반면 외부에서 그것을 찾으면 종속되고 만다. 다른 사람의 권에 빌붙어 있으면 위태롭기 짝이 없다. 타자에게 지배되기 때문이다.
친일파와 친미파, 친서구파, 친중파는 모두 외부에서 권을 찾는다. 그 경우 치이고 만다. 홀리고 만다. 이용되고 만다. 버려지고 만다. 저울의 대칭이 제 힘으로 움직이면 축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때 축은 자기보호를 위해 대칭의 두 날개 중 한 쪽을 잘라버린다. 축은 대칭을 통제할 수 있지만 대칭은 축을 통제할 수 없으므로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약탈당하고 착취당하고 이용당한다.
자기만의 축, 자기만의 질서를 가져야 한다. 음악가는 그 축을 찾았을 때 작곡할 수 있고, 화가는 그 자기만의 조형적 질서를 찾았을 때 그릴 수 있고, 소설가는 그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완성했을 때 작품을 쓸 수 있다. 그것이 없으면 모방에 불과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축을 찾기는 쉽다. 나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다면 가운데 굵은 기둥줄기가 축이다. 움직이는 것에서 축을 찾기는 어렵다. 화살의 머리와 꼬리 중에서 축은 어디일까? 방향성이다.
화살의 중간부분을 축으로 착각하지만 방향성이 축이다. 진보와 보수 중에서 중도파가 축일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실은 진보의 방향성이 축이다. 움직이는 것의 축을 찾아낼 때 참다운 지식이 된다.
물체의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 가운데 있지 않다. 중력 때문이다. 운동하는 물체의 중심은 부피의 중심보다 앞쪽에 있다. 진보쪽에 역사의 축이 있다. 보수는 축이 없으므로 진보의 실패를 역이용한다.
진보는 축이 있으므로 스스로 기술을 걸 수 있지만 보수는 축이 없으므로 되치기만 노린다. 그러므로 보수가 권력을 잡으면 재미가 없다. 이때 진보는 권력이 없고 보수는 기술이 없어서 둘 다 되치기만 노리고 선제공격을 않으니 씨름이 안 된다. 샅바씨름만 하고 있는 거다.
이 정도면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 알 수 있다. 세상이 대칭과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축이 보이지 않는 상부구조에 감추어져 있고, 그 감추어져 있는 축을 찾아서 제어할 때 문제는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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