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답과 내부의 답
“답은 언제나 외부에 있다.” “반드시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모순된다. 둘 다 필자가 여러차례 반복한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질문하는 분이 있었는데 하긴 헷갈릴 만도 하다.
질은 외부에서 답을 찾고, 입자는 내부에서 답을 찾는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한다. 질은 외부와 결합하고 입자는 내부적으로 독립한다. 구단주는 외부에서 히딩크 감독을 데려와야 하고, 감독은주어진 자원을 가지고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 질 – 구단주 (외부)
◎ 입자 – 감독 (내부)
넥센은 구단주가 강하다. 이장석 사장은 프로야구 전 경기를 직관한다고 한다. 유일하게 야구를 아는 구단주다. 김성근은 내부에서 답을 내는 감독이다. 외부의 투자나 지원 없이도 상당한 실적을 낸다.
장기전은 외부에서 답을 찾고 단기전은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대선후보를 정하기 전에는 외부를 보고, 후보가 나서면 내부를 보아야 한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는 외부에서 답을 찾고, 일단 시합이 시작되면 외부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사상가의 면모를 버리고 철저하게 선거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를 하든 야구를 하든 같다. 초반에는 외부를 잘 엮어내는 사상가가 뜨고 막판에는 내부를 잘 제어하는 기술자가 뜬다. 초반에는 바람이 일어나도록 선동을 잘 해야 하고 막판에는 조직을 잘 챙겨야 한다.
외부의 바람만으로 이기겠다거나, 혹은 내부의 조직만으로 이기겠다면 곤란하다. 그러나 실정은 어떤가? 이미 시합이 시작되었는데도, 이미 전투에 돌입했는데도 외부에서의 기적을 바라는 일은 흔히 있다.
홍경래는 ‘청나라 대군이 의주에 집결하고 있다’고 떠들며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다가 망했다. 광주항쟁 때도 미국항모가 오고 있다는 식의 말이 떠돌았다. 초기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서양선교사의 도움을 꾀하다가 실패했다.
독립군은 한때 레닌의 200만 루불을 기다리다가 서로 삥땅했다니 하며 분열했다.그루지야 등에서도 미국의 지원을 믿고 겁대가리없이 러시아에 대들다가 피떡이 되게 얻어터지기만 했다.
장개석이나 베트남 역시 외부의 지원에 목을 매다가 패망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이나 팔레스타인도 비슷하다.
동학농민항쟁이 실패한 이유는 외부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철저히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양반집단은 물론 부유한 상인들의 협조도 받지 못했다. 동학군이든 홍경래군이든 포수, 무당, 승려, 광부, 농민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일본은 동도서기 운운하며 서양의 기술을 빌릴 뿐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갑자기 유교주의 운동을 벌였다. 중국 역시 중체서용 운운하며 중국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베끼자는 소극적인 책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망했다. 반대로 문화혁명기에는 중국의 전통을 전부 때려부수었다.
한국은 어떤가? 친일, 친미파에 친서구파로 전부 외국에 기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실패한다.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터넷-스마트 시대는 외부에서 들어온 충격이다.
초기 외부와 연결한 다음에는 반드시 내부에 구심점을 세워야 한다. 내부에서 대체재를 제시해야 한다. 한국이 일어서려면 한국 안에서 참된 철학이 나와야 한다. 외국철학은 단지 기존의 잘못된 것을 때려부수는데서 끝내야 한다.
개화기로 돌아가자.
◎ 실패 - 서양오랑캐를 물리치고 조선왕조를 받들자.
◎ 실패 –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죄다 서양식으로 바꾸자.
◎ 실패 – 서양오랑캐를 이용하여 일본의 전통을 회복하자.
◎ 실패 – 기술은 서양것을 쓰고 정신은 중국것을 지키자.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망한다.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내부를 지키려 해도 망하고, 외부의 것을 추종하고 외부의 방식으로 바꾸어도 망하고 이를 적당히 절충해도 망한다. 어느 쪽이든 결말은 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정답은? 외부의 것으로 내부를 치고, 내부에서 혁신한 다음 다시 외부로 전파해야 한다. 무엇인가? 서양기술을 들여와서 조선왕조를 타도하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구축한 다음, 다시 이를 외부에 전파해야 한다. 물론 이건 매우 어려운 목표다.
지금까지 우리는 외부의 것을 들여와서 내부를 치는데 이용하려고만 했다. 혹은 줏대없이 외국을 추종하려고만 했다. 혹은 서양것을 이용하여 내부를 치고 다시 복고주의로 되돌아가려 했다. 이들은 개혁에 일정한 한계를 둔 것이다. 혹은 기술은 서양식으로 가고 정신은 동양식을 지키는 식으로 절충하려 했다.
◎ 국수주의 실패 – 서양을 물리치고 우리 것을 지키세.
◎ 사대주의 실패 – 서양 것을 받아들여 우리도 서구인이 되세.
◎ 부분개혁 실패 – 서양 총으로 막부를 치고 일본 전통을 회복하세.
◎ 절충주의 실패 – 기술은 서양 것을 쓰고, 정신은 중국 것을 쓰세.
정답은 서양의 기술로 우리의 상부구조를 치고, 다시 우리 안에서 우리 전통에 기반을 둔 새로운 우리의 질서를 만들어내야 하며, 그것은 복고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며 과거로 퇴행하는 식이면 실패할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스탈린은 내부를 주장하여 외부를 바라보던 트로츠키를 제압했고, 모택동은 내부에서 뭔가 수를 낸답시고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승리했다.
혁명이든 개혁이든 초기 단계에서는 외부의 힘을 끌어들여야 하지만 일정한 단계가 지나면 반드시 내부의 힘으로 바꿔야 한다. 계속 바깥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외교에는 귀신이라는 이승만처럼 망하고 만다.
햇볕정책도 마찬가지다. 외부의 북한과 손을 잡는 것은 가하나 계속 북한을 쳐다보고 있으면 망한다. 이는 이명박도 마찬가지다. 북한과 마찰하는 것도 북한을 이용하는 거다. 계속 북한을 이용하여 수를 내려고 하면 망한다.
왜 NL이 PD를 이겼는가? NL은 우리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흥했고, PD는 서구의 힘을 빌리려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기존의 체제를 때려부수는 데는 서구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는 철저하게 우리의 정신으로 시작해야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철학과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때 복고주의로의 퇴행은 곤란하다. 그러나 현장을 보면 개량한복 입은 진보들이 복고주의로 가고 있다. 개량한복 입어도 좋고, 풍물 배워도 좋고, 귀농운동 해도 좋다. 신토불이도 좋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답을 찾은게 아니다. 그건 헛짓거리다.
황토집 짓고, 개량한복 입고, 풍물이나 치며, 청국장 먹으면 그게 진보냐? 뻘짓이다. 그런데 왜?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외부에서 답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근데 말이다. 우리 안에서 답을 찾고자 하니 주사파가 준동한다. 따지자면 주사파 역시 안에서 답을 찾은게 아니다. 그냥 뻘짓이다. 우리 안에서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한다는 NL의 큰 방향성은 맞지만, 북한과의 연결은 그냥 뻘짓이다. 북한 역시 외부는 외부이기 때문이다.
참된 진보는 외부의 것을 들여와서 기존의 구체제를 타격하고, 다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사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복고주의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참된 지도자와 참된 사상이 나와야 한다. 김구 선생이 그러한 모색을 한 사람이다. 한옥 짓고 한복 입는다고 우리의 얼은 아니다. 그냥 뻘짓이다. 한옥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옥의 진짜 가치를 아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이문열도 고래등같은 한옥을 지어놓고 에헴하고 있더라만 그냥 뻘짓이다. 우리 안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세계를 다 먹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청국장이나 순두부찌개 따위로 서양인들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띠며 그것으로 서구인에게 인정받으려 한다면 곤란하다. 우리 안에서 세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와 문화를 개척해야 한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서구가 중심인 상태에서 우리가 그 주변을 차지하며 구색맞추기로 가면 곤란하다. 변두리즘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필자가 말하는 구조와 깨달음은 세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퍼즐조각이다. 레고블럭은 세계 어느나라 아이든 거부하지 않는다. 반면 삼성이 좋아하는 파란색은 blue가 ‘우울하다’는 뜻을 가진다는 서양의 기초상식조차 모르는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세계를 리드할 수 없다.
서양을 배우고, 서양을 알고, 서양의 입맛에 맞추어서는 2등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 진정 앞서려면 무엇보다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파란색은 남자색깔이다. 삼성은 벌써 세계의 반을 버리고 시작하는 거다. 인간에 대한 무지다.
우리와 서양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인간으로 올라서야 한다. 서양을 이용하려 해도 안되고, 서양과 맞싸우려 해도 안 되고, 오직 인간으로 올라가서 탑 포지션을 차지해야 한다. 그것이 이기는 길이다.
인류가 원하는건 존엄이다. 존엄이 보편성이다. 우리가 철저하게 존엄을 추구할 때 서구든 동양이든 떠나 세계 모두가 우리를 존경하게 된다. 그럴 때 보편성을 얻고 그럴 때 우리 안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질서가 찾아지며 그것이 답이다.
답은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 안은 이미 세계이며 인류여야 한다. 동양이나 한국을 주장하면 곤란하다. 우리가 세계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세계를 아우를 수 없다. 우리가 인류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인류를 아우를 수 없다.
“개고기 먹으면 어때! 흥. 먹는거 가지고 지럴이여.”
최후의 승자는 좋은 친구를 가진 사람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가까이 있지 않아도 멀리서 지켜봐주는 일천만개의 뜨거운 가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통은 긴밀해지고 에너지는 강렬해지는 그런 마음.
그 마음은 패션과 서재와 자동차와 건물의 디자인에 반영됩니다.
서재에 빈 찻잔이 놓여있지 않다면그 마음은 사라집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처럼 졸부의 화려한 건물은 그 손님이 발을 돌리게 만듭니다.
거들먹거리며 에쿠스 타고 온 손님은 문전에서 쫓겨납니다.
작더라도 아이디어와 유머가 있어야 합니다.
일본처럼 까다롭게 격식을 따지며 감시하는 눈길도 곤란합니다.
(일본의 다도는 원래 봉건 영주에게 숨은 인재를 추천하는 용도로 일종의 면접시험임. 벌벌 떨며 차 마시는 것임. 손님이 어떻게 마시는지 주인은 뒤에서 은밀히 감시함.)
중국처럼 시끌벅적한 것도 곤란입니다.
조용하고 은근하며 당장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우연히 알게되어 그때를 떠올리고
슬며시 미소짓게 되는 그것이 진짜입니다.
http://gujor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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