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두려워 하는지 잘 모른다. 실감하지 못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며 사는듯 하다.
겁이 없는게 아니다. 겁이 나는 것은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혹은 거부해야 할지 판단을 못하기 때문이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내일 만나야 한다면 오늘부터 짜증이 나고 속이 불편해진다.
애매한 상태가 문제다. 만나지 않기로 결정해 버리면 된다. 깨달은 스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속 편하게 살기는 쉽다. 이 답답한 도시를 이탈해 버리면 된다. 죽음의 두려움 또한 같다.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 그것을 해체해 버리면 된다. 두려운 이유는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암환자에게 암에 걸린 사실을 알려주는게 좋을까 아니면 감추는게 좋을까?
알려주는게 좋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남은 몇 개월의 삶을 즐긴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에 빠져 매우 괴로워하며 이상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위장암에 걸린 울랄라 세션 임윤택을 의심하여 악플을 다는 사람이 있다. 사진 보면 모르겠나? 비쩍 골았잖은가? 말년의 스티브 잡스나 말년의 최동원도 사진에 실상이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임윤택도 체중이 줄었다. 보고도 못 믿는 이유는 편견 때문이다. 암환자는 극도의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 이불 뒤집어쓰고 울거라는 편견 말이다. 스티브 잡스도 최동원도 그렇지 않았다.
암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때 오히려 두려움이 크다. 무엇인가? 두려움은 뇌가 어떤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다. 눈 감고 걸어본 일이 있는가? 넓은 운동장에서 시험하는 것이 좋다.
스무걸음 정도는 쉽게 갈 수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딱 스무걸음 정도에서 앞에 벽이 막아선 듯 답답해진다. 걸음을 내딛기 어렵다. 억지로 몇 걸음 더 갈 수 있지만 그거 잘 안 된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다분히 물리적 현상이다. 뇌가 정보를 요구하는데 눈이 정보를 주지 못하니까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뇌와 눈과 신체는 연결되어 있다. 공감각 공행동이다.
진화 역시 공진화다. 신체의 한 부분이 바뀌면 연동된 부분이 전부 바뀐다. 모듈 단위로 작동하기 때문이며 뇌와 눈과 신체가 하나의 모듈이기 때문이다. 뇌의 사정이 몸에 그대로 나타난다.
장님은 정보가 없어도 잘 걷는다. 장님은 뇌가 정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뇌에 정보를 주면 된다. 어떻게? 명상하면 된다. 어떤 명상을? 죽음의 상부구조를!
명상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한다. 죽음은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려 해도 생각할 내용이 없다. 왜?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어보면 된다.
죽음을 무수히 지켜본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이 적을 것이다. 큰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어본 사람도 그러하다. 나는 태초를 생각한다. 우주가 처음 탄생했을 때다.
우리우주의 나이 150억년은 인간이 관측가능한 범위일 뿐 실제로는 훨씬 크다. 150억 광년 곱하기 150억일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다시 150억을 곱해야 할지도 모른다. 도무지 끝이 없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나?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물질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럴 때 신은 외롭다. 진짜 무서워할 이는 신이다. 당신이 신이라고 생각하자. 적멸.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신의 무서움을 걱정하자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졌다. 뇌가 정보를 요구하는데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맞는 정보인지 틀린 정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꼬맹이 때다. 겨울 해는 짧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달도 없고 별도 없는 흐린 날이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판에 저 멀리 희미한 마을의 불빛을 보고 대략 방향을 찾아 가는 것이다.
늘 다니던 길이라 익숙하다. 위치와 방향은 안다. 그러나 더듬다시피 해야 한다. 무서워서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땅을 구르면 잠시 두려움이 사라진다.
뇌가 정보를 요구하는데 아무 정보나 주면 된다. 두려움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죽어본 사람은 없다.
엄밀하게 따지면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없다. 죽어본 적이 없으니 그것은 사실이지 죽음이 아니다. 이는 언어의 오류다. 죽음에 대응하기에 실패한데 따른 두려움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든 대응해야 하는데 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두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대응하면 된다. 두려움은 어떻든 대응하라는 뇌의 요구이다.
두려움은 뇌가 자해를 하는 것이다. 이유는 동료를 부르기 위해서다. 인간은 공동체에 의존하는 동물이다. 어떤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면 비명을 질러 동료를 부른다. 따라서 동료가 와줘야 한다.
종교인은 종교단체의 형태로 동료를 공급한다. 그러므로 죽음의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러나 비용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멍청하다. 비용대비 효과로 보면 종교는 그다지 권할 일이 못된다.
답은 상부구조다. 나보다 더 두려운 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나보다 더 두려운 이는 신이다. 나는 태어날때부터 집도 있고, 부모도 있고, 산도 있고, 들도 있고 하늘도 있었다. 두렵지 않다.
신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철저한 무, 그것은 커다란 두려움이다. 설사 신이 세상을 창조했대서 피조물인 인간이 말동무나 하며 놀아준다 해서 위안이 될까? 신 입장에서 그건 더 멍청한 거다.
두려운 이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없다면 꼬마는 두렵다. 정확하게는 엄마의 부재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데도 태연하게 노는 자신이 매우 어색한 것이다.
왠지 엄마를 찾아나서야 할 것만 같다.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으므로 당연히 뭐든 해야하는 것이다. 그럴 때 두렵다. 꼬마는 울음을 터뜨린다. 두려움을 받아들인 거다. 왜? 어색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없는 중대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놀이를 계속하는 자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선택이다. 꼬마는 두려움을 선택했다. 그 선택을 바꾸면 된다.
태연하게 논다. 그런데 재미가 없다. 도무지 놀이에 집중되지 않는다. 놀이가 어색하다. 놀려고 해도 놀 수가 없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제 뭣하지? 주저앉아 사방을 두리번 거린다.
마당에는 강아지도 있고 암닭도 있다. 강아지와 장난을 쳐본다. 닭을 쫓아본다. 그런데 어색하다. 이건 아니다 싶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공포가 엄습한다. 정말 무섭다. 어릴때의 경험이다.
내가 무서워한 이유는 하나다. 무서워하지 않고 다른 것을 하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까짓거 무섭긴 뭐가 무섭단 말야.” 하고 마음을 다잡아먹는데 실제로 그게 잘 안되더라.
무서워 하는게 자연스럽고 편하더라. 뭔가 앞뒤가 맞고, 호응이 되고, 아귀가 맞아떨어지고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다. 무서워하는게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무서워 한다. 고추가 맵지만 자연스럽다.
나는 매운 고추를 잘 먹지만 그게 안 매운게 아니다. 분명 맵다. 그런데 또 손이 간다. 먹는다. 자연스럽다. 두려워 하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두려워 하는게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울할 때는 그냥 우울해 해버린다. 그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슬플때는 슬프하는게 맞고 즐거울 때는 즐거워하는게 맞다. 우울할 때 억지로 웃을 수 있지만 잠시 뿐이다. 싱거운 일이다.
곧 불편해진다. 부조화다. 다시 우울모드로 들어가 버린다. 우울모드를 바꾸려면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그 현장을 완전히 이탈해야 한다. 만날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기분전환이 된다.
두려움모드도 마찬가지다. 그 상황에서는 두려워 하는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두려워 하는 것이며 그렇다면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우울할 때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명량해진다.
슬픈 장례식장에서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회복된다. 이는 물리적인 변화다. 확실히 극복된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며 그것은 상부구조의 건설이다.
우울이나 두려움은 내부의 사정이며 외부와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극복이 가능한 것이며 외부의 개입은 상부구조의 건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반드시 윗선의 개입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인간의 윗선은 공동체고 신이다. 신이 사장이면 인간은 종업원이다. 걱정해야 할 사람은 사장이지 종업원이 아니다다. 직원은 그냥 연봉받고 일하면 된다. 걱정은 CEO에게 떠넘기면 된다.
주인이 걱정할 일을 노예가 걱정한다면 오지랖이 넓은 것이다. 신이 내 대신 죽음을 두려워해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레벨에서 일어난 문제가 아니다.
세포가 죽어도 생명은 죽지 않는다. 개인이 죽어도 인류는 생존해 있다. 사람이 죽어도 우주는 죽지 않는다. 우주가 죽어도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이 죽지 않는데 무엇이 두렵다는 말인가?
죽음이라는 손님이 불시에 방문하더라도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올 것이 이제 왔구나.’ 할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결코 한 인간 개인의 레벨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싸움은 개인 단위에서 일어나지만 전쟁은 국가 단위에서만 일어난다. 죽음은 우주 단위를 넘어 신 단위에서 일어난다.
죽음의 두려움은 허무의 두려움이며 그 허무는 개인 단위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생물학적 사망이 두려운건 분명 아니다. 생물학적 사망이 두렵다면 임윤택은 활동할 수 없다.
인간이 진짜 두려워 하는 것은 허무다. 무의미다. 그것은 어색한 것이며,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부조화 한 것이며, 따돌림 당하는 것이며, 무리에서 배척되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생물학적 사망을 두려워 하는게 아니라 그 형태로 인간의 무리에서 배척당하며 그 결과로 자신의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두려움이란 결국 자기부정이며 그것을 느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긍정하면 된다. 공동체에서 배척당하지 않으면 된다. 자연스러우면 된다. 그 결정은 상부구조에서 일어난다.
우주는 크고 인간은 티끌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오버다. 존재는 허무하고 신은 티끌같은 존재이며 인간은 티끌도 못 되는 존재이다. 세상이 큰 도서관이면 인간은 그 많은 책들 중의 한 페이지다.
페이지는 넘겨지지만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있다. 인간은 죽지 않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페이지는 넘어가도 글자는 그곳에 있다. 책은 그대로 있고 도서관은 그대로 있다. 신은 그대로 있다.
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사고의 지평을 더 넓혀보기 바란다. 보통 존재를 원형으로 삼고, 물질을 출발점으로 삼고, 사물을 대응할 상대로 삼아 삶이라는 드라마로 환경에 대응한다.
착각이다. 이는 매우 유치한 생각이다. 존재는 원형이 아니다. 물질은 출발점이 아니다. 사물은 당신의 상대가 아니다. 당신의 눈에 보이는 환경은 당신의 활약할 무대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더 크게 생각해야 한다. 물질 이전에 에너지가 있고 그 에너지가 작동할 베이스가 있다. 그것은 존재를 넘어선다. 존재는 시공간 좌표의 형태로 규정된 것이다. 갇혀 있는 것이다.
갇힌 것을 풀고 닫힌 것을 열어야 한다. 사유의 층위를 높여야 한다. 잘못된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단계를 가지며 단계의 관문에서 하나가 된다.
공동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다른 것이 하나의 단일체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관문을 만났을 때다. 평소에는 흩어져 있다. 밤이 되면 양떼가 모여 우리에 들어가듯 관문을 들어선다.
존재는 그냥 널부러져 있다. 사람들은 그냥 흩어져 산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 국가의 존재가 포착된다. 하나의 단일체가 드러난다. 사건은 그 단일체를 상부구조로 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단일체를 찾으라는 뇌의 명령이다. 국가 단위의 사건이 일어나야 국가의 존재가 포착되듯이 높은 단위의 사건이 일어나야 상부구조가 포착된다. 그 높은 구조를 찾을 때 두려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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