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미래 여자가 결정한다’편부터 이어지는 글은 구조론의 관점에서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어렵고 심오한 내용입니다. 이거 술술 알아먹으면 구조론의 달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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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류는 지류를 따라가지 않는다. 미국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프랑스는 결코 따라가지 않는다. 영국제 밀크초콜렛이 프랑스제 다크초콜렛보다 맛있다 해도 프랑스인은 결코 밀크초콜렛을 먹지 않는다.
기무치가 김치보다 맛있다 해도 한국인은 기무치를 먹지 않는다. 한국 전자제품이 일본 전자제품보다 뛰어나도 일본인은 한국산을 사지 않는다. 햄버거가 아무리 맛있어도 프랑스인은 햄버거 먹지 않는다.
미국의 햄버거는 프랑스의 샌드위치에서 나왔다. 족보를 따지면 샌드위치가 햄버거보다 항렬이 높으므로 프랑스인은 햄버거를 안 먹는다. 파리에 맥도널드가 즐비하지만 외국 관광객들만 북적거린다.
미국인이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해도 절대 한국을 따라올 수 없다. 구조적으로 안 되게 되어 있다. 한국인은 원래 채식을 하고 미국인은 원래 육식을 하기 때문이다. 구조의 결이 다르다.
Mireille Guiliano의 프랑스 여자는 살찌지 않는다(French Women Don’t Get Fat)를 참고할 수 있다. 시스템의 문제다. 문화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며 결단코 역류는 없다. 방향성을 포착하라.
부분적으로는 가능하다. 일본인 중에 한국산 스마트폰 사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현대차를 사는 괴상한 일본인도 있다. 재일교포를 빼고 그 숫자가 천 명을 넘어가는지는 알 수 없다. 의미는 없다.
중국인들도 한국식 짜장면을 먹을 수는 있다. 그런데 웃는다. 일부 있다 해도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며 구조론의 의사결정원리로 보면 중국인은 한국식 짜장면을 안 먹는다. 만약 있다면 해프닝이다.
기무치를 한국에 역수출 한다? 짜장면을 중국에 역수출 한다? 한국식 인스턴트라면을 일본에 역수출한다? 넌센스다. 약간의 성공을 거둘 수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아닌건 아닌 거다. 정신차려!
구조론이다. 구조의 센터는 수레의 바퀴축과 같다. 바퀴축은 바퀴살을 거느리고 있다. 전부 맞물려서 연동되어 있다. 축에서 바퀴살로 갈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없다. 살은 축을 치지 못한다.
남자 미용사가 여자 머리를 자른다고 해서, 혹은 남자 디자이너가 여자 옷을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남자의 권력은 아니다. 여자의 기호와 수요에 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의 권력에 속한다.
박근혜가 당선된다고 해서 여성 정치의 의미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박정희의 세습에 불과하다. 그건 원래 안 쳐주는 거다. 박정희 가케무샤에 지나지 않는다. 짝퉁이요 가짜요 해프닝이다.
여성정치는 진보정당에서 나와야 의미가 있다. 왜인가? 구조론의 소재, 기능, 성능, 효능, 양식 중에서 두 번째 기능은 바퀴축이 바퀴살로 가지를 치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구조의 결이 나온다.
이 블로그를 보면 무려 20가지를 써놨는데 하나의 바퀴축이 20개의 바퀴살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모두 연계되어 있다. 하나가 바뀌면 다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구조적으로 안 되는 거다.
스타일은 steel에서 나왔다. 쇠처럼 잘 안 바뀌니까 스타일이다. 그게 바뀌면 어찌 스타일이겠는가? 안 바뀌니까 스타일이다. 결따라 가고 족보따라 가는 것이며 역류는 없다. 그래서 스타일이다.
미국여성들이 요가를 하고 화장을 하고 어떻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바퀴살 한 개 바꾸는 거다. 예의 20가지 사항 중에서 한 두 개를 미국이 따라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다.
전부 다 하거나 아니면 전부 다 포기하거나. 이것이 스타일의 법칙이다. 그래서 스타일은 무서운 것이다. 만점 아니면 빵점이고 중간점수는 없다.
몽골 노동자의 근면성은 잘 알려져 있다. 어떤 몽골 노동자가 한국의 공장에 취업했다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농땡이를 친 사실이 알려지면 조직에서 형님이 찾아와서 손을 봐준다고 한다.
흉노 선우 묵특과 징기스칸의 엄격한 군율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거 무려 2000년 묵은 스타일이다. 2천년간 안 바뀐 몽골 스타일이 하루 아침에 바뀌겠냐고? 유태인이 변하겠냐고?
퇴계의 비뚤어진 수양론이 아직도 이어져서 주사파의 품성론으로 발전하고 있다. 뿌리가 있고 계속 이어진다. 500년 묵은 스타일이다. 이석기가 변하겠냐고? 김재연이 정신차리겠냐고? 안 된다.
아랍의 명예살인만 해도 그렇다. 좌파 지식인이 계몽하면 하루만에 바뀔거 같지? 천만에. 아랍은 수로를 장악한 자가 권력자다. 아랍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흥부처럼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한다.
흥부전략으로 24명의 아들을 낳아서 마을의 과반수를 장악하고 수로를 지배하면 권력을 오로지 하는 거다. 한국은? 천수답에 비 오면 농사짓는다. 아랍은? 수로관리자에게 밉보이면 끝이다.
무엇인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에서 이어진 수로라는 스무개의 바퀴살이 지배하고 있다. 아랍은 마을 장정들이 개인의 가정사에 개입한다. 말 안들으면 수로를 끊어버린다. 굶어죽는다.
이러한 본질이 걸려있는데 아랍이 무려 변하겠냐고? 아랍인이 문득 정신을 차려서 명예살인을 그만두고 합리적으로 행동하겠냐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약간은 가능하다.
스타일은 무서운 것이다. 한번 세팅되면 1만년도 간다. 중국도 초기 세팅을 잘못해서 저렇게 되어버린 거. 중국에도 된장녀 있고, 요가하는 사람 있고, 다이어트 하고 할건 다 한다. 안 된다.
중국은 변하면 15억이 변해야 하므로 15억개의 바퀴살을 가진 수레바퀴와 같아서 설사 중국의 어느 지역의 몇몇 선각자가 지도를 해도 그거 잘 안 된다. 독일인들은 프랑스 안 따라간다.
태블릿이 처음 생길 때 필자가 휴대용 만능컴퓨터(태블릿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는 7인치 이하 사이즈여야 한다고 했는데 최근에 그런 뉴스가 많이 나오고 있다. 아이패드는 너무 크다.
휴대성 떨어지면 기능의 혁신이 불가능해진다. 새로운 바퀴살이 뻗어나가지 않는다. 무엇인가? 갤럭시노트나 킨들과 같은 추가적인 기능의 혁신이 제약받는다. 그래서 미래의 대세는 7인치 이하다.
단순히 프랑스 여자가 날씬하다는 게 문제의 본질은 아니고 20가지 사정이 하나의 문화로 엮여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햄버거 먹고 헬스클럽 간다? 넌센스다. 전부 아니면 전무다. 중간은 없다.
우리나라도 헬스클럽 다니는 아줌마들 많은데 그건 아니다. 안 쳐주는 거다. 아줌마들은 헬스강사 말을 듣지 않는다. 무조건 러닝머신만 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살은 안 빠지고 물만 빠지는 수 있다.
아줌마들의 헬스클럽 출입은 찜질방 이용과 본질에서 같다. 그것은 다이어트가 아닌 것이다. 왜? 예의 20가지 원칙을 지키지 않고 그 중에서 하나 혹은 둘만 빼먹으려들기 때문이다. 표준이 아니다.
물로 러닝머신도 열심히 하면 살은 빠지겠지만 태도가 글러먹었다. 뭐만 하겠다는 얌체생각을 버려야 한다.요요현상 온다. 체질이 안 바뀌고 습관도 안 바뀌기 때문이다. 다 바꾸어야 바뀐다.
삼성이 갤럭시 노트로 기능의 혁신을 했듯이 프랑스 요리는 20가지 지류로 새끼를 치는 것이다. 미국은 그게 없어서 안 된다. 한번 뚱뚱해지면 날씬해지지 못한다. 역류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 박근혜는 아닌가? 예의 스무가지 루트가 없다. 센터에 연결되는 스무가지 바퀴살이 없다. 표준이 아니므로 아닌 거다. 박근혜는 보수의 두 축인 반공주의와 탐욕주의 중에서 하나가 빠졌다.
이명박은 부동산 투기에 편승한 탐욕주의 반공주의다. 박근혜는 탐욕주의를 빼고 반공주의만 남겼기에 바퀴살이 떨어져 나갔으며 이건 아줌마들이 러닝머신 하면서 헬스 했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그건 사실 안 한거다. 고분고분하게 강사 말을 듣고 웨이트를 해야 진짜다. 무엇인가? 완전성이다. 스무개의 바퀴살이 모두 갖추어졌을 때 완전하다. 그래야 표준이 만들어지고 바퀴살이 나온다.
프랑스 등에서 달라이라마 붐이 불고 불교신도가 늘고 있지만 이건 가짜다. 라마교는 스무개의 바퀴살이 없다. 표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일본을 무시하지만 프랑스 등에서 일본의 파워는 세다.
프랑스인은 거의 다 문화적으로 친일파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일본의 젠스타일이 한국에서 가져간 가짜라는 것이다. 기무치다. 지류는 절대 본류를 이기지 못한다. 미학적 표준이 될 수 없다.
한국 스타일이 아직 국제사회에 소개되지 않아서 그러할 뿐 본게임 시작되면 금방 달라진다. 조만간 표준의 문제가 제기되는 거다. 요즘은 한국인들도 아메리카노 안 마시고 프랑스식으로 바꾼다.
한국인들이 처음 햄버거에 맛을 들인 다음에는 프랑스식 샌드위치로 바꾼다. 밀크초콜릿에 맛을 들인 다음에는 다크초콜릿으로 바꾼다. 외국인들에게 김치를 팔려면 먼저 기무치로 유인한 다음 김치로 바꾸는 전략을 써도 된다.
그러다가 기무치만 돕는거 아니냐고? 결국 본류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스무개의 바퀴살 때문이다. 김치가 더 잠재적 확장성이 크다. 더 많은 다양한 메뉴와 결합이 된다. 기무치는 맛뵈기다.
왜? 완전성의 문제, 표준의 문제 때문에. 지류는 스무개의 바퀴살이 없어서 응용력이 없고 호환성이 떨어진다. 라마교 신앙하는 프랑스인이 한국의 선불교를 제대로 접하면 태도를 바꾼다.
한국의 선불교는 미학원리상 최종버전이기 때문이다. 라마교는 초보자용이다. 요즘 아웃도어가 유행인데 3만원짜리 그늘막텐트만 사려다가 결국은 300만원짜리 풀세트를 사게 되는 것과 같다.
한국의 선종불교에는 도교 불교 유교의 정수가 합쳐져 있다. 한국인의 복식과 건축과 문화와 한류에 녹아들어가 있다. 그만큼 어려우므로 처음에는 보급이 느리다. 한국 안에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는 ‘프랑스 요리 골치아파’ 하고 간편한 햄버거 찾다가 결국은 ‘햄버거 유치해’ 하면서 프랑스 요리로 바꾸듯이 프랑스인들도 처음에는 환생에 홀려서 라마교를 공부하다가, 결국 거기서 만족을 못하고 진도를 더 나가서 한국의 선종불교를 배우게 된다.
왜? 라마교로 할 수 있는 게임이 없거던. 오리지날을 따라가야 결국 자신이 ABCD의 A가 된다. 처음부터 복잡한 것을 가르치면 신도가 늘지 않으므로 처음에는 라마교 기무치로 가볍게 몸을 풀어주는 것이다.
일전에 중국의 어떤 지식인이 칼럼을 썼다. 왜 중국 TV는 한류드라마 같이 리얼리티가 높은 고도의 심리게임을 다루지 못하고 왕후장상이 나와서 장풍이나 쏘는 허황된 황실드라마만 만드느냐고 일갈한 것이다.
그 칼럼을 보고 필받은 중국PD가 우리도 한류드라마 같은거 만들자 해서 성공할까? 천만에. 시청률 제로를 찍게 된다. 안 믿어진다고? 종편을 봐라. 종편들이 뭐 시청률 0퍼센트가 좋아서 그러고 있나? 안 된다.
왜 종편은 안 되는가? 20개의 바퀴살이 없기 때문이다. 구조의 결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가 종편 사장이었다면 시청률 7퍼센트는 쉽게 달성한다.
나는 할 수 있는데 왜 종편은 못할까? 종편이라는 이름 속에 답이 있다. 종편이란 종합이다. 즉 20개의 바퀴살이라는 뜻이다. 가짜다. 나라면 종편 포기했다. 종합편성 아니고 하나만 특화했을 것이다.
종편이 살아남으려면 코미디로 가든, 다큐로 가든, 황색으로 가든, 음악으로 가든, 드라마로 가든 한 개의 완성도 있는 바퀴살을 만들고 시청률을 10퍼센트 찍은 다음에 뉴스와 교양을 추가해서 종편화를 시도해야 한다.
종편은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으려 했다. 바퀴축에 살을 끼운게 아니라 거꾸로 바퀴살에 축을 끼우려 한 것이다. 구조의 결을 어겼기 때문에 멸망은 필연이다. 이건 정해져 있다. 종편 아닌 특편해야 산다.
비유하면 한류드라마는 종편이고 중국드라마는 특편이다. 중국은 문화의 본류가 아니라 지류이므로 종편이 아니라 특편을 해야 산다. 중국은 리얼리티가 없는 무협드라마를 해야 시청률이 산다.
황제가 장풍을 쏘고 황후가 자금성 지붕을 날아다녀야 한다. 그게 표준의 힘이다. 표준은 전략적 선택을 요구하며 중국 시청자는 덜 만들어진 종편보다 차라리 잘 만들어진 케이블 TV를 본다.
중국은 아시아정신의 중핵인 유교주의를 잃었다. 양명학이니 고증학이니 하며 곁가지로 가서 유교주의 본질을 버린 것이다. 유교는 본질이 가족주의라서 15억 인구와는 사이즈가 안 맞다.
일본 역시 유교를 모른다. 임진왜란 이후 퇴계를 조금 배웠지만 수박 겉핥은 거다. 완전성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일본은 불교도 왜곡되어 있다. 스님이 결혼도 하고 머리도 조금 기른다. 가짜다.
일본문화가 서구에 먹히는 것은 햄버거가 세계적으로 먹히듯이 초반 입질에 불과하다. 거기서 피렌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중국, 일본, 미국의 공통점은 사이즈가 너무 크다는 거다.
사이즈가 클수록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져서 고도의 미학적 완전성을 추구할 수 없게 된다. 많은 바퀴살을 거느릴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가 아닌 도시를 따라가는데 뉴욕은 약간 된다.
본류는 지류를 따라가지 않는다.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에 따라 햄버거는 이미 샌드위치로부터 상당히 마이너스 되었기 때문이다. 기무치는 김치가 마이너스 된 것이다. 작은 그릇이 되었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이는 물리적으로 불능이다. 본질에서 한국스타일이 일본스타일이나 중국스타일보다 그릇이 크다. 더 많은 바퀴살과 응용력과 호환성과 결합성을 가지고 있다.
경주의 삼층석탑은 다보탑 빼고 모양이 다 같은데 왜 중국의 석탑은 모양이 다양할까?(분황사 모전석탑, 용장사지 이형석탑 등 몇개 다른거 있음)조선의 유교는 성리학 하나 뿐인데 중국의 유교는 왜 다양할까?
왜 한국의 모든 범종은 모양이 똑같을까? 표준은 원래 작은 나라, 작은 도시에서만 가능하고 대륙에서는 원초적으로 불능이다. 미국인이 열심히 조깅을 해도 그게 세계표준은 안 된다.한국인은 그거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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