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한 것은 열일곱살 때다. 깨달은 사람은 오도송을 지어야 하는 걸로 되어 있다더라. 그런데 그 게송이라는 것이 한시다. 한시는 짜증나고 간단히 좌우명을 짓기로 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또한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 필요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존재하는 것은 필요하다.”

생각해서 문장을 꾸민다면 구차스럽고 그냥 툭 튀어나온 말이다. 예쁜 문장은 못되나 그때의 묘한 기분 속에서 나왔다는 점이 각별하다. 뒷부분은 사족인데 왠지 그래야만 아귀가 맞을 것 같아서 붙여두었다.

이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각별히 기억하는 것은 이 말이 방아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막힐 때 방아쇠를 슬쩍 당겨주면 다시 부르릉 하고 발동이 걸린다.

무엇인가? 이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 이 말을 갖다둔 것이다. - 여기에 밑줄 쫙.

사실이지 그러하다. 모든 선문답은 그 문답 안에 심오한 뜻이 충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뜻에 그 문답을 문패처럼 붙여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떡같은 선문답이라도 심오하게 풀어야 한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명경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본래 아무 것도 없으니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어디에 티끌이 일어나리. (혜능)

‘모든 존재하는 것은 또한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나의 아포리즘에서 방아쇠는 ‘또한’이다. ‘또한’은 이 말 앞에 어떤 전제가 깔려 있다는 뜻이다. 상부구조가 있다는 말이다.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불러내는 형태다.

A가 B를 불러내면 B가 다시 C를 불러내고, C가 다시 D를 불러내는 식으로 연쇄적으로 불러내도록 되어 있다. 보리는 지혜고 명경은 마음이다. 보리는 상부구조요 명경은 하부구조다.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불러낸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상호작용과 그 사에에서 에너지의 순환이 완전성이다. 과연 혜능이 그런 심오한 생각을 하고 이 게송을 지었을까 하고 의문을 품으면 곤란하다. 완전한 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그냥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생각하면 이미 늦었다. 종이 소리를 내는 것은 그냥 반응하는 것이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곧 보리수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곧 명경이네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 때묻지 않도록 하라. (신수)

무엇인가? 혜능의 완전성은 연역이다. 신수는 귀납한다. 귀납은 불완전한 것이다. 혜능의 종소리는 맑은 소리고, 신수의 종소리는 깨진 종소리다. 돈오는 완전성의 종을 울리는 것이다.

우주는 완전하고 신은 완전하고 마음은 완전한데 거기다 빨대꽂고 빼먹을 일이지 무엇을 털고 닦는다는 말인가?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방해자를 제거할 뿐 플러스를 가하지 않는다. 닦고 조이고 기름친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나무는 산에 있다.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 에너지는 태양에 있다. 역시 가져다 쓴다. 돈은 은행에 있다. 역시 가져다 쓴다. 깨달음은 가져다 쓰는 것이다. 문제는 암호다. ‘열려라 참깨’를 불러야 보물상자가 열리는 것이다.

산의 나무를 쓰려면 불씨가 필요하고, 하늘의 태양을 쓰려면 볼록렌즈가 필요하고, 은행의 돈을 쓰르면신용이라는 방아쇠가 필요하다. 관계맺기의 패스워드가 필요하다.

관계는 불러내는 것이다. ‘영희야 놀자’ 하고 불러낸다. 어떻게 불러내는가? 연쇄적으로 불러낸다. 상부구조를 불러내면 하부구조는 따라온다. 그렇다면 맨 위에 있는 최상부는? 완전성이다. 충분하다.

깨달음은 돈오다. 점수는 깨달음 자체와 상관없는 딴 이야기다. ‘그래서? 네가 깨달았다 치자. 그래서 뭐 어쩔건데?’ 이런 이야기다. 싸이가 그럴듯한 것을 만들었다 해도 유튜브가 없었다면 별 수 없는 거다.

김기덕 감독이 뭔가 그럴듯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세상에 영화라는 것이 아예 없다면? 영화가 있다 해도 해외 영화제에 출품할 길이 없다면? 해외 영화제를 노린다 해도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지 못했다면?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뭐 이런 이야기다. 순수한 깨달음 그 자체와 그것이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는 다른 이야기다. 역시 상부구조다. 필자 역시 인터넷이 존재하여 있기에 이러는 거다. 인터넷에 의해 지구촌 인류가 한 식구로 되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인류가 깨달음을 받아들일 타이밍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이제사 제대로 상부구조가 갖추어진 것이다. 빨대만 꽂으면 된다.

필자의 의도는 ‘개인화기’를 나누어 주려는 거다. 모든 병사에게 소총을 한 정씩 지급하겠다는 거다. 깨달음은 어떤 상황이든 즉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다.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자신이 갑의 포지션에 설 수 있다. 그것으로 연애를 하든, 글을 쓰든, 예술을 하든, 정치를 하든, 경영을 하든, 사교를 하든 어디에나 먹힌다.

그것은 하나의 방아쇠다. 방아쇠만 있으면 언제든지 ‘열려라 참깨’를 외칠 수 있다. 1700공안은 1700개의 방아쇠다. 작동원리는 모두 같다. 차례로 불러내는 것이다.

자기장이라는 관계의 실체가 있고 남극과 북극은 상대적인 포지션에 불과하다는 일원론적 생각을 가진 사람과, 반대로 남극과 북극이 있을 뿐 그 사이에 있기는 무엇이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결하면 백전백승으로 일원론이 이긴다.

조선왕조의 당쟁에도 항상 율곡이 퇴계를 이겼다. 구조적으로 율곡이 이기게 되어 있다. 율곡은 선비집단이라는 실체를 형성하고 그 실체가 왕권을 뒷받침한다. 공론을 모아 공익을 천명함으로써 대의명분을 분명히 한 다음에 왕을 거기에 올려태우는 것이다. 대의명분이란 곧 의사결정 원리다. 이 경우는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선비집단의 결집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퇴계는 왕과 개인적인 주종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왕에게 충성하지만 개인적인 충성심일 뿐이다. 힘이 없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의사결정이 안 된다. 왜? 신용이 없기 때문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했다. 색이 공하다는 말은 남북극이 포지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이 색하다는 말은 자기장이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말이다.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있다. 이건 뭐 다 아는 이야기다.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만 보느냐는 말은 언제라도 유효하다. 그런데 달을 보기가 참으로 어렵다. 선비집단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실체가 있다. 달이 떠 있다. 작용반작용을 성립시킨다. 그것이 실체다.

왜인가? 의사결정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퇴계의 개인적인 충성심은 중간과정의 프로세스가 없다. 그냥 목숨 바치겠다는 거다. 목숨을 바치면 뭐하나? 문제를 해결해야지! 그러려면 신뢰가 있어야 하고 신뢰를 이루려면 보증인이 있어야 하고 보증인을 세우려면 그 보증인이 죽어버린다든가 도망친다든가 하지 않아야 한다. 선비집단은 죽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으므로 보증을 선다.

그러나 퇴계의 충성심은 죽어버리고 혹은 도망쳐 버리기 때문에 보증을 설 수가 없다. 의사결정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신뢰를 담보할 구체적인 수단이 없는 것이다. 이건 뭐 땅문서도 없이 대출을 요구하고, 보증금도 없이 임차를 요구하는 격이다. 누가 대출해준다던? 누가 방을 내놓는다던?

깨달음은 완전성으로 불완전성을 제압한다. 완전성은 신이다. 완전성은 진리다. 완전성은 자연이다. 모든 관계는 신에 대한 관계다.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인터넷과 비슷하다. 완전한 것은 인터넷망 전체다.

우리는 그 전체에 빨대를 꽂아서 필요한 만큼 빼 쓰는 것이다. 각자 자기 능력만큼 쓴다. 어떤 사람은 100을 가져가고 어떤 사람은 1000을 가져간다. 더 많이 가져갔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다.

우리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열배로 즐거워 하든 100배로 즐거워 하든 무방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자연을 감상하고 만 배의 즐거움을 느꼈다고 해서 추가비용을 청구당하는 일은 없다.

누구 이기는가? 신을 불러오는 사람이 이긴다. 동네 꼬맹이가 싸움질을 하더라도 형을 불러오는 쪽이 이긴다. 깨달음은 신을 불러오는 방아쇠다.

많은 사람들이 관계의 완전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끝끝내 손가락을 보기 때문이다. 전체의 완전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송이 꽃은 완전하다.

‘흥! 완전하긴 뭐가 완전해. 금방 시들어버릴 건뎅!’

이러고 나자빠져 있다. 꽃은 또 피어난다. 한 송이 꽃의 완전성은 우주 전체의 완전성을 대표하고 있다. 누구든 왕의 사자가 되면 곧 왕과 동급이다. 누구든 신의 대표자가 되면 곧 신과 동급이다.

우주의 완전성이 본래 존재하고 개별적인 것들은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왜 점수에 사로잡히는가? 자기 안에 우주를 집어넣으려 하기 때문이다.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그것은 무리수다. 우주 안에 자신이 있고, 우주라는 종을 울리면 소리가 나고 그것으로 완전한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점수하여 내 안에 완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돈오하여 완전성 앞에 내가 선다. 내가 대표한다. 내가 북채를 쥔다. 내가 종을 울린다. 팬들은 아이유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이유를 매개로 신을 만나려 한 것이다. 아이유는 완전하지 않다. 다만 그 완전성을 대표할 뿐이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 아이유를 보지 말고 그 뒤의 신을 보라. 달을 따려고들지 말고 달을 가리키기만 해라. 관계만 맺으라. 상호작용만 하라. 진리를 머리 속에 집어넣으려 하지 말고 진리 앞에 가서 서라. 수학문제를 풀려고 하지 말고 계산기를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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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오는 북채가 북을 치고, 당목이 종을 울리고, 깨달음이 완전성을 끌어내는 것이며, 점수는 북채가 북이 되려고 기를 쓰고, 당목이 종이 되려고 용을 쓰고, 깨달음이 완전성이 되려고 무리수를 두는 것입니다. 무엇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다만 밖에서 툭 건드려 그 안의 소식을 밖으로 끌어낼 뿐입니다.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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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2-11-13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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