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민은 사람들이 쉬운 구조론을 턱없이 어려워 하는데 있다. 사실이지 너무나 쉬운 것이다. 그런데도 어려우 하는 이유는 워낙 기초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기초가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고, 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초보적인 상식이라는데 있다. 중 1의 난이도가 아니다.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이다.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간과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간과했다 치고, 까먹었다 치고, 모르고 빠뜨렸다 치고 문제는 필자가 그것을 그동안 누누이 강조하고 지적했다는데 있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이거 심각하다.
왜냐하면 필자의 글을 읽는 동안에는 수긍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돌아서면 까먹고 도로 원위치 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글을 도저히 납득을 못하겠다고 하면 필자가 친절히 설명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글은 납득한다는 거다.
그런데 돌아서면 원상태로 되돌아가 있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몰라서 모르는게 아니고 사고의 습관 때문이다. 그 습관을 깨야 한다.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안 바꾼다. 필자의 글을 수긍하지만 사고습관은 고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깨져야 한다. 대가리가 깨지도록 깨져야 한다. 그런데 깨지지 않았기 때문에 깨려고 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깨는 거다. 자기 자신을 깨뜨리는 거다. 크게 한번 깨져야 한다. 아주 박살이 나야 한다. 피를 철철 흘려야 한다.
그냥 시큰둥하게 그런가 보다 하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새벽 2시에 마을 한 바퀴 돌고와야 한다. 잠이 안 와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한다. 깨져야 깨닫는다. 깨져야 바뀐다. 상처가 나고 피가 나야 변한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에서 질이다. 입자는 쉽다. 무슨 이야기든 대화를 시작하는 지점이 입자다. 왜냐하면 우리말의 어순은 주어→술어이기 때문이다. 주어가 입자다.
‘철수야 밥먹자.’ 하면 철수가 입자다. 힘은 더욱 쉽다. 입자가 떠 주면 반드시 방해자가 나타난다. 장애물이 나타난다. 주인공이 뜨면 악역이 뜨고, 남자가 뜨면 여자가 뜨고, 여당이 뜨면 야당이 뜨고 둘 사이에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운동은 더욱 쉽다. 그 방해자와 씨름하다가 보면 자동으로 운동이 된다. 입자에서 힘과 운동으로 가는 순서는 사건이 전개하는 순서이므로 자연히 연결이 되는 것이다. 량은 결과다. 그러므로 양은 몰라도 된다. 무조건 마지막이 양이기 때문이다.
‘철수가 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고 하면 철수가 입자, 차가 힘, 타고가는 것이 운동, 학교에 도착하면 양이다. 이건 시간적인 진행순서이므로 저절로 되는 것이다. 철수가 차를 타려면 버스비를 내야 한다. 어떻든 힘을 써야 하는 것이다.
힘과 운동은 세트로 가기 때문에 너무나 쉽다. 량은 무조건 최종결과이므로 뒤에 갖다 붙이면 된다. 입자는 주어, 힘은 목적어, 운동은 동사이므로 우리말 어순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트라서 자동확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이 질이다. 즉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은 어순대로 가므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활을 쏜다면 활이 입자, 시위가 힘, 화살이 운동 과녁이 양이다. 여기서 활과 시위와 화살은 세트로 붙어 있다.
이들은 뗄레야 뗄수 없기 때문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궁수는 먼저 활을 쥐고 다음 시위를 당기고 다음 화살을 날린다. 과녁에 맞는다. 정확하게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서대로 진행하므로 도저히 모를 수가 없다.
질은? 궁수다. 질은 어떤 사건의 성립하기 전에 결정되는 전제다. 즉 그 사건의 전제조건이 질인 것이다. 질 역시 세트로 붙어 다니므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사건이 시작되려면 인원소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신다고 치자. 사건은 커피에서 시작된다. 커피는 입자다. 힘으로 커피를 입에 가져가고, 운동으로 들이마시고 양으로 배가 부르다. 순서대로 가는 거다. 그렇다면 질은? 커피잔이다. 잔이 없으면 커피를 마실 수 없다.
잔이 입자이면 잔받침이 질이다. 잔받침이 입자이면 그 잔받침을 놓을 테이블이 질이다. 테이블이 입자면 그 테이블을 받칠 건물바닥이 질이다. 건물이 입자면 그 건물을 세울 대지가 질이다. 대지가 입자면 그 대지를 받칠 지구가 질이다.
지구가 입자면 그 지구를 받칠 중력이 질이다. 중력이 입자면 그 중력을 받칠 통일장이론이 질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 어디를 가나 질은 반드시 있다. 무조건 있다. 질이 없는 경우는 없다.
◎ 커피가 입자면 잔은 질≫잔이면 잔받침≫잔받침이면 테이블≫테이블이면 건물바닥≫건물이면 대지≫대지면 지구≫지구면 중력≫중력이면 통일장이론.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조가 우리 주변의 모든 분야에 망라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질을 이해 못하는 것은 우리말 어순이 입자≫힘≫운동 순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맨 앞에 오는 주어의 이전단계를 까먹기 때문이라는 거다.
주어 앞에 오는 말이 있다. 모르겠는가?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구성된다. 어떤 진술이든 앞에 반드시 전제가 있고 대개 전제는 생략되지만 숨은 전제는 반드시 있다. 전제는 어떤 말을 꺼낼 때 하는 말이다.
어떤 말을 하든 일본 식으로 ‘에~ 또’ 하거나 혹은 ‘자~!’ 하거나 영어 식으로 ‘so~’ 하거나 거시기 하며 앞에 붙이는게 있다. 예컨대 친구에게 말을 건다고 치자 생뚱맞게 갑자기 말을 꺼내면 이상하다.
애들이 주어 앞에 붙이는 말은 ‘있잖아요.’다. 경상도 머스마들은 ‘안있나’를 쓴다. 왜냐하면 슬프게도 모든 말걸기 앞에는 사나운 ‘무슨 상관이야?’ 혹은 ‘누가 물어봤냐구?’가 붙기 때문이다. 이거 아주 무섭다. 쪽팔리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친구라서 충고하는데 말야.’ 하고 자신에게 말붙일 자격을 먼저 부여한다. 엄마들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을 꼭 붙인다. 혹은 ‘보자보자 하니까 하도 웃겨서 말인데’ 하고 주어 보다 앞에 깔고 들어가는 말 있다.
이것이 질이다. 우리는 문장이 주어에서 시작된다고 믿지만 반드시 전제가 있다. 일기를 써도 먼저 날자를 써야 하고 날씨도 기록해야 한다. 편지를 써도 먼저 아무개 전 상서를 붙여야 한다. 책을 써도 머리말이 나와야 한다.
노래를 불러도 반주가 깔려야 한다. 영화를 돌려도 포스터를 붙여야 한다. 시를 써도 제목을 제출해야 한다. 수업을 해도 출석을 불러야 한다. 뭐든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들어가줘야 하는게 있다. 그게 없는 경우는 없다.
축구를 하려해도 애들을 소집해야 한다. 말을 붙여도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 깡패가 시비를 걸어도 먼저 어깨를 부딪혀야 한다. 외출을 해도 먼저 화장을 해야 한다. 화장을 해도 먼저 목욕을 해야 한다. 목욕을 해도 먼저 화장실에서 볼일을 봐야 한다. 볼일을 보려 해도 먼저 휴지를 챙겨야 한다. 항상 전제가 붙으며 전제가 없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근데 이거 상식 아닌가?
예컨대 어떤 사기꾼이 수작을 붙인다고 치자. 말이 앞뒤가 맞고 논리정연하면 사기다. 왜냐하면 반드시 있어야 할 전제가 없기 때문이다. 전제가 들어가면 상당히 어색해진다. 전제는 토대의 형태로 있기 때문이다.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은 톱니바퀴가 꽉 맞물려 있는데 전제는 상당히 어색하게 떨어져 있다. 톱니가 꽉 물려 있지 않은 것이 정상이다. 예컨대 남자가 전화로 여자에게 갑자기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치자.
하필 생리라서, 하필 입고나갈 옷이 마땅치 않아서, 하필 얼굴에 뽀드락지가 나서, 하필 화장이 안 먹어서, 하필 미장원에서 한 머리가 마음에 안들어서 하는 식으로 반드시 걸리는게 있다. 없으면 여자가 남자에게 관심없는 거다.
뭔가 어색하고 미묘한 트러블이 있어야 정상이고 없으면 도리어 비정상인 거다. 그건 차마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자는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드라마는 시작되는 거다. 지금 밖에 있는데 입냄새가 걱정되고 양치질을 해야 하는데 마땅치 않아서 당장 데이트를 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커피가 있으면 잔이 없고, 잔이 있으면 잔받침이 없고, 잔받침이 있으면 테이블이 없고, 테이블이 있으면 운치있는 정자가 없고, 정자가 있으면 걸맞는 계곡이 없고, 계곡이 있으면 날씨가 개떡이고.. 이 중에 하나는 반드시 걸린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꾸미든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긁적지근한 무언가에 하나는 반드시 걸리는게 정상이며 일이 일사천리로 술술 진행되면 지금 사기꾼에게 넘어가고 있는 거다. 근데 이런건 경험적으로 다 아는 것 아닌가? 말해야 아나?
어떤 일을 하든 반드시 조치해야 할 이전단계가 있다. 작업하기 전에 단도리(왜어)부터 해야 한다. 집 짓기 전에 비계부터 설치해야 한다. 글 쓰기 전에 먹을 갈아야 한다. 노래 부르기 전에 목청 틔워야 한다. 차 타기 전에 교통카드 꺼내야 한다.
차가 오른쪽으로 가려면 운전자는 먼저 왼쪽을 확보해야 한다. 왼쪽에 차가 오는지 보고 오른쪽으로 꺾는 것이다. 이때 입자와 질은 마주보고 있으므로 방향이 반대다. 항상 진행방향의 반대쪽을 먼저 조치해야 한다.
중요한건 이것이 사실은 우리말의 어순에 들어와 있다는 거다. 꼬마는 사과를 먹기 전에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만 꺼내 먹으면 안돼?’ 그런데 이 말은 사실 불필요하다. ‘엄마 나 사과 먹을께’ 하고 먹으면 된다.
그런데 이 말도 불필요하다. 그냥 먹으면 된다. 누가 먹지 말랬냐고? 누가 허락 맡으랬냐고? 그러나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색하기 때문이다. 마치 몰래 사과를 꺼내먹는 것처럼 보이니까.
먹으려면 알리고 먹는게 자연스럽다. 근데 ‘엄마 나 사과 먹을께.’ 하면 엄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응’ 하고 대답한다. 잘 들리지도 않는다. 먹으라는 말인지 먹지말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부정적 표현을 쓰는게 낫다.
‘엄마 나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만 꺼내 먹으면 안돼?’ 이렇게 말하면 엄마는 ‘그래 먹으라고. 누가 먹지 말랬니?’하고 똑부러지게 대답해준다. 이런 식의 언어습관은 반드시 있다. 김어준이 ‘졸라, 씨바’ 하는 것도 감정을 끌어올리는 습관이다.
그냥 하면 연기가 잘 안 된다. 유능한 배우들은 대사를 하기 전에 인상을 써서 호흡을 고르고 감정을 끌어올린다. 괜히 화를 내서 씩씩거려야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와준다. 그래서 화를 내지 않는 주인공보다 화를 내는 조연이 더 연기를 잘한다.
송강호, 최민식을 비롯해서 연기파 배우들은 대개 조연인게 조연은 화를 낸 다음 말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짜증을 내고 ‘아 씨바 담탱이가 말야.’ 하고 흥분해야 대사가 술술 나와주는 거다.
그대가 어떤 대사를 치든 먼저 말을 거는 절차, 인사를 땡기는 절차, 감정을 끌어올리는 절차, 사건개요를 설명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야 그거 거시기 있잖아.’를 쳐놓고 다음에 본론 들어가는 거다.
우리가 이러한 질의 자리깔기, 준비동장, 사전정지작업, 사건의 유도과정을 잊어먹고 빠뜨리고 생략하는 이유는 입자와 마주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입자 힘 운동은 톱니처럼 물려 있는데 질은 맞은편에 조금 떨어져 있다.
입자, 힘, 운동은 하나의 연속동작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질은 미리 와서 대기하고, 무대치고, 준비하고, 리허설 하고, 분위기 잡고, BGM 깔고, 포옴 잡고, 조명 깔고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곧잘 잊어먹는다. 실은 사건이 질에서 촉발된다는 것을 모른다. 질을 바로잡아야 문제가 술술 풀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깨달음은 질을 깨닫는 것이다. 질은 사건이 진행되는 방향과 반대쪽에 있다. 실제로는 하나의 방향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인간은 입자부터 사건을 파악하므로 입자가 서 있는 지점의 반대쪽이 질인 것이다.
이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질은, 전제는, 준비는, 차리기는, 절차는 항상 있는 것이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며, 특히 어떤 일을 처음 할 때는 더 중요한 것이며 두 번째 부터는 질이곧잘 생략된다. 그래서 잊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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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입자인 자기 자신을기준으로 판단하므로 질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건은 반드시 질에서 시작됩니다. 두 번의 반전으로 질을 포착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말하기 전에 감정 끌어올리는 훈련, 외출하기 전에 옷 입는 훈련, 글 쓰기 전에 먹 가는 훈련, 밥먹기 전에 상차리는 훈련 말입니다. 밥상은 엄마가 차려주고, 먹은 하인이 갈아주고, 옷은 시녀가 입혀주고 그런 식으로 질을 생략해 버린다면 실전에서 왕창 깨집니다. 이 한 권의 책을 권하는 바입니다. 잊어먹었던 질을 포착할 때 당신의 마음은 편안해 집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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