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위님의 리플을 밑에서 가져옵니다.
승자독식
전쟁필수
약육강식
부익부빈익빈은 당연한거.
이렇게 보면 존엄은 어디에 들어서야 하는 건지.
경쟁이 인류를 발전시켰다. 이건 모든 인류 역사, 교육, 철학, 경제, 정치가 그렇게 부추겨 온 것인데,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할 수 밖에 없다고 그러는데, 거기에 존엄과 공동체가 어떻게 들어서야 하는 건지…….
나는 승자독식을 싫어하고,
전쟁보다는 평화를 좋아하고,
약육강식보다는 약자돌봄
부익부빈익빈을 당연한 것이 아닌 잘못된 구조로 보는데, 깨달음이 오질 않음.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예수, 석가, 카테리 테카키타, 화이트헤드, 데스몬드 투투, 유영모, 김구, 함석헌, 손양원, 틱낫한, 하워드 제어, 토마스 머튼, 소로우 같은 사람들을 좋아함. 국가, 민족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놓고 소통하고 관계했던 사람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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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 흔하다. 아마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 그런데 성의가 없다. 나는 구조론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 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 한다. 이는 나의 희망사항이다. 무리인가?
무엇인가?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내 몫은?’ 이러면 짜증나는 거다. 이거야 뭐사업을 하는데 법인도 설립하기 전에 배당금 내놓으라는 식이 아닌가? 승자독식이 싫다고? 내 몫을 달라는 이야기다. 몫은 각자 챙겨야 한다.
불쾌한 것은 ‘승자독식 전쟁필수 약육강식 부익부빈익빈은 당연한거.’ 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는 것.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렇게 느꼈다고? 느끼지 말고 읽어야 한다.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대충 느끼려 하면 곤란하다.
구조론은 이론이다. 이론은 결과만 따먹으려 하면 안 되고 과정을 꿰어야 한다. 구조론은 당연히 승자독식 반대, 전쟁반대, 약육강식 반대, 빈익빈 부익부 반대다. 그런데 최종결론이 그런 거고 과정은 심오하다.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
답은 현대성이다. 현대성을 획득하면 승자독식은 사라지고, 전쟁은 억지되고, 약육강식도 사라지고, 빈익빈 부익부도 없어진다. 봄에 새 가지가 날 때는 평등하다. 왜냐하면 현대성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쭉정이와 알밤이 가려진다.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진다. 구조론은 기승전결의 기만 주목한다. 결은 관심없다. 관계에 관심을 둘 뿐 의미는 필요없다. 의미를 취하려 들므로 승자독식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가을의 수확에 집착하지 말고 봄의 탄생을 주목하라.
입학만 하면 되지 졸업은 필요없다. 밥상을 받으면 되지 구태여 그 밥을 먹을 필요는 없다. 끽다거라 했다. 끝내 그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 성철은 그 잔을 비우지 않았고 숭산은 낼름 비웠다. 상대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느냐가 중요할 뿐 거기서 무엇을 취하느냐는 필요없다.
문재인이 안철수를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중요하지, 문재인 밑에서 총리나 장관을 하는데는 관심이 없어야 한다. 대접을 받으면 격이 올라가고 격이 올라가면 그 다음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 떠먹여 달라면 곤란하다. 노무현은 고건, 이해찬, 정동영, 김근태, 추미애, 천정배 등에게 두루 기회를 주었다. 대접을 해준 것이다. 그 다음은 각자가 자기 능력대로 챙겨가는 거다. 왜 떠먹여주지 않느냐고 투정부리는 자는 이인제다.
보통은 모로가도 결과만 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구조론은 결과 필요없고, 시작만 제대로 하면 된다는 거다. 시작은 탄생이다. 탄생의 지점에서 모두는 평등하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결과를 보는건 봉건성이다.
모든 사건은 어떤 둘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만남 그 자체를 보는 것이 구조론이다. 그것이 관계다. 만나서 ‘응응응을 했느냐’에 관심을 두는 자는 ‘개새끼’다. 그거 의미를 추구하는 거다. 그 의미를 버려야 한다.
존엄은 만남이다. 이명박이 아무리 까불어봤자 나를 만날 수 없다. 만나도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 북과 북채가 만나면 소리가 나야 한다. 소리가 나지 않으면 만나도 만난게 아니다. 만날 사람이 만나서 제 소리를 내는 것이 존엄이다.
승자독식.. 무엇을 독식하지? 의미를 독식하는 거다. 근데 그 의미를 구조론은 부정한다. 결국 독식하는 것은 없다. 색즉시공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놀이를 하는데 자신이 이겼다고 우기는 자가 있다. ‘그래 네가 이긴거 맞다. 근데 너랑 안놀아.’ 우겨서 이기면 뭐하냐고? 관계가 끊기는데. 승리는 의미다. 의미를 추구한즉 관계를 잃는다. 관계없는 의미는 쭉정이다. 의미는 사라진다.
빈익빈부익부? 부자는 승용차로 출근한다. 빈자는 지하철로 출근한다. 빈자와 부자는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러므로 관계는 단절된다. 관계가 단절되면 끝난 것이다. 부자라고 뻐길 수 없다.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외계인과 같다. 외계인이 나타나서 ‘나 부자인데’ 해봤자 아무도 관심이 없다. 소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답은 현대성이다.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예수, 석가, 카테리 테카키타, 화이트헤드, 데스몬드 투투, 유영모, 김구, 함석헌, 손양원, 틱낫한, 하워드 제어, 토마스 머튼, 소로우들이 어떤 사람인지 다는 모르겠으나 현대성을 획득한 사람은 옳고 봉건성을 획득한 사람은 틀리다.
율곡은 현대성을 획득했으므로 옳고 퇴계는 봉건성을 고집했으므로 틀리다. 문재인은 현대성을 획득했으므로 옳고 박근혜는 봉건성을 고집하므로 틀리다. 현대성은 탄생이다. 새로 탄생한 사람을 거느린 쪽이 옳다. 젊은이가 옳다.
승자독식을 싫어하는가? 그렇다면 현대성을 획득하라.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현대성을 획득하라. 약육강식보다는 약자를 돌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현대성이다.
현대성은 새로 시작하는 거다. 반장을 학기초에 정해놓고 1년간 맡긴다면 봉건성이다. 매일 새로 반장을 뽑는다면 그것이 현대성이다. 재용이처럼 아버지 것을 제것이라고 우기면 봉건성이다. 과거가 미래를 억압하므로 봉건성이다.
아마 본문에서 1등만 가치있고 2등은 의미없다는 식의 표현에 걸리셨나 본데 그런 자구에 얽매인다면 기본적으로 글읽기의 태도가 잘못된 거다. 구조는 관계, 깨달음은 관계다. 관계는 만남이고 그 만남의 시간은 특정된다. 하나 밖에 없다.
예컨대 친구를 만난다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 거다. 여기서 언제의 시간도 어디서의 장소도 누구의 대상도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 1 2=3이다. 답은 하나다. ‘왜 3만 예뻐해? 4와 5는 밉상이냐?’ 하고 시비하면 곤란하다.
현대성은 시간이고 시간은 무한하며 그러므로 모두에게 기회가 간다. 4는 2 2를 취하면 되고 5는 2 3을 취하면 된다. 공평하다는 거다. 1등을 없애버리고 모두가 꼴등을 하자 이건 답이 아니다. 모두에게 1등할 기회를 주는 것이 공평하다. 존엄은 절대적으로 1이다. 2는 이미 존엄이 없다.
교회앞을 지나가다 찬송가 소리를 듣는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그 찬양소리를 들은 하느님이 불쾌할 거란 생각은 왜 못할까? 찬양한다면 상대가 높고 자신은 낮다는 이야긴데 낮은 사람을 만나면 유쾌할까?
낮은 사람은 노예다. 노예를 통제하는 사람은 마름이다. 그 사람들은 졸지에 하느님을 마름으로 취직시켰다. 하느님이 원하는건 찬양이 아니다. 북은 북채를 원하고 북채는 북을 원하지만 진짜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북도 북채도 필요없고 소리가 진짜다. 하느님은 친구를 원하며 그 친구는 대등하게 만나야 하고 북채의 북이 되어야 하고, 범종의 당목이 되어야 하고 서로 대등하게 1 대 1로 만나야 한다. 만나서 소리를 내야 한다.
1 대 1로 만날 뿐 1 대 다(多)로 만나지는 않는다. 10만 명을 모아놓고 한꺼번에 만난다면 만나는게 아니다. 그건 만남이 아니라 지나쳐감이다. 당신은 60억명의 군중 속에서 1/60억의 자격으로 하느님과 만나겠는가?
100대 1로 만나자고 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초청해도 나는 안 간다. 그것은 만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1초를 만나도 대등하게 만나야 진짜다. 하느님이 60억초의 시간을 내면 60억명을 다 만날 수 있다.
구조론은 결과가 아닌 원인, 하부구조가 아닌 상부구조, 양이 아닌 질, 결이 아닌 기, 끝이 아닌 시작, 가을이 아닌 봄, 죽음이 아닌 탄생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내가 이창호와 바둑을 둔다면 그렇게 만난 그 자체가 영광이지 누가 이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파퀴아오와 메이웨더가 싸운다면 둘의 만남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지 승자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다. 메시와 호날두의 대결을 보고 싶은 거지 둘 중에 누가 센지를 판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는데도 ‘그럼 입학만 하면 되고 졸업은 필요없는 거에요?’ 하고 어깃장 놓는 사람 꼭 있다. 예컨대 그대가 김태희를 만났다고 치자. 만나서 어쩔건데? 그 장면 꽤 어색하지 않은가?
나라면 어색한 만남은 갖지 않는다. 만나서 기껏 사인이나 받을 뿐이다.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 없다. 만약 진도를 나간다면? 결혼한다고? 그렇다면 먼저 그대가 걸맞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어울리는 스펙을 갖추어야 한다.
이건 김태희를 만나는 것과 상관없는 당신의 문제다. 무조건 김태희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고 우기는 사람 있다. 그래서? 만나서? 호텔로 간다고? 가서? 어쩌려고? 결국 이 남자는 김태희를 만나는데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나 김태희와 호텔에서 하룻밤 보낸 사람이야’ 하고 자랑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 우선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그 자랑은 또다른 기승전결의 기다. 결국 기에 관심이있는 거다. 시작부분에 관심이 있는 거다. 무엇인가? 입학만 필요하고 졸업은 필요없다는게 구조론의 입장이다. 그런데 대부분 졸업한다. 왜?
졸업해야 스펙을 쌓아서 직장에 입학하고, 좋은 직장에 입학해야 좋은 여자와의 결혼에 입학하고, .. 계속 입학이 필요한 거다. 결국 입학에 관심이 있어서 졸업을 하는 거다. 졸업에 관심이 있어서 졸업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의 졸업은 죽음이다. 죽으려고 사는 사람은 없다. 다들 탄생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탄생하고 입학할 때 학생으로 탄생하고 사귈 때 우정으로 탄생하고 취업할 때 직장인으로 탄생하고 결혼할 때 부부로 탄생하고 자녀를 얻을 때 부모로 탄생한다. 계속 탄생에 관심이 있는 거다.
나는 낚시하러 가는데 관심이 있지 물고기를 잡는 데는 관심이 없다. 물고기를 잡더라도 잡아서 탄성을 지르고 감탄하는데 관심이 있지 그 물고기를 먹는데 관심이 없다. 먹더라도 맛을 보는데 관심이 있지 배를 채우는데 관심이 없다.
나는 건물을 설계하는데 관심이 있지 그 건물에 입주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입주하더라도 입주하여 다들 만족해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데 관심이 있지 거기서 잘 먹고 잘 사는데는 관심이 없다.
나는 만나서 그대의 웃는 얼굴을 보는데 관심이 있지 만나서 어떻게 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더라도 그 어떻게 하는 과정의 또다른 만남에 관심이 있을 뿐 그 어떻게 해서 무슨 쾌감을 얻는데는 관심이 없다.
인간은 끝없는 탄생, 끝없는 만남을 원할 뿐 그 탄생의 결과인 죽음, 그 만남의 결과인 소득에는 관심이 없다. 설사 그 소득에 관심이 있더라도 그 소득을 통한 또다른 만남에 관심이 있을 뿐, 거기서 무언가를 챙기는데는 관심이 없다. 챙기더라도 그 챙긴 것으로 또다른 레벨의 만남으로 나아갈 뿐 거기서 주저앉아서 음미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공수래 공수거다. 인생에서 아무 것도 챙길 수 없다. 대신 만날 수 있다. 만나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것이 전부다.
결론적으로 존엄은 어떤 사건의 시작부분을 보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는 거다. 시작이 아닌 끝단을 주시하고 있다면 답이 없는 거다. 대화는 불통이다.
결과가 공평해야 한다는 주장은 끝단을 보는 시선이다. 무리다. 개도 공평하게 사람처럼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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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위님의 질문은 미리 답을 정해놓고 ‘내게 맞는 떡을 입에 넣어 줘.’ 하고 요구하는 것 같소. ‘경쟁이 다는 아니다’ 라고 말해야지 무작정 경쟁은 안 된다는 식은 곤란하오.
- 어떤 사람들이 경쟁없이 사는 데, 그리고 평화주의로 사는데, 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대뜸 하는 말이, 저 사람들이 사는 건 사는게 아냐. 경쟁력이 없어 한마디 하고 말더군요. 말한 사람은 자신의 패러다임과 구조가 완전 뽀롱나는 줄도 모르고…말이죠.
평화주의가 무기력, 무책임, 나태함의 변명으로 된다면 곤란하오. 경쟁하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이 있는데 왜 경쟁하느냐가 맞지 무작정 비경쟁을 주장하는건 답이 아닙니다. 총칼로 싸우기보다 문화로 싸우는게 맞고, 이기려고 싸우는 것 보다 즐기려고 싸우는게 맞습니다. ‘싸운다’는 표현이 걸려서 문화로 싸우는 것도 싸우는 것이니까 싫다고 말하면 말트집이 되겠죠. 문화로 싸우는건 싸우는게 아니지요. 노는 거지. 열심히 놀아서 놀이에도 이겨야 한다는게 아니오. 영심히 놀지 않고도 이기는 길은 있다는 겁니다. 꼭 이겨야 한다는게 아니오. 정답이 있다는 거지요. 말의 표현에 걸리지 말고 본질을 보시오. 우주는 팽창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팽창 싫어’ 이건 곤란하죠. 생물은 진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진화 싫어’ 이건 곤란하죠. 역사는 진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진보 싫어’ 이건 곤란하죠. 역사의 진보, 생물의 진화, 공동체의 발달, 우주의 팽창, 엔트로피의 증가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고 그 사실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 ‘나는 도는거 싫어.’ 이건 아니지요.
- 기회의 균등. 시간의 공평성 - 많이 들어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러냐? 현대성이 그걸 보장해 준다는데, 정말 그러냐는 것이 제 안의 질문입니다.
구조론은 ‘A면 B다’의 조건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작정 절대적인 균등과 공평은 당연히 없습니다. 돼지나 개에게도 투표권을 주지는 않습니다.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하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기회의 균등은 절대로 없습니다. 절대적인 공평도 절대로 없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성폭행범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너도 날 성폭행하면 되잖아. 자 성폭행 해. 지난 번엔 내가 했고 이번엔 네 차례야.’ 하면서 빤스를 내립니다. 근데 이러면 공평할까요? 성폭행 피해자가 성폭행 가해자를 성폭행 하면 공평할까요? 무리하게 균등을 추구하려 하면 곤란합니다. 단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하게 대응한다는 규칙만이 공정하게 작동할 뿐입니다. 개는 개답게 살고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게 공평하지 개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건 무리입니다.
우주는 팽창하고 생명은 진화하고 역사는 진보합니다. 그 안에서 경쟁은 필연이며 경쟁 그 자체를 죄악시하면 곤란합니다. 문제는 경쟁의 폭주입니다. 인간이 경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작정 경쟁을 반대하는게 아니라 경쟁하기 위한 경쟁, 쓸데없는 경쟁을 안 하는게 중요합니다. 애들이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놉니다. 성적도 없고 경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있습니다. 그걸 문제삼을 일은 없습니다. 대부분 경쟁과잉은 후진국의 문제이고 에너지의 부족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며 인류가 저온핵융합을 하거나 공해없는 토륨발전을 하면 경쟁과잉은 해소됩니다. 그때는 산업경쟁이 아닌 문화경쟁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며 경쟁의 폐해는 최소화 됩니다. 단 경쟁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경쟁을 죄악시 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활력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 잘못된 경쟁, 허무한 경쟁, 경쟁하기 위한 경쟁을 비판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쟁하는 이유는 창의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창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갑이 아닌 을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경쟁하지만 여자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생물의 진화원리상 그렇다는 겁니다. (여자도 시험치잖아. 여자도 경쟁하잖아 하는 사람은 한국어가 안 되는 사람임. 맥락을 파악할 것.)여자는 낳지만 남자는 낳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하는 것입니다. 낳는 사람은 주인공이고 낳지 못하는 사람은 엑스트라이기 때문입니다. 경쟁은 엑스트라가 하는 것이고 주인공은 경쟁 안 합니다. 창의는 본래 비경쟁입니다. 관계는 무한한 창의가 가능합니다. TV는 소극적인 시청자로 만족해야 하지만 인터넷은 독립적인 창의가 가능한 공간입니다. 인터넷은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TV시청자는 의미를 추구하고 인터넷 이용자는 관계를 추구합니다. 구조론은 TV시청할 시간에 블로그 운영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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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결과측이 아닌 원인측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 틀어야 합니다. 원인이 끝나고 결과가 온다고 믿으면 착각입니다. 원인 안에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만나서 행복해지는게 아니고 만남 안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만남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났으니까 되었다는 식이면 곤란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까 이젠 됐다며 한 시름 놓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제대로 만나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답은 시작에 있습니다. 시작이 지나고 끝이 오는게 아니라 하루 안에 한 시가 있고 한 시 안에 일 분이 있듯 커다란 하나의 시작 안에 작은 끝들이 여러개 있는 것입니다. 작은 시작 말고 커다란 시작을 얻을 때 당신의 모든 문제는 씻은듯이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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