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퀴즈

◆ 퀴즈 - 박근혜는 이번 십알단 사건에 대해서 사과할까 사과하지 않을까?

◎ 사과하면 – 새누리떼의 기세가 꺾인다. 관련된 후속보도가 쏟아진다. 공주의 카리스마가 훼손된다.

◎ 사과하지 않으면? - 월요일 TV토론 시청률이 올라간다. 기자들이 계속 물고늘어지며 질문을 던진다. 국민들은 투표때까지 박근혜 입만 쳐다본다.

오늘 아침에 사과를 하는게 정석이었다. 그러나 하수들은 대마가 죽더라도 코 앞의 한 집을 챙기는 법. 국정원건을 떠들어 작은 이익을 챙기려고 적반하장 네거티브로 나가다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필자는 내일이나 모레쯤 결국 사과할 걸로 본다. 이런 걸로 국민과 씨름하면 민심과 소통이 안 되는 점만 부각된다. 우리는 남은 4일 동안 이것만 계속 화제로 삼으며 박근혜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면 된다.

4일 남았다

이번 대선은 김영삼의 3당야합을 원상복구하는 선거다. 박근혜를 찍으면 안 되는 이유는 너무 많지만 이야기 해봤자 입만 아프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이념의 문제도 아니고, 수준의 문제다.

정치공학의 모든 지표가 우리가 이기는 방향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박근혜가 이긴다면 그것은 박근혜의 카리스마 때문이고, 박정희의 유신세뇌가 그만큼 강했다는 거고, 한국인도 별수 없다는 의미다.

박근혜 현상은 흔한 후진국의 모습이다. 기성세대의 평균학력은 중 2 수준이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 그러나 사회의 시스템이 강하면 큰 위기 때는 정신차리고 아는 사람 말을 듣는다. 말 좀 들어라.

문재인을 지지하는 이유

얼굴이 잘생겨서도 아니고, 공약이 좋아서도 아니고, 특전사 출신이라서도 아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나는 나를 지지한다. 나는 여러분께 말한다. 남을 지지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을 지지하라고.

시청앞 광장에서 일장기를 흔든다면 미친 짓이다. 성조기를 흔들어도 미친 짓이다. 인공기를 흔들어도 미친 짓이다. 자기 깃발을 흔들어야 한다. 나는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문재인인가 박근혜인가?

나는 깨달음을 주문한다. 너는 누구인가?

문재인은 문재인을 찍는게 맞고 박근혜는 박근혜를 찍는게 맞다. 당신은 누구인가?

말했듯이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형식이다. 전제는 대개 숨겨져 있다. ‘나는 일번을 지지한다’고 하면 ‘어떠어떠한 이유로’ 혹은 ‘네가 어떠어떠한 행동을 했으니까’라는 전제가 숨어 있다. 포지션이다.

무엇인가? 대부분은 대립각을 세운다. 상호작용이 있다는 거다. 작용반작용의 법칙대로다. 상대가 먼저 어떠어떠하게 작용했으니까 그에 대응하여 이러저러 하는 것이다. 먼저 작용한 내용이 숨은 전제다.

객석에 앉은 관객의 태도와 같다. ‘배우인 네가 먼저 연기를 해 봐. 내가 점수를 줄테니’ 하는 거다. 이때 관객의 점수는 대체로 짜다. 왜? 그래야 자신에게 발언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네가 뭐를 잘못했으니까 너를 위해서 내가 충고하는데’ 하며 말을 거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잘못해야 자신에게 발언권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무조건 일단은 상대가 잘못했다고 말해놓고 시작한다.

이쯤되면 필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략 감잡았을 것이다. 포지션이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박근혜를 수단으로 삼아 대사회적인 발언권을 획득하려는 거다. 그들은 격리되어 있다. 지리로 격리되어 있거나 유행에서 격리되어 있거나 심리로 격리되어 있다. 격리불안, 존재불안에 시달리며 화가 나 있다.

무엇인가? 현대성이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이런 놀이에 끼지 못한다. 현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심전심으로 먹히는 구조가 있고, 이것이 먹히는 공간이 있고, 이것이 먹히는 세대가 있다.

그 구조를 벗어나면 세상과의 관계가 어색해진다. 그 지역을 이탈하면, 그 나이를 이탈하면, 그 흐름에서 이탈하면 뭔가 삐딱해진다. 부자연스럽다. 부조리다. 결국 삐딱선을 타게 된다. 왜? 이미 삐딱해졌기 때문이다. 왜? 이미 자신의 포지션이 무대의 배우가 아니고 객석의 관객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리플놀이에 동참하지 못한다. 왜? 관객이니까.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세상이라는 무대의 배우인가 객석의 관객인가? 리플을 달건가 말건가?

무엇인가? 그들은 세상과의 관계설정 자체가 삐딱하다. 어린이들의 말을 유심히 들어보면, 이들이 아무런 불만이 없을 때도 뭔가 불만이 있는것처럼 투정을 부리며 어른에게 말을 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만이 있다. 그들은 어린이고 상대는 상대하기 버거운 어른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불만이다. 필자는 밑바닥의 범죄자들을 여럿 만나본 일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왜 억울한지 사정을 들어보았다.

억울할만 했다. 범죄자로 태어난 사실 자체가 억울하다. 무엇인가? 그들은 갑이 아닌 을의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었고, 갑인 세상에 안티함으로써 발언권을 획득하려 하고 있었고, 그러한 포지션 설정 자체가 이미 억울했다.

범죄자나 조직폭력배, 성매매자들은 자기네끼리 일종의 공동체를 만들어놓고 사회를 적으로 규정한다. 사회와 그들이 소속된 공동체와의 관계를 중앙과 지방, 주류와 비주류, 어른과 아이처럼 대립각을 세워서 바라보며, 그 구도 하에서 자기네들은 약자이며 뭔가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억울할 밖에.

백인이 99퍼센트인 나라에 1퍼센트의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태어나면서부터 억울하다. 그들은 억울한 것에 만족해 하고 있었으며 억울함에 중독되어 있었다. 자신이 잘못을 해도 아버지가 때려서 바로잡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범죄를 저질렀어도, 미리 범죄예방을 해서 자신을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유도하지 않은 사회의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 금고를 털었어도 털리는 금고를 놔둔 가게의 탓이었다. 억울할 밖에. 원초적으로 포지션 설정 자체가 그러한 거다.

그들은 을인 자기네를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갑인 세상을 능동적인 존재로 설정하며, 세상이 먼저 소수이며 약자인 자기네를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자기네는 수동적인 존재이므로 무조건 억울하다.

부자라도 다르지 않다. 사회를 자본주의 생존경쟁의 장이라고 보면, 그 안에서 누구라도 소수이며 약자일 수 밖에 없다. 유태인의 선민사상이나 특권층의 우월주의도 비슷하다.

부자들은 자기네를 선택받은 소수라고 생각한다. 역시 사회와 분리하여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조폭집단과 다를바 없다. 사회를 생존경쟁의 장이라고 보는 한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억울한 소수일 수 밖에 없다.

타인과 비교하고 질투하는 눈빛을 가지는 한, 남보다 잘 되려고 기를 쓰는 한 억울할 수 밖에 없다. 백억을 벌어도 천억을 벌지 못해서 억울하다. 로또에 당첨되었다 해도 나라에서 세금을 33퍼센트나 떼어가니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다.

나는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자신을 진리의 편, 자연의 편, 역사의 편, 진보의 편, 신의 편으로 자리매김하지 않는 한, 그 진리의 마음과, 자연의 마음과, 역사의 마음과, 진보의 마음과, 신의 마음과 동조화 되지 않는 한, 리플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한어떤 경우에도 억울할 뿐이다.

누구라도 그러하다. 왕이라도 그러하고 독재자라도 그러하다. 그들은 고독한 소수다. 자신을 신의 편에서, 진리의 편에서, 역사의 편에서 분리하여 그 바깥에 자신을 세워놓고 그 안쪽의 세상과 대칭을 이룬채로 마주보는 한 실패다.

답은 현대성이다. 위의 이건희 말춤에 달린 강남스타일 리플놀이와 같다. 사회는 거대한 놀이의 장이다. 이심전심으로 사회의 놀이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낀다. 그 놀이는 진보의 놀이다.

왜? 계속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나오고 스마트폰이 나오고 뭔가 계속 나온다. 새로운 게임은 끝없이 쏟아진다. 한 번 삐딱선을 타면 계속 소외된다. 끝없이 억울할 밖에. 게임은 계속된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독립된 공간을 만들고 자기네들끼리만 통하는 별도의 놀이를 발명하고자 한다. 그러려면 일단 사회를 적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래서 박근혜를 찍는다. 사회에 대한 적대행동이다. 이때 사회의 진보게임은 똑똑한 사람 위주로 작동하므로 그들은 멍청한 사람을 앞세운다.

내가 문재인을 지지하는 것은 예의 리플놀이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내가 무대 위의 배우이기 때문에, 무대에 올랐으면 한 곡조 뽑는 것이며, 게시판을 찾았으면 리플을 남기는 것이며, 노래 좋아하는 소년들이 신곡 나오자마자 다운받아 가사를 외듯이 문재인놀이가 떴으면 그 새로운 놀이를즐기는 것이며, 그렇게 세상과 하나되는 것이다. 본래 그 세상의 일부인 것이다. 박근혜는? 신곡이 아니다. 흘러간 노래는 흘러가게 둔다.

그들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유는 무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대 위의 배우가 한 곡조 뽑으면 그들은 무조건 핀잔을 던진다. ‘흥 옛날 조용필 노래가 더 좋았어.’

P.S.

이런 글은 구조론 연구소를 방문하는 독자들을 의식한 글이고, 현장에서는 그저한 표를 부탁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나를 봐서라도 투표장 가서 2번 찍어달라고 부탁하는게 정답입니다. 조리있게 설득해서 넘어올 사람은 이미 다 넘어왔어요. 끝끝내 일번 찍겠다면, 혹은 투표를 안 하겠다면 그 사람과의 친구사이는 멀어지는 거지요.

###

젊은이들은 어떻게든 사회의 중심부 깊숙히 쳐들어가서 존엄을 획득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게임을 즐깁니다. 자신을 무대 위의 배우로 설정하는 것입니다.그러나 기성세대들은 먹고살아야 하므로 언제까지 사회를 의식하고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독립하여 자기만의 나와바리(구역)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뺏깁니다. 다들 저 게임의 장으로 달려가고 있어요. 리플달고 있어요. 신나게 놀고 있어요. 어느새 자기만 뒤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들은 자랑합니다. ‘야 나의 황금 멋지지 않아? 부럽지? 일루와 봐! 나랑 놀자구.’ 그런데 다들 몰려가서 강남스타일 노래부르며 말춤 추고 있어요. 그 무리에 끼어들기엔 늦었습니다. 어색합니다. 흥이 나지 않습니다. 화가 납니다. 그래서 박근혜를 찍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심통을 거두고 정신차려야 합니다. 왜? 우리는 세계의 무대 위로 나아가서 세계의 게임을 한 바탕 펼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구석에서 찌질댈건데?

http://gujoron.com/xe/?mid=Moon 
  
  
∑ 
drkim's profile image

drkim

2012-12-14 21:19

Read more posts by thi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