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게시판의 글 ‘구조론 문제’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과연 지구는 멸망할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개의 답이 준비되어 있다. 사실 지구는 멸망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지구는 지금 멸망한다. 다를 바 있나? 그러나 알아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은 뜻밖에 평온하다는 사실을.
사실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멸망하는 것은 그대의 지구일 뿐이다. 우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구들이 있다.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너의 지구가 멸망할 뿐 진정한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활약은 작가에 의해 보장된다. 설사 주인공이 죽었다 해도 작가는 주인공을 되살려낼 수 있다. 설사 지구가 멸망했다 해도 초능력자는 시간을 되돌려서 지구를 구할 거다. 걱정마시라.
사실 얼마나 여러번 시간이 되돌려졌는지 모른다. 어쩌면 지구는 백억번쯤 멸망했다가 다시 되살아나기를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딴건 중요하지 않다. 필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다른 거다.
지구가 망하는 날 사람의 얼굴은 평온하다.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도 평온하다. 일대소동은 희망 때문에 일어난다. 완벽한 절망의 날에 사람들은 무심하다. 우리의 고통은 희망 때문이다.
왜 김기덕 감독은 완벽한 절망을 선사하는가? 바로 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구는 망해도 지구는 망하지 않는다. 진리가 깨뜨려지지 않는 한 지구가 망해도 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만화에는 죽음을 앞두고 이것저것 해보는 설정이 많지만 그건 소설이고 만화라서 그런 거고, 인간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전쟁터의 병사들도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마지막까지 하던 일을 하거나 여행을 떠난다. 발악하고 난동 피우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더 허무하니까. 군대 제대하는 날 선임하사 서랍에 똥 싸놓고 간다고 말들은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누구든 자신의 마지막은 멋지게 포장하고 싶어 한다. 난동을 부리다가 더럽게 죽느니, 꽃송이에 파묻혀 예쁘게 죽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유종의 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사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어떻게든 작가가 대본을 뜯어고쳐서라도 마지막에는 지구를 구해낼 것을 알기에 저런 진솔한 연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장준하를 타살한 범인이나 김구선생을 살해한 범인이나 끝까지 진실을 숨기는 것이 정석이다. 더럽게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만화의 솔직함은 사실 만화의 비밀을 아는 등장인물의 것이다.
“다 죽어도 주인공 한 사람만은 끝까지 산다. 어떻게든 주인공이 되고 보자. 그들 4인은 혼신의 힘을 짜내 맹연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깨달음은 뒤집어 생각하기다. 지구가 망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만화의 인물들은 시간을 거슬러 아기 때의 모습을 들추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엔카남의 벌거벗은 모습은 아기다.
아이돌녀의 한심한 이야기 역시 아기의 투정이다.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낡은 앨범에서 아기 사진을 찾아낸 것과 같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완성된다.
완성된 죽음으로부터 삶은 시작된다. 아기의 공포는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필자는 한 살때 그 이전의 과거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깊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나이가 꽤 들어서도 잠들때마다 그 생각을 했다. 내 과거가 지워져 버리고 없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것은 죽음의 공포와 정확히 같다. 세계의 완전한 부재.
내가 죽는건 겁나지 않고 세계가 없는 것이 무섭다. 까마득한 과거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 아무 것도 없었지 않은가? 먼 미래에 우주가 멸망하고 난 다음에도 아무것도 없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먼 과거나 먼 훗날의 일인가? 지금 현재의 문제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국제미아로 살아서 부모도 모르고 조국도 모른다면 크게 상심하게 될 것이다. 그런 거다. 허무와 무의미의 공포.
하얀 백지보다 두려운 것이 있을까? 과거도 끝없이 이어지고 미래도 끝없이 이어진다고 해야 안정감을 느낄텐데 말이다. 인간은 노력하여 왕이 되기보다 원래 왕자로 태어나기를 원한다.
노력하여 왕잡는다는 것은 억지로 뜯어고친 소설의 결말과 같다. ‘여주인공은 왕자님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끝.’ 이거 만족하는가? 젠장 이건 왕자 좋은 일만 시키는 거다.
결론은 이렇다. 관객은 ‘지구가 파멸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영화를 본다. 영화 ‘노잉’은 지구가 파멸하는 설정이지만 생각해보면 아담과 이브가 지구로 오는 과정의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
노잉은 지구를 파멸시키지 못했다. 왜? 작가가 쫄았다. 어쨌든 ‘지구를 지켜라’에서는 지구를 파멸시킨다. 그런데 당황하는 관객은 없다. 지구가 파괴되는 장면을 너무 어설프게 찍어서인가?
믿음 때문이다. 파괴된건 지구이지 ‘지구’가 아니다. 파괴된건 ‘어떤 지구’일 뿐이다. 설사 진짜로 지구가 파괴된다 해도 진리가 깨지기 전까지는 진정한 파멸이 아니다. ‘노잉’은 결정론을 말한다.
그 지점에서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 당신이 보고 있는 영화는 필름 안에 모두 결정되어 있다.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은 당신의 어떤 지구의 어떤 미래일 뿐이다. 그러므로 깨달을 일이다.
진리도 결정되어 있고 완전성도 결정되어 있다. 진리로부터 그대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어 온 전체과정은 완전하게 결정되어 있다.
◎ 지구(진리)는 멸망하지 않는다.
◎ 멸망해도 누군가의 어떤 지구가 멸망할 뿐이다.
◎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주인공을 막판에 구제한다는 사실을 안다.
◎ 죽어가는 암환자들은 진리의 영속성을 믿기에 편안하게 떠난다.
◎ 인간이 진정으로 염려하는 부분은 모두 결정되어 있다.
◎ 결정되어 있지 않은 부분은 의미없다.
◎ 이를 깨달으면 태연할 수 있다.
이 정도면 필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대략 감잡았을 것이다. 그렇다. 필자는 결정론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결정론이 흔히 말하는 그 결정론은 아니다. 운명론, 숙명론 따위는 아니다.
완전론이다. 인간이 무서워 하는 것은 불완전성이다. 무엇인가?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호랑이도 아니고, 호랑이에 잡아먹힌다는 사실도 아니다. 소리를 질러 마을에 알려야 하는 것이 문제다.
마지만 순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만화에는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무언가 하려고 찾아다니는 모습이다. 뭘 해야 하지? 뭘하긴 뭘해?
자신이 해야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죽음의 두려움은 없다. 신, 진리, 완전성으로부터 전개하여 지금 이 상황, 이 순간까지 오게된 루트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죽음의 두려움은 극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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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은 완벽한 절망에서 진정한 희망을 보는데사람들은 대개그렇지 않다면 유감! 예컨대 장인이석가탑을 만드는와중에애인이 도망갔다면 완벽한 절망 끝에 완벽한 탑을 만들었을거 같다든가 그런거.
계백이 가족을 베고 황산벌로 나아갔다든가 그런거. 거기서 사회의 도덕을 논하면 치기고 예술이란 것, 미학이란 것은 원래 그런거. 위대한 걸작이 태어난다면 지구가 쪼개지는 정도의 난산이어야 하지 않나?
P.S.기어이 지구의 종말은 오고야 말았소. 한국인의 수준은 만천하에 폭로되고야 말았소. 자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요?
1) 천국을 간다.
2) 만국을 간다.
3) 화성으로 탈출한다.
4) 사과나무나 심는다.
5) 크리스마스 카드를 쓴다.
6) 솔로대첩을 기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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