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질이 안 좋게 올라갔는데 설정에서 퀄리티를 높여서 보십시오.-

예술의 이해

구조론은 의미가 아니라 관계다. 의미는 그림 안에서 기승전결의 질서를 찾고 관계는 그림 밖에서 그 질서를 찾는다.

무엇보다 인류역사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안에 기승전결이 있다. 한 폭의 그림 안에도 기승전결이 있다. 조형적 질서가 있다. 인류의 기승전결이라는 조형적 질서 안에서 그림의 기승전결을 찾는 것이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두 그림이 만난다. 두 세계가 만난다. 그 만남은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화가는 점을 그린다. 아니 점을 그려야 한다. 점을 그리지 못하면 화가가 아니다. 다들 점을 그리고 있다.

자연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있고, 원형이정이 있듯이, 인의예지가 있듯이, 전체과정이 있고 그 안에 결이 있다. 이를 통짜덩어리로 이해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최승호 시인의 인터뷰를 참고하자. 이미지는 살이고 리듬은 피요 의미는 뼈다. 그런데 살과 피는 빼고 뼈만 보라고 한다. 아니 틀렸다. 이미지는 살이고 리듬은 뼈고 의미는 허튼소리다. 허튼소리 하는 자는 때려잡아야 한다. 의미가 들어가면 그것이 논설이지 어찌 시이겠는가 말이다. 의미를 배제하는 지점에서 시는 시작된다. 의미가 들어가는 지점에서 시는 사망한다.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은 좀 아닌 거다. 그런 식의 감동을 주려고 하는건 아카데미즘이다. 인상주의는 감동을 주지 않는다. 감동은 의미에서 나온다. 그 감동을 때려잡아야 한다. 거기가 인상의 출발점이다.

그림이 단순히 브랜드 값이라고 생각해도 곤란하다. 결을 읽어야 한다. 화룡점정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조응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기승전결 안에 방향성이 있다. 방향성 다음에 완전성이 있다. 때려죽여여 할 아카데미즘은 고흐의 초년그림과 같고 피카소의 청색시대와 같다. 이론적인 그림도 좋지 않다. 고갱이 고흐를 비판할 때와 같고, 피카소가 입체파를 실험하던 때와 같다. 추사가 중국그림체를 모방하던 시대와 같다. 그게 이론그림이다. 의미를 따지는 것도 양식이 덜 만들어진 이론그림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덜 여물었다.

조응은 청색시대를 졸업하고 이론시대를 졸업하고 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그런 결을 읽을 수 있어야 진짜가 된다. 우주의 결과 내 안의 결이 만나는 지점에서 조응은 탄생하며 그게 그냥 나오는게 아니고 그 유파의 리더가 되었을 때, 그래서 따르는 무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때 비로소 나와주는 것이다. 추사가 점 하나 찍었을 때는 따르는 선비가 3천이었다고 한다. 이우환도 세상의 무수한 스티브 잡스들이 자신을 모방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점 하나 찍어주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아이팟, 아이패드, 맥북에는 돈을 잘 갖다 바치면서 그 아이디어의 원조인 이 그림에는 10원도 아깝다는 인간이 인류의 99퍼센트다. 그러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1프로다. 1프로인 우리가 세상을 이끌어간다. 우리가 이 하나의 점이다. 우리가 세상에 점 하나 찍는다. 우리가 아담의 손끝과 하느님의 손 끝이 만나는 지점이다. 우리가 세상의 나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순수성, 활동성, 대칭성, 거쳐서 완전성으로 나아간다.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을 한다면 틀렸다. 여러분 마음속에 이미 그려져 있어야 하며 그림을 보는 순간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터져나와야 한다. 오래 기다렸던 것이어야 한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그림은 스스로 캔버스를 찢고 세상 안으로 뛰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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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3-01-0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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