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방법

학교에서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지식은 생각하는 방법이다. 학교 아닌 어디에도 없는 지식이다. 생각의 과정이나 결과는 알 수 있는데 생각에 사용된 툴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뇌를 열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 보통은 ‘왜?’를 쓴다. 과학자가 되려면 ‘왜?’ 하고 질문하는 버릇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과연 그럴까? 틀렸다. ‘왜?’ 라고 물어서 좋은 답변을 얻어내는 일은 없다. 과학자가 되려면 ‘왜’를 버려야 한다.

“소금은 왜 짜지?”
“설탕은 왜 달지?”
“불은 왜 뜨겁지?”
“바람은 왜 불지?”

‘왜’를 사용해서 제대로 된 답을 얻기는 어렵다. 소금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짜다(salt)는 뜻이다. ‘짠 것은 왜 짜지?’ 설탕은 근래에 전파된 낱말이고 예전에는 ‘단 거’라고 말했다. ‘단 것은 왜 달지?’ 이건 동어반복이다.

바람의 어원은 ‘불다’이다. ‘불음’이 ‘바람’으로 되었다. ‘불음은 왜 불지?’ ‘닫개는 왜 닫지?’ ‘열 개는 왜 열지?’ ‘가리개는 왜 가리지?’ ‘쓸개는 왜 쓰지?’ ‘덮개는 왜 덮지?’ ‘빨대는 왜 빨지?’ ‘밀대는 왜 밀지?’

이런 식으로는 발전이 없다. 생각이 막히고 만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과연 ‘왜?’ 라는 질문이 과학적인 접근일까? ‘왜?’가 창의력과 탐구심을 길러줄까? 반대다. 왜는 좌절감을 유발할 뿐이다.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떠올릴 수 있다. ‘왜 사냐건 웃지요.’ 반박할 수 없다.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무엇인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답정너’라는 것이 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된다’는 거다. 문답의 형식을 가졌지만 문답이 아니라 유도심문이다.

‘왜 사냐?’는 질문에는 숨은 전제가 있다. 숨은 전제가 들어가면 무의식적으로 포지셔닝 게임을 하게 된다. 이는 공을 패스하는 것과 같아서 무조건 상대방에게 토스 하도록 되어 있다. 과학은 무너지고 만다. 창의할 수 없다.

바꾸어야 한다.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다.’ ‘산은 높고 물은 깊다.’ ‘밀개는 밀고 끌개는 끈다.’ 이렇게 구조적인 대칭을 맞추어야 뭔가 감이 와준다. 눈이 번쩍 하고 떠진다. 일을 풀어가는 실마리가 드러난다. 방향이 제시된다. 흥분이 일어나고 긴장이 유발된다. 집중할 수 있다.

과학을 하려면 왜를 버려야 한다. 왜는 생각을 방해할 뿐이다. 어원을 추적해 보면 ‘왜?’ 곧 ‘Why?’는 인류가 유인원을 막 벗어나던 시절 정글에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비명소리 신호(call)가 올때 그 신호의 원인을 캐묻는 말이다. why는 call에 대한 것이며 ‘왜 call을 쳤느냐’는 뜻이다.

인간이 원시인이었을 때 최초의 언어는 call이었다. call은 적의 침입을 알리는 비명소리다. 한자어로는 갈(喝), 갈(曷)이고 우리말은 ‘까?’나 ‘고래고래’ 소리친다고 할 때의 ‘고래’가 call이다.

call에서 cause(까짓, 까닭, 꾸짖다)가 나오고 how, why, what, who 등의 의문사가 모두 나왔으며 우리말에서는 왜, 까, 까짓, 까닭, 꾸짖다가 되었다. 까닭은 까 다그치다인데 ‘닦다’는 ‘말하다’로 닦달하다, 닥치다로 흔적이 남았다. doctor나 dictator와 같다.(박사, 독재자는 말하는 사람, 명령하는 사람이란 뜻.)

왜가 전혀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왜는 사람의 불순한 행동을 추궁할 때 쓸모있는 단어다. ‘왜 웃지?’ ‘왜 울지?’ ‘왜 화가났지?’ ‘왜 소리를 지르지?’ ‘왜 반말을 하지?’ ‘왜 절을 하지?’ ‘왜 떠들지?’ ‘왜 소란을 피우지?’ 왜는 누가 어떤 사고를 쳤을 때 그 사고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 쓰는 말이다.

왜는 인간이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작위적인 행동을 했을 때 그 계기를 파악하게 한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를 찾아내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는 공동체에 위험신호(call)가 떴을 때 그 위험을 파악하게 한다. ‘왜’는 ‘까?’에서 온 말이며 까는 cause다. 꾸짖는다는 뜻도 있다. ‘왜 불렀어?’ 이런 거다.

자연은 구태여 인간에게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물은 그냥 흐르는 것이며 산은 그냥 높은 것이다. 신호를 보내는건 인간이다. 왜라고 하면 누군가에게 호출되었다는 의미다. 호출되었다면 안좋은 소식일 확률이 높다. 왜는 부정적인 언어다. ‘왜?’나 ‘까?’를 쓰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된다.

문제는 포지션이다. 왜는 call과 호응된다. 왜라고 하면 자연히 call을 찾는다. call은 선수고 왜는 후수다. 서로 대칭을 이룬다. 이때 ‘누구에겐가 호출되었다’는 사실이 숨은 전제다.

호(呼)나 호(號) 역시 call에서 왔다.(c는 H로 변한다. 고양이 호랑이, 구멍, 굼 홈, 프랑스어에 H가 없듯이 모든 H는 C가 변한 말이며, 고어에는 대개 H가 없다.) 호출, 호통은 call출, call통이었던 것이다. 보나마나 안 좋은 소식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에서 ‘왜 사느냐?’는 말에는 ‘누가 네게 삶을 허락했느냐.’ 곧 ‘너는 누구의 call을 받았느냐,’ ‘너의 소속집단은 어디냐?’는 함의가 있다. 숨은 전제는 소속집단 혹은 실행하는 일의 명령주체다.

답정너 공식에 따라 답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소속집단과 명령주체다. 그러므로 ‘왜’가 들어가면 답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집단을 찾게되고 따라서 우울해지며 위축되고 만다. 그리고 소속집단 곧 포지션만 찾으면 답을 찾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소금은 왜 짜지?’ ‘짜니까 소금이지. 안 짜면 소금이냐?’. ‘아 그렇구나.’ 하는 식이다. 언뜻 대화가 된 것 같지만 헛소리다. ‘고추는 왜 맵지?’ ‘캡사이신 성분 때문이야.’ ‘아 그렇구나.’ 역시 헛소리다. 유의미한 지식을 획득한 것은 아니다. 그냥 캡사이신이라는 단어 하나를 찔러줬을 뿐이다.

특히 인문분야이 지식인들이 이런 식의 바보게임에 중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열심히 논쟁하지만 알고보면 그 분야의 전문용어 맞히기 게임이다. 예컨대 이름으로 가면 라캉, 소쉬르, 데리다, 푸코, 들뢰즈 등의 이름을 열거하면 중급은 되고 용어로 가면 랑그, 빠롤, 가로지르기, 즉자적인, 담론, 창발성 따위의 잘 안 쓰이는 용어를 말해주면 된다.

답정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단어만 대면 된다. 이는 프랑스인과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소스에 숨은 재료이름과 생산연도를 맞춰주면 되고 일본인과 음식을 토론할 때는 색깔과 배치, 분위기 등의 미학을 말해주면 되고 중국인과 음식을 토론할 때는 ‘몸의 어느 부위에 좋다’고 하면 되고 한국인과 대화할 때는 무조건 ‘양이 많다’고 하면 되는 것과 같다. 답은 정해져 있다. 포지션만 찾아가면 된다.

왜는 call과 대칭을 이루므로 무조건 포지셔닝 게임으로 가게 되며 답은 정해져 있으며 과학은 죽고 창의는 막힌다. ‘왜’의 답은 call이다. ‘누가 너를 호출했기에 네가 여기서 껍죽대는 거냐?’ 이런 뜻이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데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무조건 파리에서는 재료명과 생산연도, 일본에서는 미학, 중국에서는 몸에 좋다, 한국에서는 양이 많다가 답이다.

왜 사냐고? 신의 부름을 받았다.(종교인)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정치인) 학교의 부름을 받았다.(학생) 사장의 부름을 받았다.(회사원) 국방부의 부름을 받았다.(군인) 돈의 부름을 받았다.(이건희)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

진리를 찾으려면 ‘왜’를 버려야 한다. 지식은 대칭구조에 있다. 대칭을 찾으면 그것이 답이다. 산이 높은 이유는 물이 깊기 때문이다. 하늘이 푸른 이유는 노을이 붉기 때문이다. 꽃이 피는 이유는 열매가 맺기 때문이다. 같은 극이 미는 이유는 다른 극이 당기기 때문이다. 학이 한 다리로 서는 이유는 두 다리로는 걷기 때문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사과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중력이 아래로 흐르기 때문이다. 둘의 대칭을 찾아내고 다시 그것을 명사와 동사로 풀어내며 그 사이의 메커니즘을 발견하면 그것이 지식이다.

바람이 부는 이유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바람은 위에서 아래로 분다. 바람의 위는 고압이고 아래는 저압이다. 고압과 저압의 둘을 하나로 통일시켜 보면 그것이 찾아야 할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을 찾으면 답은 나왔다.

쇠붙이가 자석에 붙는 이유는? 같은 극은 밀고 다른 극은 민다. 밀고 당기고 하는 둘을 하나로 통일시켜 보면 그것이 자기장이다. 곧 메커니즘이다. 답은 이미 나온 것이다.

하늘이 푸른 이유는? 하늘은 높으므로 푸르고 노을은 낮으므로 붉다. 높으면 입자가 미세하고 낮으면 입자가 크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입자의 크기에 따라 빨주노초파남보가 결정된다. 그냥 하늘이 푸른 이유가 어떻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하늘의 푸름과 노을의 붉음이 대칭을 이루고 그 대칭된 둘이 다시 하나의 컬러장을 이루는 메커니즘을 알았을 때 답이 나와주는 것이다.

둘을 대칭시키기와 다시 하나로 조직하여 메커니즘 이루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지식이 아니다. 부스러기 지식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획득된다. ‘왜?’로 가면 반드시 답정너에 치이고 만다. 포지셔닝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과학은 없다.

귀납적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한 답을 찾을 수 없다. 부분은 why고 전체는 call이다. why는 call에 갇히며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연역해야 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야 한다.

‘왜 바람이 불지?’ 여기서 ‘불지’에 물음표가 붙는다. 불다는 동사다. 동사에서 명사를 찾으면 답을 찾지 못한다. 반대로 명사에서 동사로 가야 한다. 바람에서 불다로 가야 한다. 바람은 불고 물은 흐른다. 바깥으로 가야 한다. 패턴을 발견하고 대칭을 찾아내야 한다. 그 다음은 메커니즘으로 통합해주면 된다.

왜 사과는 떨어지지? 틀렸다. 사과는 떨어지지 않는다. 왜 떨어진다는 단어를 쓰지? 사과가 내려간다고 할 수도 있고 사과가 땅으로 끌린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단어에 갇히는 즉 과학은 사망한다. 사과가 떨어지는게 아니라 질량이 흐른다.

지구는 태양을 돌지 않는다. 왜 ‘돈다’는 단어를 쓰지? 지구는 공간의 곡률에 의해 태양주변의 원형궤도에 갇혀 있는 것이다. 달의 인력 때문에 조수의 간만에 의해 지구가 약간 짜부러져 있듯이 태양의 반대편에 지구의 질량을 상쇄할만큼의 포지션이 있다. 태양의 core가 행성들의 질량을 보상할 만큼 이동해 있다.

우리는 잘못된 언어사용에 의해 갇혀버린 것이며 그 때문에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모든 프랑스인들은 재료의 이름과 생산연도에 갇히고 일본인은 미학에 갇히고 중국인은 몸에 좋다에 갇힌다. 갇혀 있기 때문에 창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포지션은 미리 정해져 있다. 깨부수어야 한다. ‘why?’를 깨야 한다. ‘까?’도 깨야 한다. 대칭을 얻어야 한다. 명사에서 동사로 내려가야만 패턴을 발견할 수 있고 대칭을 포착할 수 있다.

‘왜’나 ‘까’를 버리고 ‘A면 B다’ 곧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상호작용원리를 써야 한다. ‘산이 높으면 물은 어떻지?’ 하는 식이 되어야 한다. 명사를 동사로 풀고 다음 바깥에서 대칭을 찾아 짝지워야 한다.

‘위하여’라는 말을 쓰면 안 되는 것과 같다. 인과법칙에 따라 ‘의하여’가 맞다. 위하여는 사기꾼의 언어다. ‘위하여’라고 말하는 순간 인간의 사고는 제한된다. 목적있는 집단행동으로 가고 만다. ‘위하여’는 개인을 집단의 부속품으로 생각하는 태도이며, 이는 인간의 공동체적 본능에 의한 것이다. 책임을 집단에 돌리며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

‘왜?’ 하고 질문하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근대의 상식으로 굳어져 있어서 왜를 폐기하라는 저의 주문에 거부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왜?’는 속임수입니다. 그 안에는 숨은 전제가 있으며 자동으로 포지셔닝 게임이 일어납니다. 정해진 거짓 답안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진리는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용기있게 그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왜’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떨치고 진리와의 정직한 대면에 나서십시오.

drkim's profile image

drkim

2013-01-23 17:58

Read more posts by thi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