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단을 부정하면 개인이 드러난다.
◎ 국가를 부정하면 집단의 의사결정구조가 드러난다.
◎ 메시지를 부정하면 풍자가 드러난다.
◎ 주제를 부정하면 병맛이 드러난다.
◎ 이태리가구를 부정하면 핀란드가구가 드러난다.
◎ 아카데미즘을 부정하면 인상주의가 드러난다.
◎ 김봉남을 부정하면 패션이 드러난다.
◎ 근대주의를 부정하면 현대성이 드러난다.
◎ 내세를 부정하면 현실이 드러난다.
◎ 천국을 부정하면 개혁이 드러난다.
◎ 합리주의를 부정하면 미학이 드러난다.
◎ 의미를 부정하면 관계가 드러나고 포지션이 드러나고 맥락이 드러난다.
부조리란 한 마디로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집단적으로 뭘 해보자고 수작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항하기 위한 반항은 곤란하다. 깨달음에 기초한 레벨업이어야 한다.
맥락을 알아야 한다. 부조리는 2차대전과 관련이 있다. 그 이전의 계몽주의와 관계가 있다. 그 이전의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 계몽주의라면 2차대전의 악몽을 겪고 계몽주의 한계를 절감한데서부터 부조리의 인식은 시작된다.
합리주의-계몽주의에서 어떤 전근대성, 봉건성을 포착한 것이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부조리는 현대성이며, 깨달음이고, 미학이고, 완전성이다. 그것은 인간이 유전자의 명령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상부구조로 치닫는 병폐를 지적하고 개인의 완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강한 개인으로 올라서기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불교와 가깝다. 특히 까뮈에 있어서 부조리는 순수한 깨달음 그 자체다. 샤르트르는 약간 나이롱이다.
윤리, 도덕 따위는 집단의 메시지다. 애국, 반공 이런 것도 집단의 광기다. 집단에 의해 미쳐 돌아가던 세계가 개인에 의해 바로잡히는 것이 부조리의 정답이며 까뮈가 말하고자 했던 바다.
선문답은 정해진 정답이 없지만 사실은 정답이 있다. 그냥 정답이 없다고 우기는건 모르는 사람이 하는 소리고, 정해진 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이 하는 소리다.
분명한 정답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정답이 없다. 그대가 어떤 답을 하든 묻는 말에 답을 하면 이미 틀려버린 것이다. 질문이 call일 때 호응하여 because가 나오면 이미 틀려버린 것이다. 누가 답하랬느냐고? 누가 대답하는 자의 포지션에 가서 서랬냐고?
call과 because가 하나의 세트를 이룬다면 상대의 call에 because 하지 말고 반대로 그대가 call을 쳐야 한다. 그대가 부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신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말라. 석가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말라. 달마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면 부처를 죽이고 달마룰 죽이겠다며 나를 치려는 사람 꼭 있다.) 국가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마라.
응답하는 자의 포지션에 서면 이미 깨달음은 저 멀리 달아나고 만 것이다. 그대가 세상을 부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대가 사건의 원인측이 되어야 한다. 그대로부터 사건은 시작되어야 한다. 그대가 기승전결의 기가 되어야 한다.
부조리란 응답하는 즉 이미 틀려버린 것이다. 그대가 욕망에 응답하는 한, 그대가 희망을 품는 한, 그대가 꿈을 들키는 한 이미 틀려버린 것이다. 모든 ‘위하여’를 끊어내고, 순수한 ‘의하여’에 서야 한다.
답은 있다. 의하여가 답이다. 세상의 부름에 응답하지 말고 반대로 그대가 세상을 향해 call을 치는 것이 답이다.
시에는 운율이 있고, 그림에는 구도가 있고, 음악에는 화음이 있다. 시는 운율에 의해서 풍성해지고, 그림은 구도에 의해서 풍성해지고, 음악은 화음에 의해서 풍성해지고, 만화는 병맛에 의해서 풍성해지고, 철학은 부조리에 의해서 풍성해진다. 더 넓은 세계로 올라선다.
주제, 메시지, 교훈은 부정되지만 현장에서의 섬세한 반응은 있다. 상호작용은 있다. 그림 바깥의 메시지를 부정하고 그림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찾는다. 미리 정해놓은 답을 찾지 않고 맞닥들인 현장의 리얼리즘에서 답을 찾는다.
보물찾기를 한다면 각본에 따라 미리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게 아니라 그렇게 숲을 뒤지고 다니면서 자연과 접촉하는 그것이 찾아야 할 보물이다. 그렇다. 보물은 없지만 분명히 보물은 있다. 그대는 찾았는가?
부조리는 합리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며, 합리주의는 reason이며, 부조리는 reason의 부정이며, reason은 why나 because와 마찬가지로 call에 대한 호응이다. 누군가의 콜에 응하는 포지션에 서면 이미 졌다.
◎ 신이 그대를 call했다. - ‘조까!’
◎ 나라가 그대를 불렀다. - ‘조까!’
◎ 윤리가 그대를 불렀다. - ‘조까!’
◎ 돈이 그대를 불렀다. - ‘조까!’
◎ ( )가 그대를 불렀다. - ‘조까!’
전방위로 조까를 구사하는 것이다. 어떤 call이든 응답하면 진다. 큰스님이 어떤 질문을 하든 대답하면 진다. 끽다거.. 부디 그 차를 마시지 말라. 마시면 퇴장당한다. 세상이 그대에게 부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순간 꼭두각시가 된다. 역할하지 말라.
부조리는 인생에 답이 없다며 시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답이 없다는 사실 안에 진정한 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유쾌해지는 것이다. 유쾌하지 않으면 부조리가 아니다.
그림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림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어찌 그림이겠나? 의미가 들어가면 텍스트다. 이 그림은 불로장수를 기원하고, 저 그림은 장원급제를 기원하고? 그게 그림이겠는가?
마찬가지로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어찌 인생이겠는가? 그것은 개생이거나 돼지생이다. 인생에 의미가 없으므로 깨달음이 있다. 돈을 벌겠다, 출세를 하겠다, 성공을 하겠다, 애국을 하겠다 하는 그 의미를 버려야 한다.
깨달음도 없다고 말하면 그것은 잘난척 하는 먹물의 허무주의에 불과하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다. 위하여가 없기 때문에 의하여가 있다. 부조리가 사이비 철학자의 말장난이 되어도 곤란하고 무개념들의 현실도피수단이 되어도 곤란하다. 도망치지 않기 바란다. 부디.
“세상이 왜 이렇게 부조리하지?” - 이거 부조리가 아니다. 전형적인 합리주의다. 이미 세상 탓하고 있다. 세상에서 답을 구하려 하고 있다. 그러다가 전쟁이 난 것을 반성하는게 부조리인데 아직도 세상 탓을?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화를 내는 것은 깨뜨려야 할 합리주의다. 정신차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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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란 사전에 정해진 대본대로 가기를 거부하고 자의에 의해 즉흥적인 애드립을 넣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먹어준다는 종교, 윤리, 도덕, 애국, 성공,명성, 출세로 가는 것은 다 정해진 대본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대가 천국을 가든 어디를 가든 대본대로 가는 것이면 이미 틀려버렸습니다. 그대가 새롭게 설계한 세상을 내보여야 합니다. 그대가 세상을 부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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