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라는 것이 도무지 무엇인가? ‘부정적 사고의 힘’이라고 번역한 어떤 서양사람이 있었다. 핵심을 짚었다.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는 한 마디로 반항이다. 노자의 부정과 까뮈의 반항, 무언가 통한다.

족보가 있다. 원래 동양사상은 인간중심 철학이다. 공자도 신을 경원했다. 석가는 인간을 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신을 섬기는게 아니라 인간이 신의 레벨로 올라서는 것이다. 이건 방향이 다른 거다.

묵자는 반항을 했고, 법가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폭로했다.(한비자는 마키아벨리와 비견할 인물인데 민주주의를 발명할 뻔 했다.) 원래 군주의 통치권은 신권으로부터 위탁받는 것인데 한비는 이를 과학으로 대체한 것이다.

동양철학은 원래 출발점이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다. 다만 공자의 언설이 헷갈렸을 뿐 아니라 황제들이 공자의 사상을 통치에 이용할 의도로 조직적으로 왜곡했다. 그래서 공자가 황제의 통치권이 신권에서 위탁받는다(동중서의 천인감응설)는 거짓말을 해준 것처럼 잘못 알려졌다. 공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서양으로 눈을 돌리면 실존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있고 마르크스는 칸트를 비판하고 있고 칸트는 교부철학을 비판하고 있고 교부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계승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기독교의 구원개념을 등치시켰다. 그러므로 플라톤에서 마르크스와 샤르트르까지 한 줄에 꿰는 족보가 완성되는 것이며 이들은 그 이전단계를 비판하고 있지만 본질은 한통속이다.

본질로 보면 샤르트르=마르크스=칸트=플라톤까지 이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합리주의다. 단지 버전을 바꾸어 온 것이다. 샤르트르와 마르크스와 칸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차이란 도스와 윈도와 윈도XP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반대편에 디오게네스와 마키아벨리와 니체와 까뮈가 있으나 이들도 소박하게 합리주의 전통에 안티를 하는 보완재에 그치고 있다. 대체재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서구철학은 기독교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전혀다. 꽝이다.

근본적으로 모델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까뮈의 부조리라는 것도 칸트의 합리주의 모델을 소박하게 의심하며 시크한 표정을 짓는 정도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하면 서양에는 철학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모델을 바꾸는건데 그들은 모델을 바꾼 적이 없다. 인간의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구조이며 전제는 call이고 진술은 why다. 둘은 결정되어 있다. 인간의 언어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고도 정해져 있다.

call에 why를 충돌시켜 reason을 구하는 것이 서양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call은 신, 국가, 공동체, 가족 따위의 상부구조로 정해져 있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행동을 짜맞추는 것이 합리주의다.

부조리는 그렇게 세팅된 전제와 진술의 구조를 송두리째 타파하고 원점에서 새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까뮈 역시 안티를 걸었을 뿐 그 패러다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동양사상으로 말하면 죽림칠현의 완적과 혜강으로부터 완전한 답이 나왔다. 패러다임을 깨뜨린 것이다. 전제를 부정해 버린다. 무의식적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이 없다. 기본 전제가 없다. 희망과 욕망을 부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완벽하게 부정했을 때 몸의 반응이 들려온다. 거기서 출발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본이 없는 거다. 요즘 TV에서 하는 일밤 – 아빠! 어디 가?는 대본이 없다. 정글의 법칙도 대본이 없다. 리얼리티쇼다. 그런데 설정은 있다. 시트콤의 본질이 그러하다. 애드립을 따는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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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해진 대본을 버리고 애드립을 치는 것이 돈오입니다. 여전히 대본대로 움직이는 수구꼴통이나 무뇌좌파들과 우리는 가는 길이 다르며 영원히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들은 짐승입니다. 인간은 집단지능을 만들고 짐승은 정해진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 두 세계가 절대로 만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세계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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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3-01-2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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