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게시판의 ‘질문-숨은 전제를 찾아보세요’에 대한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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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자기 포지션이 있고 그 포지션을 기준으로 말합니다. 종교인은 종교인의 입장이 있고, 심리학자는 심리학자의 입장이 있고, 법률가는 법률가의 입장이 있습니다. 각자 자기 방식으로 코끼리를 냉장고에넣습니다.
‘사람마다 다르다. 딱맞는 정답은 없다’ ..는데 흥미를 느끼고 그쪽으로 몰아가려는 사람 많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지성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다양성 속에 일반성 있고 특수성 속에 보편성 있습니다. 정답을 찾아야 합니다.
숨은 전제는 각자의 자기 기준입니다. 법륜은 종교인 관점에서 말합니다. 법륜 말대로 피해자가 도를 닦더니 가해자를 용서하고 해탈하여 부처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종교의 특수성입니다.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특수한 입장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겨레에 실으면 안 되죠. 편집장의 잘못입니다. 종교인도 신문에다 말할 때는 특정 종교의 입장을 떠나 다중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말씀을 해야합니다.
법륜의 말은 종교까지 안 가더라도 보통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보통사람이 주변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한강에 배 지나간 거다. 니가 참으면 되잖아.’ 이럽니다. 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으니깐요. 포기하는 거죠.
그런데 피해자는 왜 법륜에게 상담을 요청했을까요? 법륜이 해 준 이야기는 보통 사람이 하는 이야기인데 피해자도 보통사람이니까, 그 정도라면 피해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말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참자.’
피해자의 숨은 전제가 있습니다. 만약 아프리카 부족민 사회라면 어떨까요? 거기에는 근친간 성폭행이 매우 많습니다. 왜냐하면 정글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인을 만날 기회 자체가 아주 없으니까요. 끔찍합니다.
정글의 법칙에 나온 와오라니족은 인구의 54퍼센트가 살인에 의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살인이나 질병이 아닌 자연사를 찾았더니 8대까지 거슬러가서 겨우 2명을 찾았는데 그 중의 한 명은 그래도 창으로 찔렀답니다.
살인에 의해 죽는게 정상인데 늙어서 자연사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죽기 전에 창으로 찔러드렸다는데. 기절할 일입니다. 부족민 사회를 낭만적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살인에 의해 죽는게 정상인 사회입니다.
베네수엘라의 야노마미족은 더 지독한데 처음 탐험가와 접촉했을 때 40대 이상의 남자는 없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남자가 없으므로 자연히 모계사회입니다. 모의전쟁을 벌여 나무 몽둥이로 머리통을 때려서 죽입니다.
부족민 사회를 비하하고자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게 적나라한 인간의 맨얼굴이라는 거죠. 불과 65년 전에 백인들은 단숨에 8천만명을 죽였지 않습니까? 일본인도 대살인 행사에 가담했고. 그것이 인간의 출발점.
고립된 지역의 피해자는 법륜의 처방을 따릅니다. 그냥 ‘내 팔자야’ 하고 넘어갑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요. 어차피 내일 죽을게 뻔한데. 아니면 모레 죽을거고. 남자든 여자든 다 살해당하는 판에 팔자좋게 우울증 타령?
부족민이라면 피해자의 우울증이 사치입니다. 그런데 문명인은 그런 사치를 누려도 됩니다. 무엇인가?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본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어도 안 합니다.
법륜의 처방.. ‘도를 닦으시오.’ 피해자.. ‘미쳤냐? 싫어.’ 의도적이라는 점을 간파해야 합니다. 숨은 전제를 찾아야 합니다.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의도적입니다. 그것으로 공동체에 다가가서 사회에 스트레스를 가합니다.
법륜이 모른 것은 피해자의 행동이 무의식 상태에서의 의도된 행동이라는 점입니다. 이거 중요합니다. 답을 모르는게 아니고 본심에서 다른걸 원한다 말입니다. 그게 뭘까요? 종교는 사람이 모인 것입니다. 공동체지요.
사람이 모이면 힘이 있고, 힘이 있으면 해결책을 내야 합니다. 피해자가 우울증에 걸린 것은 상처 때문이 아니고, 사회 때문입니다. 정글이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갑니다. 사회가 답을 내야 합니다.
피해자는 자기 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게 아니라, 사회에 질병이 있음을 발견하고 사회의 문제를 보고하려 하는 겁니다. 피해자의 우울증은 성폭행 피해 때문이 아니고 사회의 질병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사회의 일원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울합니다. 그런 사회를 용납 못하는 거죠. 무엇인가? 법륜은 피해자가 질병에 걸렸고 치료를 원한다고 믿지만 착각이고 사회가 질병에 걸렸고 피해자가 그걸 본거죠.
피해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족민 사회라면 다 극복합니다. 문명사회이므로 의도적으로 안 합니다. 그런 마음 깊은 곳에서의 울림소리는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채 무의식적으로 작동합니다.
그것이 존엄입니다. 존엄은 존중받겠다는 의도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자신이 사랑한다는걸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유없이 짜증이 나고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상대가 괜히 얄미우면 사랑에 빠진 겁니다.
피해자의 우울증도 같습니다. 뇌가 무의식 상태에서 환경을 읽고 고도의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사회의 고통을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보통 자기 문제는 잘 해결합니다. 이가 아파도 참고 팔이 아파도 잘 참습니다.
사람이 참지 못하는건 사회가 아플때입니다. 아기가 아플 때 엄마가 아기보다 더 아픕니다. 무의식적으로 사회를 아기로 보았기에 피해자가 우울합니다. 사회라는 아기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피해자는 봐버렸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선거에 졌기 때문이 아니고, 한국의 질병을 봤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가장 많이 아프고, 깨달은 사람이 가장 많이 아프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개나 돼지가 아픕니까?
일베충들 보세요. 자신이 관광당했다는거 모르고 잘먹고 잘 살잖아요. 왜? 벌레니까. 성폭행 당해도 성은을 받았다고 믿으면 일베충답게 행복합니다. 일부 정명석 패거리나 일부 한농복구회 신도처럼. 부인을 바친대나.
피해자는 법륜이 걸린 병을 봐버린 것입니다. 중생의 질병을 봐버린 부처처럼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의식의 존엄판단은 소속된 공동체의 물리적 사이즈와 상관이 있습니다. 신발이 작으면 아픈것과 같습니다.
너무 작거나 너무 큰 공동체에 소속되면 아프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말리아인의 고통에 무심하듯이 그게 전달이 안 됩니다. 피해자는 명백히 가해자와 자신의 물리적 거리, 사회와 자신의 물리적 거리를 계산합니다.
좁은 지역이면 어차피 같이 살아야 되니까 참습니다. 옆사람이 방귀를 뀌어도 참습니다. 한국인은 붐비는 지하철에서 누가 밀쳐도 잘 참습니다. 한국에 온 독일인은 절대 못참습니다. 밀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왜 안해?
너무 좁은 지역에 살거나 너무 넓은 지역에 살면 누가 밀쳐도 사과를 안 합니다. 그 사과하는 거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가 방귀를 뀌었는데 사과를 받아낸다고 한들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그때는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100층까지 가는데 층마다 선다면? 이때는 문제가 심각해 지겠지요. 계속 방귀를 뀌어댄다면? 참는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좁은 지역이면 어차피 같이 살아야 하니까 용서하는게 맞고, 적당한 넓이의 지역이면 같은 사건이 재발되어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므로 범인을 찾아내서 징벌하는게 맞습니다. 방귀 뀐 놈 잡아다가 족쳐야 합니다.
‘네가 엘리베이터에서 방귀 뀌었지?’
한국인의 행동에는 좁은 반도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타블로나 유승준이나 박재범은 외국으로 쫓아버리면 된다는 식이지요. 근데 싸이가 뜨는 것을 보면 한국은 전혀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계가 좁다는 말입니다.
싸이가 뜨면 타블로나 유승준이나 박재범도 할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싸이 혼자서 고군분투할 때 같은 해외파인 유승준, 박재범, 타블로가 도와주면 좋잖아요. 근데 이걸 무의식이 기가 막히게 포착합니다.
◎ 한국은 좁다 - 타블로, 유승준, 박재범은 외국으로 쫓아버리면 된다.
◎ 세계가 좁다 - 타블로, 유승준, 박재범은 외국에서 싸이를 돕게 하면 된다.
머리로 생각하여 판단하는게 아니고 상호작용 안에서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의 사이즈에 따라 대응을 결정합니다. 그것이 존엄의 작동원리입니다. 1초만에 결정이 내려집니다.
보통은 공동체에 걸린 공기의 긴장을 읽습니다. 지나치게 사회가 긴장되어 있을 때와 느슨할 때의 행동이 다릅니다. 어떻든 상호작용으로 해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 피해자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았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완성하라는 무의식의 명령 때문이다.
◎ ‘세상은 아름답지 않아’ 하고 극복하려 하면 창녀나 깡패가 된다.
◎ ‘세상은 아름답다’는 피해자의 전제를 깨지 않고 답을 찾아야 한다.
◎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최대한의 반응을 끌어내면 치유된다.
성폭행 피해자가 연예인 등으로 성공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경우는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최대한의 반응을 끌어낸 경우입니다. 어떻든 피해자의 무의식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의 부름 소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치과병원이 없을 때는 ‘아파도 참아라’고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멀쩡하게 잘 지어진 치과가 있는데 ‘참아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근데 치과가 있다는 사실을 봐버리면 아프지 않던 이도 슬슬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게 상호작용 원리.
피해자는 치과가 존재하여 있다는 사실을 봐버렸고 그래서 아픈 거고 그렇다면 이제는 치과가 치료로 응답할 때입니다. 환자를 치료하지 못한다면, 끝내 부름소리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회가 중병에 걸린 거죠.
행복한 일베충이 되기 보다는 우울한 부처가 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