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에 이어집니다.

믿음은 불완전에서 완전을 지향한다. 우리는 부분에 있고 완전은 모듈에 있다. 모듈은 공간에 팀으로 있고 시간에 기승전결로 있다. 공간에서 팀이 완성될때까지, 시간에서 기승전결이 완성될 때 까지 소비를 유보해야 한다. 작동을 유보해야 한다. 그것이 영웅신의 믿음이다.

선물은 기념일에 해야 하고, 축제는 가을 추수 후에 해야 한다. 그래야 빛나기 때문이다. 그래야 풍성하기 때문이다. 영웅신이 기도를 하고 부적을 쓰고 마나의 힘을 빌리는 것은 그 기승전결의 시간적인 절차를 견디기 위함이다. 혹은 팀의 꼭지점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커플은 발렌타인데이를 기다려야 하고, 솔로는 크리스마스에 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시조신의 믿음은 마주보고 대칭시켜 50 대 50의 균형을 만드는 것이다. 옛사람은 거울을 쪼개서 반씩 나눠가졌다. 깨진 조각의 톱니를 맞춰보고 신용의 증표로 삼는다. 이때 반쪽을 가지고 있으면 나머지 반쪽을 가진 사람이 언젠가는 자기 앞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남녀관계와 같다. 세상은 대칭이며 대칭은 음양이 조합되어야 완전하고 그 음양 중에서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면 나머지 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라면 진보든 보수든 한 쪽에 포지셔닝해야 한다. 중도의 자리는 없다.

양쪽을 다가지려 하기보다, 하나를 가지고 나머지 반쪽을 가진 사람과 제휴하는게 맞다. 투수를 하든 타자를 하든, 공격수를 하든 수비수를 하든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믿음에 맡겨야 한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도굴범들이 고서를 손에 넣으면 중요한 한 장을 뜯어서 숨기고 나머지를 팔아치운다. 이때 헐값에 사들인 골동품상이 진가를 알아보고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한다. 진품판정이 나면 수백억의 가격이 붙는데 이때 도굴범이 숨긴 한 장의 가격은 수백억이 된다.

그것이 완전성의 힘이다. 도굴범은 무식하므로 처음부터 전문가를 찾아갈 수 없다. 자칭 전문가에게 당하는 수가 있다. 최근 훈민정음 해례본을 훔친 자가 이런 일을 저질러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예가 있다.

누구든 인생에 있어서 숨겨둔 한 장은 있어야 한다. 50 대 50의 법칙이 작용하여 숨겨둔 한 장의 가치가 나머지 전체와 같아지며, 믿음은 그 대칭의 가치를 믿는 것이다. 팀이 발전할수록 언젠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게 된다.

하수는 혼자서 이것저것 다 잘하려고 하고, 고수는 자기 포지션만 잘하려고 한다. 팀이 성공하면 자기 포지션의 진가를 알아준다. 그러므로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 그것이 시조신의 믿음이다. 보통은 종교의 교단이 팀이 된다.

보통 우리가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강자를 섬기는 정령신의 믿음이거나 부적을 쓰는 영웅신의 믿음이거나 아니면 교단에 의지하는 시조신의 믿음이다. 관념신에 이르면 믿음의 의미가 퇴색하여 탈종교화 된다. 불교가 그렇고 유교와 도교가 그렇다.

불교는 상당히 종교화 되어 있지만 이는 신도들의 입장이 그러하고 깨달은 사람은 경허나 김시습처럼 환속하는게 맞다. 신도들은 불교를 정령신, 영웅신, 시조신으로 받아들이지만 스님들은 관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므로 어색한 장면이 연출된다.

도교는 원래 교단조직이 없거나 희미했는데 불교의 것을 차용한 것이다. 유교 역시 종교와 과학의 애매한 경계선에 머물러 있다. 불교가 일부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는 것도 대개 민간신앙과 결합한 것이다. 관념신은 을이 아닌 갑의 포지션이 되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믿는 것과 부모가 자식을 믿는 것은 다르다. 관념신 단계부터는 갑이 을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 사랑이거나 자비거나 지배다. 신도는 석가를 믿지만 석가는 신도를 믿지 않는다. 대신 자비를 베푼다. 그런데 이 역시 믿음에 속한다.

관념신은 기승전결의 기에 포지셔닝하여 권리를 장악하고 베푸는 것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았다. 가수들 중에는 음원을 공개하고 저작권 수입을 포기하는 전략을 쓰는 사람도 있다.

포털 사이트는 무료로 회원가입을 허용한다. 회비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관념신의 믿음이다. 단 이 전략은 기에 포지셔닝한 사람만이 쓸 수 있다.

먹자골목은 경쟁자가 많을수록 이익이 된다. 바닷가에 횟집이 하나 있는데 경쟁자가 나타나면 이익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경쟁자가 하나 더 출현하여 횟집이 셋을 넘으면 횟집골목으로 소문이 나서 더 많은 손님이 몰려든다.

여기에는 밸런스가 있다. 애플처럼 경쟁자를 제거할 것인가 아니면 구글처럼 파트너를 모을 것인가다. 구글의 전략이 더 구조론적이다. 구글의 믿음이 관념신의 믿음이라 할 수 있다. 더 높은 단계의 믿음이다.

소통신은 낳음이다. 그걸로 끝이다. 관념신이 기승전결로 전개하며 이득을 취하는데 비해 소통신은 한번 낳고 끝난다. 소아마비 백신을 발명한 사람이 로열티를 포기해 버린 것과 같다. 교류전기를 발명한 테슬라도 마찬가지다.

애플이 많은 순익을 거둬가는 논리는 그 이익으로 신제품을 개발하여 되돌려 주겠다는 거다. 그러나 한글은 한번 발명하면 끝이다. 돈오와 같다. 다음 단계가 없다. 바로 종결한다.

요즘 코미디도 기승전결의 형식이 아닌 공감개그 형태로 가고 있다. 보통 멍청이가 실수를 하고 똑똑이가 응징하는 형식인데, 개콘의 일부 코너들은 그런 상투적인 장치가 없다.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다 하고 끝난다. 잘못도 없고 응징도 없으며 교훈도 없다. 그 순간에 완성한다. 손뼉이 마주치면 완성이다. 하이파이브는 그 순간에 끝난다.

이때 구조론의 질이 세팅되어 있어야 한다. 개콘의 공감개그는 방청객들이 사전에 답을 알고있어야 한다. 웃음이 터지는 이유는 최효종이 위캔척을 하기 전에 스타크래프트의 앞마당 털기를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른다면 웃음은 터질 수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끌어냄으로써 단번에 완전에 도달하는 돈오가 소통신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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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3-03-0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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