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불안
신(神)의 문제에 대해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해보자 하는 생각은 나의 오래된 야망이다. 피를 끓게 한다. 누구도 꿈 꾸지 못하는 도전이다. 글 배운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경지다.
사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신의 문제로 하나로 귀결된다. 다른 말로는 존재불안, 혹은 허무라 할 수 있다. 인생이 허무하다, 죽음이 두렵다는 데서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극장에 삼천편의 영화가 걸려 있어도, 서점에 일만권의 문학서적이 깔려 있어도 결국 그 이야기다. 사랑한다거나 투쟁한다거나 결국 그 이야기다. 그렇다. 인간은 그저 신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신을 만나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허무는 극복된다. 존재불안은 극복된다. 돈이든 명성이든 성공이든 실상 신과 정면으로 대면할 배짱이 없는 이의 회피기동에 불과하다.
신을 믿는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신을 숭상하는 것이 신과의 정직한 대면은 아니다. 역시 신의 문제를 피하는 방법이다. 왜인가? 자기 입장을 내세울 뿐 신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믿음이 충전되어 있지 않은 자가 믿는다거나, 내면에 사랑이 충전되지 않은 자가 사랑한다거나 하는 소리는, 배터리가 고갈된 후레쉬에 전구를 연결하는 격이다. 그 불은 빛나지 않는다.
허망하다.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찬송가 소리가 허망하다. 사찰에서 행해지는 백팔배가 허망하다. 에너지가 있어야 진짜다. 에너지는 증폭된다. 증폭기를 가져야 진짜다. 배터리를 채워야 진짜다.
짝사랑이 아니어야 한다. 짝믿음이 아니어야 한다. 대신 무언가를 지불해야 한다거나 혹은 믿음에 의해 삶이 통제된다면 비참하다. 사랑이 삶을 빛나게 하는가 아니면 위축시키는가를 생각하라.
통제되는 믿음, 위축되는 믿음은 가짜다. 진정한 믿음은 권(權)의 획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승전결의 기에 설때만 가능하다. 일의로 인과를 통제할 때만 가능하다. 삶의 배터리는 충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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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문제는 삶의 전일성에 대한 것입니다. 앞뒤가 맞아떨어지게 하는 것, 원인과 결과가 호응되게 하는 것, 동기와 실천이 바르게 짝지워 지는 것, 의미가 있고 감동이 있고 널리 증폭되는 것. 아름답게 완성하는 것. 허무를 극복하는 것.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것. 손뼉이 마주쳐서 소리를 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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