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명상법
수행
기도, 염불, 108배와 같은 절하기, 라마교의 마니차 돌리기, 채소밭 가꾸기 등의 육체노동, 태극권과 같은 무술수련, 그 외에 요가, 음악연주 따위의 어떤 육체적 행위를 동반한 수행이 모든 명상의 기초가 된다.
종교의 계율을 지키는 행위도 이 범주에 속한다. 불교의 차 마시기, 향 피우기, 회교 시아파 수피즘의 세마 춤추기, 기독교의 금욕, 금식, 할례, 토굴수행 따위가 있다. 이들은 어떤 황홀경의 영적체험을 기대한다.
사마타(지, 止)
잡념을 막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깊이 몰입하는 삼매(사마디, 정, 定)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위빠사나(관, 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전체과정을 분석적으로 관찰한다. 사마타로 삼매에 이른 다음 생성과 소멸의 사이클, 곧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한다. 자연의 완전성에 반영된 패턴에서 입체적 모형을 탐구한다.
간화선(禪)
자연의 패턴을 통합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직관이다. 직관을 불러내는 단서가 되는 화두를 들고 그것을 해결하여 타파한다. 화두는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대한 모형이며 모형은 어떤 구조적 모순을 반영한다.
모순의 극복은 관점의 이동으로 가능하다. 관측자의 포지션을 깨달음으로써 선형사고에서 입체적 사고로 비약할 때 화두는 타파된다. 선형사고는 작용과 반작용이 선 상에서 교착되는 흑백논리-이분법적 사고다.
화두의 타파는 선형사고를 극복하는 입체적 사고로 가능하며, 그것은 서술형사고를 극복하는 모형적 사고이다. 모형을 얻을 때 사건은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비약하며 모형은 에너지의 순환경로를 반영한다.
직관적 모형
명상하려면 몸이 반응해야 한다. 몸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은 자연의 패턴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이 말하면 집중하게 된다. 자신의 잊혀진 추억을 다른 사람의 시(詩)나 노래에서 발견하면 기쁘다.
참된 명상은 그러한 뇌의 물리적 반응에 기초하며 그 반응은 사건에 관측자를 투입하여 포지셔닝한 모형적 사고에서 얻어진다. 모형적 사고를 하려면 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메커니즘이다.
존엄, 자유, 믿음, 사랑, 이상과 같은 추상적 단어에는 ‘A가 이렇게 되면 B가 이렇게 된다’는 관계식을 품고 있으며 그것은 모형으로 기능한다. 물리학의 표준모형처럼 존재의 보편적인 모형이 존재한다.
정답은 르네상스 시대의 소실점(원근법), 뉴턴의 만유인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들어 있다. 공식에 대입하여 산수문제를 풀어내듯 모형에 대입하여 풀어내는 명상이 진짜다. 모형은 직관력에 의해 포착된다.
모형의 기본은 인과율이다. 석가의 연기법과 사성제, 탈레스의 물 일원론, 퇴계의 이원론, 율곡의 일원론, 유교의 주역과 원형이정, 음양론과 오행론,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유물론도 모형의 일종이다.
구조론은 완전한 모형을 제시한다. 그것은 귀납적 사고를 극복하게 하는 연역적 사고다. 모형없는 사고는 없다. 모든 사고는 모형에 기초하며 단지 낮은 단계의 모형이냐 제대로된 모형이냐의 차이 뿐이다.
그냥 생각해서 답을 찾는 경우는 없으며 대개 경험에 기초한 원시적인 모형에 짜맞춘다. 그 모형은 대개 고저, 장단, 원근, 상하, 시종, 강약, 음양, 길흉과 같은 이항대립의 서술구조로 되어 있다.
◎ 원시모형 –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 쌍
◎ 입체적 모형 –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관측자(에너지)
경험에 기초하는 원시모형에는 관측자의 포지션과 에너지의 순환개념이 빠져 있다. 원시모형에 관측자 혹은 에너지를 투입할 때 입체적 모형이 획득된다. 화두는 깨지고 위빠사나와 사마타는 전개된다.
명상의 발달
◎ 수행
◎ 사마타
◎ 위빠사나
◎ 간화선
◎ 직관적 모형
명상의 발달단계는 수행≫사마타≫위빠사나≫간화선≫직관적 모형이나 이러한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순서는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는 인간이 명상을 이해하는 단계이다.
문제는 인간의 귀납적 사고다. 실패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라야 한다. 명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명상한다면 가짜다. 마음이 상황을 만나 생각을 일으키는 순서대로 가야 한다. 결대로 가야 한다.
실제로는 모형의 직관≫간화선≫위빠사나≫사마타≫수행의 순서다. 모형을 모르는 상태에서 우연히 모형이 떠올라 약간의 성과를 얻는 식이기 때문에 그 모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서 거꾸로 된 것이다.
◎ 질 - 직관적 모형
◎ 입자 - 간화선
◎ 힘 - 위빠사나
◎ 운동 - 사마타
◎ 량 - 수행
명상은 두뇌의 흥분에 따른 쾌감에 의한다. 쾌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직관이다. 직관은 자연의 기승전결로 전개하는 패턴에서 모형을 포착한다. 모형은 입체적 모형이며 상호작용을 반영한다.
‘A면 B다’ 하는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 모형에 숨어 있다. 이를 일어난 사실에 대입하여 독립적 사건으로 풀어내는 것이 참된 명상이다. 이때 사건에 관측자와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이 중요한 테크닉이다.
◎ 모형은 사실에서 사건을 도출한다.
◎ 사실은 흩어진 여러 단서들이고 사건은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다.
◎ 흩어진 단서를 모으는 것은 관측자 또는 에너지다.
◎ 관측자의 이동과 에너지 흐름에 따라 연동됨을 본다.
관측자가 없으면 빛에 연동되어 그림자가 생기는게 아니라 그림자가 원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빛과 그림자는 쌍이다. 경험과 재현도 하나의 쌍이다. 경험이 재현되며 쌍의 짝짓기가 일어날 때 전율한다.
이때 A와 B의 일치, 원인과 결과의 호응, 작용과 반작용의 반응, 질문과 대답의 대칭, 시작과 끝의 일치, 노력과 보상의 합일에서 전율하는 마음의 하이파이브가 일어날때 쾌감을 얻는다.
쾌감에 의해 집중하여 사마디의 지(止)에 이르면 진짜다. 느낌이 없는데 억지로 육체적 고통을 가하고 그것을 쾌감으로 착각하는 수행은 가짜다. 대부분의 수행은 명상없이 억지 쾌감을 얻으려는 것이다.
금욕, 금식, 할례, 신체절단, 목욕금지, 눕지않기, 잠 안자기 등의 극단적인 신체자극을 추구하거나 무술수련, 호흡조절, 기도, 노래, 춤과 같은 예술에 준하는 활동 혹은 엄격한 계율의 실천을 추구한다.
이는 본질에서 샤먼의 무아지경이나 무속인의 신내림, 굿판, 기독교의 은혜받기, 방언하기와 유사한 준정신질환 또는 신경증이다. 이들은 일종의 정신병적 황홀경 상태에 도달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명상의 쾌감은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다른 방법으로 그런 느낌을 얻으려는 노력은 어리석다. 중요한 점은 구조론의 결인 질≫입자≫힘≫운동≫량의 절차를 따르지 않고 량에 바로 도달하려 한다는 점이다.
양은 침투한다. 수행은 육체에 무언가를 침투시키려는 것이다. 사마타 역시 접근방법이 잘못되어 있다. 명상을 해서 사마디에 이르는 것이지 사마타를 해서 사마디가 되는 일은 없다. 대개 머리에 힘 주고 있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자기를 학대하여 쾌감을 느끼려 한다. 정신나간 상태가 되면 무아지경의 체험이라며 만족해 한다. 기독교의 ‘은혜 받는다’는 주술이나 무속의 신내림 현상과 다를바 없다.
위빠사나는 관찰이다. 생성과 소멸의 완전성을 순서대로 관찰한다. 관찰하려면 관찰대상이 있어야 한다. 화두가 있어야 위빠사나가 가능하다. 화두가 없이 그냥 관찰은 수준이 낮다.
생성과 소멸의 이치를 포착하려면 먼저 그 이치를 알고 있어야 한다. 직관의 모형을 가진 깨달은 사람만이 위빠사나를 할 수 있고, 위빠사나를 통해 사마타에 이르며, 사마타를 통하여 수행이 되는 것이다.
간화선은 입자가 있다. 입자는 패턴이다. 관(觀)은 생성과 소멸의 완전성을 탐구한다. 완전성의 단서가 화두다. 모퉁이길에서 돌출한 뿔을 보았다면 그 뒤에 숨은 소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관측자의 포지션이다. 관측자의 포지션이 고정되면 모순이 성립하여 선형사고의 한계에 갇힌다. 화두를 깨는 것은 모순을 깨는 것이며 이는 관측자의 포지션을 깨닫는 것이다.
관측자는 에너지로 대체된다. 정지해 있는 공은 앞도 없고 뒤도 없다. 그러나 공이 회전하면 앞과 뒤가 생긴다. 회전력이 에너지다. 지구에서는 달 뒷면을 볼 수 없다. 달이 한 달에 한번 자전하기 때문이다.
달의 자전을 알아채려면 지구 바깥으로 나가서 달 뒷면을 보아야 한다. 자기가 사물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관이다. 이때 달을 회전시키는 만유인력의 존재가 곧 에너지다.
버스 안의 파리가 버스가 달린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면 버스 밖으로 나가보아야 한다. 관측자의 포지션을 바꿈으로써 사건의 전모를 보게 될 때 화두는 깨진다. 역시 관측자가 에너지 역할이다.
관측자의 포지션을 바꿀 때 소실점을 발견하고,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기승전결의 전체과정을 발견하고 완전성을 발견한다. 그러한 포지셔닝 없고 포메이션 없는 막연한 간화선은 실패다.
그냥 화두를 든다고 들어지는게 아니다. 연장을 써야 한다. 도구가 있어야 한다. 공식에 맞추어 풀어야 한다. 참된 깨달음은 직관을 쓰며 인간의 직관은 자연의 패턴에 대응한다. 둘은 대칭된다.
◎ 자연의 패턴 ↔ 인간의 직관
패턴은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질과 양, 빛과 어둠, 앞과 뒤, 생성과 소멸처럼 짝지어진 둘을 평면상의 선으로 이해하지 않고 거기에 관측자의 포지션을 포함한 입체적 구성으로 비약시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에 에너지를 투입하면 평면에서 입체로 비약한다. 서술에서 이미지로 차원을 올라선다. 그럴 때 메커니즘이 포착되고, 상호작용이 포착되고 상부구조가 확인된다. 장(場)이 파악된다.
에너지의 진행경로가 확인된다. 전체가 한 줄에 꿰어진다. 수영장에서 발이 바닥에 닿을 때의 뻑적지근하게 차오르는 충일감을 느끼게 된다. 뿌듯하고 당당한 느낌을 갖게 된다.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
피아구분의 장벽이 없어지고 세상과 하나가 된 전일적인 느낌을 얻게 된다. 느낌은 결과일 뿐 목적이 아니다. 거짓 느낌을 얻으려고 육체의 활동을 수반하는 어떤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수행이다.
기도를 하든, 삼천배를 하든, 태극권을 하든, 찬송을 하든, 금식을 하든 모두 가짜다. 무엇보다 존재에 대한 개념을 잡아야 한다. 대개 입자에 빠져 있다. 입자는 가짜다. 존재는 에너지며 에너지는 동(動)이다.
입자는 정(定, 사마디)이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관측자가 있다. 정(定, 사마디)의 입자에 관측자를 투입하여 동(動)을 끌어낼 때 존재는 일어선다. 그럴 때 낳음의 자궁은 세팅된다. 그래야 진짜다.
말은 동(動)이나 그 말을 탄 기수는 정(定, 사마디)이다. 말을 타지도 않고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정(定, 사마디)타령을 하면 가짜다. 명상이 고요함이나 편안함, 마음의 이완된 상태를 추구하면 가짜다.
진짜는 파도를 타는 서퍼와 같다. 고요하지만 고요하지 않다. 맹렬하다. 에너지가 있다. 기승전결이 있다. 진정한 고요함은 대상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권에 의지한다. 창작자는 고요하고 표절자는 분주하다.
우주왕복선이 우주정거장에 도킹할 때의 고요가 진짜다. 멈추어야만 관측자를 태울 수 있다. 멈추어야만 에너지를 투입할 수 있다. 달리는 자동차도 주유소에 서야만 기름을 넣을 수 있다.
그냥 서 있는 것은 고장난 거다. 달리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다. 진정한 것은 탄생의 고요함이며 그것은 매우 격렬한 것이다. 그것은 정(定)이 아니라 혜(慧)다. 혜는 관측자가 있고 에너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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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배기를 깨달으면 명상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총을 만들었다면 다음엔 그 총을쏘아야 합니다. 계속 총을 만들고 있다면 아직 총을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계속 명상하고 있다면 명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명상의 결과물을 제시하면 됩니다. 그 결과물은 영화도 될 수 있고, 시도 될 수 있고, 음악도 될 수 있고,패션도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고, 여행도 될 수 있고, 삶도 될 수 있습니다. 풍성해져야 진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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