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서 사발님이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이라는 책을 권한다. 이 양반이 1950년에 죽었다고 하니, 약간 오래된 옛날 사람인데 라즈니쉬를 비롯한 80년대 히피명상붐의 원조가 되는 모양이다.
대충 훑어본 바로 말하면 책만 두꺼울 뿐 같은 말의 끝없는 반복이다. 맞는 말도 있고 허튼소리도 있는데, 720페이지는 종이 낭비다. 아니 두터운 종이 소유를 욕망하는 허영심을 파는 상술이 맞겠다.
이 양반의 종지는 진아(眞我)를 찾는 것이다. 720페이지가 이 한 줄로 요약된다. 뭐 좋다. 그런데 걸리는 것이 있다. 이 양반은 스승없이 17살 때 혼자 깨달았다면서도 스승을 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연히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스승없이 깨달았다매?’ 변명한다. ‘나의 스승은 아마도 나의 전생에 만났었나 보다.’ 이는 인도 명상가들의 특징이다. 이른바 구루병이다. 구루를 섬기는 병이다.
소승불교의 굴레를 벗지 못한 것이다. 대승은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한다. 스승 좋아하네. 구루를 숭배한다면 명상이 아니고 사설종교다. 대승은 무엇이 다른가?
대승은 스승의 자리에 세력을 놓는다. 세력이 있으면 상호작용이 있고 가는 길이 분명해지며 구루는 필요없다. 문제는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느냐다. 생장점이 있고 현대성이 있느냐다. 상호작용이 있느냐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정신도 아니다. 인격도 감정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매일신문)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운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프라나 등의 다섯 가지 기(氣)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각성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한겨레)
마하리쉬가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란다. 필자가 근래에 말한 ‘나는 나의 육체도 아니고, 나의 정신도 아니고, 나의 독립적인 의사결정 영역이다.’는 말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문제는 아니다, 아니고, 아니며, 아니매라 하는 부정어법의 남발이다. 부정어법만으로는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 긍정어법을 써야 한다. 이는 필자가 노상 써먹는 썰매개의 딜렘마와 비슷하다.
16마리 썰매개의 대장개는 NO밖에 말할 수 없다. Y자 모양의 갈림길에서 길잡이 개가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사납게 짖어 NO를 구사한다. 오류는 바로잡힌다. 그런데 개들이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
곤란하다. 이 경우 개들이 속도를 못 낸다. 방향이 맞는데도 혹시나 잘못되었을까 하여 전전긍긍하며 대장개의 눈치를 본다. 이때 대장개가 사납게 짖어 길을 재촉하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난다.
개들이 ‘아 길을 잘못들었나보다’ 하고 공연히 방향을 트는 수가 있다. 이때 대장개는 다시 사납게 짖어 NO를 해야 한다. ‘아냐 아니라니깐. 계속 가자니깐. 이 방향이 맞다니깐.’ 대장개 속 터진다.
NO병을 극복하고 긍정어법으로 정답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 완전성이다. 무엇이 완전한가? 입자는 불완전하고 질이 완전하다. 나의 질은 무엇인가? 나의 질은 나의 탄생이다.
흔히 아기는 완전하다고 한다. 왜 아기는 완전한가? 북은 북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가죽에 불과하다. 북은 북채에 있지 않다. 그것은 나무막대에 불과하다. 몸이 북가죽이면 나의 마음은 북채다.
몸도 마음도 내가 아니다. 진정한 북은 북소리에 있다. 북에는 북소리가 없다. 북채에도 북소리는 없다. 북소리는 북과 북채의 관계에 있다. 둘의 연주에 있다. 악보 속에 있다. 관객의 마음에 있다.
울려퍼짐에 있다. 아기가 완전한 이유는 아기가 북소리이기 때문이다. 북소리는 북과 북채 사이에 있다. 아기는 아빠와 엄마 사이에 있다. 아기가 완전한 이유는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 아기는 어른 곧 성인과 비교한 아기가 아니다. 전혀 다른 의미다. 이쯤 되면 완전성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아기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아기는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 불완전하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가 없다. 질, 입자, 힘, 운동, 량만 알면 된다. 질은 자궁이다. 자궁은 엄마와 아빠의 관계다. 입자는 아기다. 부모 사이의 아기는 완전하지만 부모를 떠난 아기는 죽는다.
아기가 완전하다고 말하면, 엄마 품에서 아기를 떼어놓고 아기를 섬기며 아기교를 만들 판이다. 엄마품을 떠난 즉 아기는 죽는다. 북을 떠난 즉 북소리는 죽는다. 질을 떠난 즉 입자는 죽는다.
무엇인가? 라마나 마하리쉬는 질의 개념을 알고 있다. 그는 질과 입자의 관계를 바다와 파도의 관계로 비유한다. 파도는 바다 안에서 유의미하다. 바다를 떠난 파도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북을 떠난 북소리, 엄마를 떠난 아기, 관계를 떠난 입자는 죽는다. 질에서 떼어낸 입자는 죽는다. 마하리쉬는 진아를 찾으라고 말하지만 무리다. 그런 식으로는 부정어법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하리쉬가 아무리 북에서 북소리를 떼어낼 수 없다고 강조해도 제자들은 1초만에 떼버린다. 필자가 늘 말하듯이 스승이 일원론을 해도 제자는 잽싸게 2원론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공식이다.
북과 북소리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 일원론이면 북과 북소리를 분리하는 것은 이원론이다. 그런데 반드시 이원론으로 변질된다. 스승이 아무리 진아를 찾으라고 해도 제자는 가짜 나를 찾는다.
스승의 꾸짖음은 끝없이 계속된다. 수행은 계속된다. 돈오는 실패하고 점수에 머물러 있다. 왜?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악보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진리를 전달할 언어가 없는 것이다.
왜 서양음악이 발전했는가? 누군가 오선지에 콩나물대가리를 그렸기 때문이다.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돈오가 가능하다. 돈오를 이루어야 비로소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상부구조가 세팅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자가당착적인 마하리쉬의 구루타령은 상부구조의 부재, 자궁의 부재, 북에서 북소리를 뗄 수 없는 딜렘마, 엄마품에서 아기를 뗄 수 없는 딜렘마 때문이다.
누군가 오선지에 악보를 그림으로써 문제는 해소된다. 한 방에 끝난다. 악보만 있으면 북이 없어도 북소리는 남는다. 바하는 없어도 연주는 남아있다. 베토벤은 갔어도 그의 연주는 영원하다.
악보를 그렸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언어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매뉴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언어가 없이 진리를 전달하려고 하니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의 덫에 걸린다.
문제는 사람들이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의 오류를 매우 즐거워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니 참 다행이다. 악보로 그리면 우리 악사들은 졸지에 실업자 된다네 이런다.
사진기를 발명하면 화가는 굶어죽는다. 방해해야 한다. 구조론이 등장하면 사이비들은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방해해야 한다. 악보를 그리면 개나 소나 다 연주를 하겠다고 덤빈다. 곤란하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면 상놈들이 아는 척을 해서 곤란하다. 개나 소나 진리를 알아버리면 구루들은 밥을 굶게 된다. 방해해야 한다. 이거다. 병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텐가?
존재는 입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궁에서 독립한 아기, 질에서 떼어낸 낱개, 관계를 잃은 나는 없다. 포지션을 잃은 축구선수는 없으며, 투수도 아니고 타자도 아니면 그는 야구선수가 아닌 것이다.
야구선수는 그라운드에 서야 선수이고, 축구선수는 포지션을 가져야 선수이고 북소리는 악보를 가져야 살아남고, 아기는 엄마 품에서 완전해지며, 돈오는 세력 안에서 생장점을 얻는다.
진리는 구조론이라는 바른 언어를 얻어야 비로소 위대해진다. 그림이 카메라를 얻어야 만리 밖의 사람도 고흐를 알게 되고, 소리가 악보를 얻어야 베토벤을 알게 되듯, 진리가 언어를 획득해야 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때문에 개나소나 성경을 해석해서 기독교가 난장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아랍의 회교가 처한 문제가 바로 그 때문이다. 회교는 성직자가 없기 때문에 아무나 해석한다.
아무나 경전을 해석하면 극단주의가 무조건 이긴다. 마호멧이 ‘그건 삼가야 하지 않을까?’ 하면 경전을 해석하는 이맘들과 율법사들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말라.’ 강조해야 명성을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해석의 권한을 카톨릭이 독점한다면 중세의 암흑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소승불교가 구루의 기득권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냥 놔두면 개판 되니깐.
민주주의 시스템이라는 상부구조가 없으니 독재를 해야한다는 식이다. 실제로 러시아 돌아가는 꼴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는 섣불리 민주주의 하려다가 전쟁만 끝없이 계속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시스템을 건설하면 된다. 상부구조를 만들면 된다. 구조론을 만들면 된다. 긍정어법을 만들면 된다. 카메라를 만들면 된다. 악보를 그리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소승의 문제는 질에서 입자를 떼어내는 문제이고 소승은 이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구루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며 이는 독재자의 속임수이고 소승의 실패이며 대승은 세력으로 민주주의 시스템의 질을 세팅하여 이를 해결한다는 거다.
◎ 소승 - 구루 없으면 개판
◎ 회교 - 성직자 없어서 극단주의로 파탄
◎ 대승 - 세력으로 힘 만들어 해결
세력의 방향성이라는 자궁 안에서 제자는 독립하고 돈오는 가능하다. 아기는 엄마를 가진다. 깨달음은 힘을 얻는다. 비로소 완전해진다.
소승불교는 답을 찾지 못하며 허무에 빠져서 결국 윤회로 도피한다. 과거로 도망치는 것이다. 대승은 답이 있으므로 현실과 투쟁한다. 역사의 현장 안에서 진보라는 방향타를 찾아내고 문명이라는 항해를 쉬지 않는다.
정답은? 힘이다. 힘은 에너지의 순환 안에 있다. 야구선수의 힘은 시즌에 있고 축구선수의 힘은 시합에 있고 정치인의 힘은 선거에 있고 작가의 힘은 작품에 있고 깨달음의 힘은 ‘우리편’에 있다.
크게 무리를 이루어 장벽을 깨뜨리고 미래로 나아가는데서 우리의 힘은 있는 것이며 명상은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힘을 주지 않는 명상은 필요없다. 명상의 의미는 당신에게 힘이 되어주는데 있다. 누가? 우리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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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제의 정답은 오직 하나 힘입니다. 소승은 혼자이고 혼자서는 힘이 없고, 그 때문에 허무하고, 따라서 윤회로 도피하거나 혹은 구루를 섬기라고 강요하며, 사이비로일탈하거나입니다. 대승은 우리편이고, 우리편이므로 함께 하고, 함께 하므로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승으로 부터 독립하고, 반복적인 수행을 벗어나 돈오합니다. 수행을벗어나 세상으로 나와서 제 목소리를 내야 진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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