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언어가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성경구절이 있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는 말도 있고,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는 장자의 언급도 있고, 태초에 무극이 있었는데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말도 있다.

누구 말이 맞느냐는 식이라면 바보다. 노자의 도덕경을 펼쳐놓고 글자구 한 자 한 자 따지겠다는 식이면 어리석다. 지금 영국인들도 세익스피어 시대의 햄릿을 제대로 해석 못하는 판이다.

노자는 진리를 말한 것이다. 진리가 뉴턴의 역학이면 노자가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며, 진리가 상대성이론이면 노자는 그것을 말한 것이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가리키는 방향을 보라는 말이다.

중요한건 태초에 무엇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태초를 사유했다는 것이다. 출발점을 찍는게 중요하다. 태초 다음엔 무엇이 있었을까? 기승전결로 전개되어 간다. 그것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태초에 언어가 있었다. 현상이 있고 그 현상을 명명하는 언어가 생긴 것은 아니다. 명명은 단어다. 최초의 언어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손짓발짓을 포함한 총체적인 의미에서의 의사소통이다.

부족민은 하나, 둘, 셋까지 밖에 세지 못한다. 혹은 하나 둘 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많다’이다. 홀짝 개념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가 먼저 생겼을까 아니면 둘이 먼저 생겼을까?

둘이 먼저 생겼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이므로 그것은 명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둘은 짝짓기다. 짝짓기가 먼저 나오고, 그 짝의 각각이 발견된 것이다. 구조론은 2가 먼저 나오고 다음이 1이다.

숫자 1은 가리켜지는 대상으로서의 사과와 가리키는 손가락의 짝짓기다. 어떤 것을 짝지으면 숫자가 탄생한다. 짝지으면 이미 2다. 원소가 모여 집합이 되는게 아니라 집합에서 원소가 나온다.

구조론은 연역이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이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는게 아니고 전체를 작동시키면 부분이 드러난다. 강물이 모여 바다가 되는게 아니고 바다가 호흡한 즉 강물이다.

알아야 한다. 바다는 바다보다 먼저 있었다. 최초에는 2가 있었고 그것이 자궁이다. 1은 입자고 2는 질이다. 2는 관계다. 관계가 먼저 있고 다음 개별적인 존재가 따른다.

2없는 1은 화살없는 활과 같고 총알없는 총과 같아서 존재가 부실하다. 1은 존재가 아니다. 혼자일 때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 2에 의해서 비로소 짝을 얻고 존재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태초에 2가 있었다. 그러므로 현상이 먼저 오고 다음에 언어가 온 것이 아니라 언어가 먼저 오고 다음에 현상이 온 것이다. 물론 그 언어가 한국어나 일본어는 아니다. 언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진리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없다. 그대가 진리라는 단어의 뜻을 알았다면 이미 진리를 알아챈 것이다. 뜻이 무엇일까 찾을 필요없다. 노자가 말한 무위나 자연의 뜻은 상관없다.

뜻의 뜻을 알았다면 그대는 이미 모두 안 것이다. 무위나 자연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뜻에 무위나 자연을 입힌 것이다. 뜻은 태운다는 뜻이다. 세상은 올려태움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노자가 말한 도덕의 뜻을 찾을 필요없다. 태초에 뜻이 있었고 그 뜻에 도덕을 태우면 된다. 윤리는 사회적 신용자산이고 도덕은 개인의 신용자산이다. 무엇이 도인지 찾을 이유가 없다.

방아쇠를 격발하여 발사되면 그것이 도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 개인의 문제이다. 사회는 무엇이고 개인은 누구인가? 사회가 개인을 격발하는 것이다. 사회가 개인을 태우면 뜻을 품은 것이며 뜻을 품으면 이미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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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3-03-2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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