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 어렵다는둥 천재가 어떻다는둥 이런 이야기는 정말 깝깝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뉴턴의 만유인력은 알고 있는가?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알아?
내가 만유인력을 처음 접했을때 망치로 얻어맞는듯한 충격을 받았다. 바로 구조론을 깨달았는데 2초가 걸릴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만유인력을 배우고도 구조론을 모를까?
간단하다. 실은 만유인력을 모르는 거다. 그냥 아는척 하는 거다. 왜? 그래도 된다. 문제없다. 밥 먹고 사는데 하자있나?
만유인력이란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거다. 구조론이란 존재가 구조로 되어 있다는 거다. 너무 쉽잖아. 이건 아는게 아니다. 그러나 그냥 밥먹고 사는데는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
다들 이 정도 알고 아는 척 한다. 구조론도 ‘존재는 구조다’ 이 정도 알고 아는척 하는 시대가 온다. 언제? 모두가 구조론을 알 때. 그 때는 아무도 구조론이 어렵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만유인력이 어렵다고 말하지 않듯이.
만유인력은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거다. 그런데 숨은 전제가 잔뜩 있다. 먼저 물체란 뭐지? 그리고 끌어당긴다는건 뭐지? 끌어당기려면 먼저 시공간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시간은 무엇이고 공간은 무엇이지? 이거 알려면 상대성이론을 넘어 양자역학을 넘어 표준모형까지 가야 한다. 아니 그래도 부족하다. 그렇다면 알긴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거지?
알긴 개뿔. 모른다. 그러나 다들 아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별 문제 없다. 밥 먹고 산다. 만유인력은 1초만에 알 수 있다. 구조론도 1초 만에 알 수 있다. 그러나 피상적인 이해다.
써먹으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만유인력을 써먹고 있는가? 전혀 안 써먹고 있다. 나는 만유인력을 구조론 연구에 써먹는데 여러분은 도무지 어디에 써먹고 있지?
중요한건 뉴턴 본인도 만유인력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는 거. 그런 힘이 있다는건 알았지만 그게 왜 생기는지는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설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아직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중력을 해명해야 한다. 중력자에 대해서는 논의되고 있는 정도이다. 검증되지 않았다.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아는 정도이다.
그 바람이 왜 부는지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른다. 황사를 알려면 고비사막에 가봐야 한다. 신라인들도 황사를 알았지만 제대로 안건 아니다. 그냥 흙비가 내렸다고 기록해 놓았다.
만유인력은 그렇다치고 언어를 아는가고 묻고 싶다. 말은 곧잘 한다. 그런데 알고 하는거 같지는 않다. 자동차를 몰라도 운전은 한다. 한국인 중에 언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언어는 구조로 조직되는데 구조를 모르고 어떻게 언어를 알겠는가 말이다. 언어를 모르면서 언어로 구조론이 어렵다는둥 하고 있으니 기가 찬다. 하긴 악보는 못 읽어도 연주는 한다.
그냥 한 번 듣고 외어서 연주만 잘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아기때 멋도 모르고 배워서 잘만 써먹는다. 그런데 모른다. 몰라도 상관없다. 만유인력 모른다고 우주로 튕겨나가겠는가?
만유인력의 의미는 우주 안의 여러 사건들이 하나의 원리에 의해 일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거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일의성이다. 일의성을 아는게 중요하지 다른건 상관없다.
질이 어떻고 입자가 어떻다는둥 할 필요는 없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같은 패턴을 가진 모형을 찾아낸 것이다. 누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려면 비유로 설명하는지 보면 된다.
비유로 말하면 아는 거고 비유하지 못하면 모르는 거다. 우리나라에 상대성 이론 제대로 아는 사람 몇 없다. 대부분 비유하지 않고 난해한 단어 속에 숨어버린다. 단어만 몇 개 알려준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지 알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는 계속 새로운 폴더를 연다. 그리고 숨어버린다. 정의를 모르기 때문이다. 정의란 공동체의 숨은 전제를 의미한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데 결정한거 없다. 동의하지 않은 거다. 태어나 보니 국민이 되어 있었다. 동의할 것인가의 문제가 정의다. 동의하려면 국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있나?
정의는 자기규정, 타자규정, 관계규정을 거쳐 피아구분에서 성립된다. 공동체의 룰을 받아들이게 하는 전제조건이 정의다. 그 룰을 받아들이려면 사전에 이러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상호작용으로 나아간다. 상호작용의 전단계가 피아구분이고 이 지점에서 정의 문제가 성립하며 정의가 성립된다는 전제로 상호작용이 있는 것이다. 물론 잠정적인 전제다.
남북한이 대화를 하려면 여러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형평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 흔히 정의를 형평으로 보기 쉽지만 정의는 대의다. 명분이 있어야 하며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사회가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라면 한 방향이 아니고 따라서 대의는 실종하고 정의는 없는 거다. 대의는 공동선, 공동이익, 공동목표다. 그것은 일의성이다. 일의성의 뿌리는 우리편이다.
정의는 우리편에게만 해당된다. 그런데 우리편이냐고 물어져야 한다. 우리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면 그만큼 대의는 죽은 거다. 대의가 없는데 정의가 무슨 소용인가?
우주는 만유인력이라는 하나의 근본에 의지하고 언어는 의사소통이라는 하나의 근본에 의지하고 정의는 대의라는 하나의 근본에 의지하며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일의성이다.
구조론이 어렵고 쉽고의 문제는 아니다.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다. 문제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거다. 사람들은 정의에 따라 행동하는게 아니고 행동에 맞추어 정의를 규정한다.
자기 행동은 바꾸지 않는다. 대신 정의를 바꾼다. 중국땅이 우리땅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국가라는 단어의 뜻을 바꾼다. 그들에게 국가는 생활권이다. 생활권으로 보면 중국은 한국이다.
이 논리를 적용하면 당연히 한국땅은 중국땅이 된다. 중국땅이 우리땅이라는 말은 한국땅이 중국땅이라는 말과 정확히 같다. 동북공정을 하는 중국 학자들은 현장에 가보지 않는다.
만주벌판을 헤매면서 만리장성을 찾을 필요는 없다. 가만이 책상에 앉아서 만리장성이라는 단어의 뜻을 바꾼다. 만리장성은 하나의 긴 벽이 아니다. 여러 군사거점의 지도상의 연결이다.
매우 쉽다. 이 작업을 잘 하면 우리 민족은 수메르족이 되고 훈족이 되며 때로는 유태인이 되기도 한다. 못할게 뭐 있겠는가? 신대륙은 콜롬부스보다 먼저 한국인이 발견했다.
왜냐하면 빙하기때 아시아와 아메리카는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생인류가 빙하기가 끝나고 아프리카에서 살금살금 기어나왔을 때 문제없이 걸어서 신대륙으로 갈 수 있었다.
이 정도만 하자. 말장난에 재미 내면 곤란하다. A면 B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된다. 김정은이 생쇼로 성과를 올리면 후손들이 피곤해진다. 오늘의 승리는 내일을 훔친 거다.
성과를 올렸다는건 미래를 가불했다는 거다. 김정일이 힘들었던건 김일성 때문이고 김정은이 몰린건 김정일 때문이다. 김정은이 오늘 성과를 올릴수록 그만큼 가불만 늘어난다.
여러 이야기 필요없다. 구조론이 어렵다는 말은 단지 자신이 당장 써먹을 데를 못찾았다는 말이고, 그건 현재 자신이 업무에 있어서 기승전결의 기에 포지셔닝해 있지 않다는 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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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인력을 제대로 써먹은 사람은 아인슈타인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들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던 거죠. 만유인력을 배웠고 잘 알고 있지만 귀신은 믿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실 안 배운 겁니다. 여전히 모르는 거죠. 만유인력은 일의성인데 귀신이고 허깨비면 이미 2가 됩니다. 만유인력을 부정한 거죠. 우주는 하나의 에너지 질서를 가진다는 것이 만유인력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결정원리를 가져야 하며 그것이 정치에서는 집단의 의사결정이 되고, 인문에서는 철학이 되고, 미학에서는 스타일이 되고, 심리에서는 주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포분열에 의해 이룩되었고 존재는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에 의해 이룩되었습니다. 구조론은 그 결정하는 과정을 해명합니다. 그냥 결정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 알아도 됩니다. 무엇이 다른가?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자동차가 가는데 그냥 가는게 아니고 사람이 운전해서 간다면? 인간이 그것을 임의로 제어할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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