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을 일부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생각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공식에 대입하여 풀어내는 것이다. 종이에 직관의 모형에 따른 포지션들을 순서대로 써놓고 빈 칸을 채우면 된다. 1 2=□다. 이 □ 안에 숫자를 채워넣어야 한다. 그러려면 공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무도 공식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불교에 공안이라는 것이 있다. 공부안독公府案牘의 줄임말인데 요즘말로는 공식이다. 수학공식처럼 모형을 정해놓은 것이다. 화두話頭라고도 한다. 역시 모형이라는 의미가 있다. 불교의 명상법이 일부 모형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친절하지 않다.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불교에 사마타와 위빠사나도 있으나 화두공안을 쓰는 간화선으로 발달하여 가는 과정에 등장한 원시형태의 명상법이다. 간화선 역시 직관으로 가는 중간단계다.

명상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통털어서 수행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불교의 염불, 기독교의 기도, 마호멧교의 수피즘, 카톨릭의 피정이 있고 그 외에 묵상, 요가, 주술 등 다양한 형태의 수행이 있다. 이들은 대개 신체의 동작을 반영하는 무언가를 정해놓고 단순히 반복한다. 탈진하여 얼빠진 상태에 도달하면 거기서 무언가 느껴보려고 한다.

생각하는 방법은 직관을 쓰는 것이며 직관은 패턴을 이용한다. 자연에서 패턴을 발견할 때 뇌는 흥분한다.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문제는 패턴을 발견하지 않고 그냥 느낌을 얻으려고 하는데 있다. 그 방법으로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수행이다. 이는 저급한 속임수다.

◎ 직관은 패턴의 닮음을 쓴다.
◎ 자연의 닮음을 발견할 때 짜릿함을 느낀다.
◎ 육체를 학대하여 억지로 짜릿함을 끌어내는 것이 수행이다.

깨달음은 전율하는 짜릿함을 느끼게 한다. 전기에 감전되어도 역시 그런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자연의 닮음을 발견할 때 전율하는 느낌을 생성한다. 첫눈에 반했다면 전기에 감전된 듯이 짜릿하다. 왜일까? 평소에 그 모습을 무수히 그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마음 속에 그려둔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닮음의 포착이 진짜다. 모든 수행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수행하여 무언가 느끼려고 하는즉 실패다. 명상의 결과로 닮음을 발견할 때 느끼는 것이지, 느끼려고 명상하면 앞뒤가 바뀐 것이다.

● 자기(주관-사물) ↑

◎ 수행.. 염불, 기도, 수피즘, 피정, 묵상, 요가, 주술 등 단순반복적 행동.
◎ 사마타.. 하나의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명상법.
◎ 위빠사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명상법.
◎ 간화선.. 화두, 공안를 들고 하나씩 타파하는 명상법.
◎ 직관.. 구조의 모형을 사용하는 명상법.

● 타자(객관-사건) ↓

명상은 가장 저급한 수행에서 불교이전의 사마타, 소승불교의 위빠사나, 대승불교의 간화선으로 발전해 왔다. 완전한 것은 직관 뿐이며 수행≫사마타≫위빠사나≫간화선은 직관으로 발달하여 가는 과정에서 거쳐가는 정거장들이다. 진정한 명상법은 이들 중에서 다섯째 직관 뿐이다. 이러한 명상의 발달과정은 자기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주관에서 개관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사물에서 사건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생각을 사물로 보면 반드시 내가 개입한다. 연필을 생각한다면 어떨까? 내가 연필을 쥐거나 던진다. 혹은 연필을 부러뜨리거나 필통에 넣는다. 어떻든 내가 개입할 수 밖에 없다. 나를 배제할 때 사물에서 사건으로 도약한다. 사건으로서의 연필은 그 연필이 여기까지 굴러오는 과정이다. 연필은 원래 남산의 한 그루 나무였거나 광산의 흑연이었다. 나무가 내게로 왔다면 그것은 사건이다. 이때 나는 배제된다. 그 나무를 벤 벌목공과 그 나무를 깎은 목수와 그 나무에 흑연을 끼워넣은 노동자가 등장한다. 객관화 되는 것이다.

◎ 주관 – 엮임이 없다.
◎ 객관 – 엮임을 쓴다.

수행은 자기에 매여 있다. 수피즘의 명상법은 꼭지가 돌아버릴때까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춤을 추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는 것이다. 염불을 하든, 기도를 하든, 방언을 하든, 묵상을 하든 주의가 자기 자신에게로 쏠리면 실패다. 주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왜 주관은 거짓인가? 엮임이 없기 때문이다. 명상은 쾌감을 느끼게 하며, 쾌감은 자연의 닮음을 발견했을 때 뇌에서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며, 그 닮음은 엮임에 의해 성립하고 직관으로만 포착된다.

사마타 역시 자기 자신에게 붙잡혀 있다. 사마타는 촛불을 바라본다든가 하는 식으로 어떤 표적에 집중함으로써 정신을 통일하는 것이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곧 잠이 들기 때문에 명상하기에 좋지 않다. 그러므로 촛불로 분위기를 잡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차 한잔을 마셔도 집중이 된다. 커피도 좋고 향불도 좋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명상을 보조하는 수단일 뿐 명상 그 자체는 아니다.

가장 좋은 집중방법은 산책을 하는 것이다. 걸으면 확실히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글을 쓰는 것도 좋다. 친구와의 대화도 아이디어를 떠올리는데 도움이 된다. 책을 읽다가 아아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명상의 보조수단일 뿐 명상 그 자체가 아니다. 사마타는 명상에 집중하는 분위기 조성에 불과하다. 자연의 닮음을 발견하면 뇌에서 쾌락물질이 분비되므로 저절로 집중한다. 직관이 진정한 명상이며 사마타는 명상하는 척 연출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진정한 명상가는 이미 집중되어 있으므로 구태여 집중하지 않는다.

사마타가 수행에 비해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다. 수행이 자기에 매여있다면 사마타는 집중하여 관찰하는 대상이 있다. 주관에서 벗어나 객관화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관찰대상이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자기를 관찰하려면 자기 바깥에서 자기를 바라보아야 한다. 자기를 객관화 해야 위빠사나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확실히 진정한 명상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에 붙잡혀 있다. 완전히 떠나야 한다.

간화선은 확실히 자기를 떠나 있다. 객관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모형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그냥 머리에 힘 주고 있는 거다. 다만 간화선이 제시하는 화두들은 직관적 모형으로 발전할 단서가 된다. 단지 단서가 주어질 뿐이다. 이 방법은 우연히 성공될 확률이 있으나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다. 명상은 자기를 배제하기다. 자기를 배제하여 얻은 그 자리에 모형이 들어서야 한다. 자연의 패턴을 관찰해서 모형을 얻어야 한다. 사물중심적 사고를 극복하고 사건중심적 사고를 획득할 때 그것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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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건은 모두 닮았습니다. 자연의 닮음을 포착할 때 뇌는 쾌락물질을 분비합니다. 그 즐거움은 섹스보다 낫고 술 보다 낫고 환각제보다 낫습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기쁨과 설레임으로가슴이 뜁니다. 그리던 모습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그것을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보는 관점을 버리고 사건을 보는 관점을획득할 때 세상 모든 것이닮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삶은 즐거움으로 가득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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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3-05-22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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