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변화를 생성하고 미美는 그 힘을 통제한다. 역사는 힘과 그 힘을 통제하려는 미의 부단한 대결이다. 힘은 자연학이 규명하고 미는 인문학이 이룩한다. 학문은 힘의 과학과 미의 과학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인문학은 미의 과학이다.
◎ 역학, 자연학 – 힘을 규명한다.
◎ 미학, 인문학 – 힘을 통제한다.
자연의 힘은 질량이고 인문학의 힘은 의미다. 의미는 의사결정이다. 물질이 질량을 가지는 이유는 입자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연결이다. 의사결정이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킨다. 사건의 맥락을 따라 연결하여 기승전결을 완성한다. 사건은 기승전결의 전개과정에서 부단한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 그때마다 무언가 판단하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인문학의 요체는 합리적인 의사결정능력의 획득에 있다. 당신은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 나약한 군중이 되어 세태가 연출하는 분위기에 휩쓸려가지는 않는가? 남편역할에 아내역할, 상사역할에 부하역할로 보이지 않는 역할게임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는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이 내게 기대하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남을 따르려 하거나 혹은 남을 꺾으려 하거나 간에 이미 타자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확실히 주체적인 의사결정의 1 단위로 기능하고 있는가?
많은 것들이 태어날때부터 정해져 있다. 태어날때부터 여자 혹은 남자로 태어나고, 흑인 혹은 백인으로 태어나고, 부자 혹은 가난뱅이로 태어나고, 일본인 혹은 한국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많은 부분을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구를 사귀면서, 진로를 결정하면서, 이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판단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게다가 인터넷의 등장, 스마트폰의 등장처럼 없던 것이 계속 생겨난다. 80년대만 해도 한국에 민주주의는 없었다. 해외여행도 없었다. 주 5일 근무제도 없었다. 작금의 아웃도어붐도 없었다. 부단히 새로 결정해야 한다. 결정하기를 두려워 말아야 한다.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결따라가야 한다.
장자 양생주편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를 인용하자.
포정(백정)이 혜왕을 위하여 소를 잡았더라. 포정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댄 것이나, 발로 밟은 곳이나, 무릎으로 누른 곳은 스윽스윽하는 소리와 함께 칼움직임대로 살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나는데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동작은 상림의 춤과 같았고, 그 절도는 경수의 음절에도 맞았다. 왕이 말하였다.
“훌륭하다. 어떻게 기술이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는가?”
백정은 칼을 놓고 말하였더라.
“제가 바라는 바는 도로써 기술을 앞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소였으나,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마음의 자연스러움만 있어서 자연의 이치를 따라 큰 틈새와 빈 곳을 찾아 칼을 놀리고 움직이되, 소의 본래의 구조를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힘줄이나 근육을 건드린 일이 없는데, 하물며 큰 뼈다귀야 말할게 있겠습니까? 솜씨 좋은 백정은 1년에 한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 데, 그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수천마리의 소를 잡았으되,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으므로 칼을 놀려도 항상 여유가 있습니다. 19년이 지났어도 제 칼의 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뼈와 살이 엉킨 곳에 이르면, 저도 여려움을 느껴 조심조심 경계하며 눈길을 모으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미묘하게 합니다. 그러면 살이 뼈에서 발려져 흙이 땅 위에 쏟아져 쌓이듯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자기 자신의 감상을 논거로 삼으면 실패다. 대상 자체에 내재한 질서를 중심으로 논하면 성공이다. 그것이 결따라 가는 것이다. 그림을 보더라도 그렇다. 음악을 감상하더라도 그렇다. 대개 ‘불쾌하다’거나 ‘행복감이 든다’거나 하며 자기 감상을 제출한다. 어리석다.
이곳이 밝으므로 이곳은 어두워야 한다거나, 이 음이 높으므로 이 음은 낮아야 한다거나 그 자체의 내재한 대칭구조를 중심으로 논해야 한다. 영화를 보더라도 그러하고 소설을 읽더라도 그러하다. 당신이 어떻게 느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모름지기 포정해우의 고사를 본받을 일이다.
결따라가야 한다.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화 해야 한다. 대부분 자기소개를 한다. ‘나는 이 음식이 싫어’ 라고 말한다. 음식에 대해 말한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음식을 앞세워 자기소개를 한 것이다.
누가 물어봤냐고? 아무도 그대에게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상을 발표하는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발언권을 획득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제 다음에 진술이 있다. 그 전제에 치인다.
발언권을 획득하려고 숨은 전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꼴불견은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하는 식으로 어색하게 말을 꺼내는 것이다. 누가 위해달랬냐고? 전제는 엮임이다. 발언하려면 엮임이 있어야 한다. 상대를 가해자로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한다. 잘못되고 만다.
지식인은 정권을 강자로 설정하고 자신을 약자로 포지셔닝한다. 사고의 폭은 제한되고 만다. 비판전문으로 특화되어 전망은 제시할 수 없게 된다. 민주당은 재계를 의사결정권자로 설정하고 자신을 감시자로 설정한다.
계속 감시만 하게 된다. 정권은 되찾지 못한다. 스스로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 두려워 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남들이 노래부를 곡을 선택하기 전에 먼저 마이크를 잡아야 한다. 결따라가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의제기식 발언권 행사가 아니라 ‘A면 B다’. 곧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된다’는 상호작용의 대칭구조를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해야 한다. 산이 높으므로 물은 깊어야 한다. 주자가 2루에 있으므로 밀어쳐서 오른쪽으로 공을 보내야 한다.
팀플레이의 논리를 중심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어디에든 팀이 있다. 자연에 팀이 있으면 조화가 되고, 음악에 팀이 있으니 화음이 되고, 그림에 팀이 있으니 구도가 되고, 사회에 팀이 있으니 경기가 된다. 팀을 발견하고 팀 내부의 질서 곧 결을 발견해야 한다. 결은 대칭의 형태로 존재한다. 결을 찾아내고 결따라가야 한다.
무엇보다 왕을 죽여야 한다. 러시아인은 여전히 짜르를 극복하지 못했다. 푸틴을 새로운 짜르로 섬기고 있다. 중국인은 여전히 황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모택동과 시진핑이 황제노릇을 하고 있다. 일본인 역시 왕을 극복하지 못했다. 입으로는 전공투를 떠들면서도 왕 앞에서는 한없이 쪼그라들고 만다.
왕을 때려죽일 계획을 발표한 일본 지식인이나 작가는 없다. 어른이 못 된다. 그대 마음 속의 왕을 죽이고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의 신이든 정치적 숭배자든, 과거의 트라우마든, 결벽증이나 강박증이든 자기 안의 왕을 죽이고, 농노의 신분에서 신분상승을 이루어 자유민이 되든 깨어있는 시민이 되든 한 단계 위로 올라서야 한다.
나약한 군중이 되지 말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재한 결을 발견하는 눈을 획득해야 한다. 어디에나 결은 있다. 우주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다. 그것을 발견할 때 능히 제압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다. 운전수에게 결은 자동차의 핸들과 기어 그리고 브레이크다. 이 셋을 조작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대상을 통제할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
###
그대를 위에서 짓누르는 마음 속의 왕을 죽이고 한 단계 위로 올라서십시오. 신의 친구가 되지 못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석가와 놀아주지 못하는 불교인이라면, 강단에 얽매인 지식인이라면, 마르크스를 치지 못하는 좌파라면, 동업자 정신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언론인이라면, 그들은 여전히 정신적 노예상태입니다.결을 포착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해방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든 결이 있습니다. 페이스북은 좋아요가 결이고, 트위터는 리트윗이 결이고, 게시판은 댓글이 결이고, 기승전결을 연결하여 맥락을 구성하는 의사결정의 단위들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