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이 안된 분들께
구조론은 새로운 언어다. 이 대전제에 동의하지 않는 분은 이 사이트에 출입할 권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구조론의 언어체계를 받아들이는가이다. 같은 말을 백번해도 접수를 못한다면 퇴출이 맞다.
분명히 말한다. 구조론은 새로운 언어체계다. 이곳에서 이러한 본질을 시비하면 안 된다. 언어라는 말은 룰이라는 말이다. 사실은 시비의 대상이지만 룰은 시비대상이 아니다. 시비하면 안 된다.
구조론은 절대적으로 맞다. 절대어를 쓰기 때문이다. 상대어를 쓰면 상대적으로 맞다. 그러므로 시비의 대상이 된다. 절대어는 절대로 맞는 말이므로 시비할 수 없다. 비슷한 것으로 수학이 있다.
수학은 시비대상이 안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비를 끊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수학이다. 왼발이 먼저라는 사람과, 오른발이 먼저라는 사람이 다투면 어째야 하나? 두 다리를 잘라버려야 한다.
다리가 없으면 왼다리고 오른다리고 간에 시비할 수 없다. 그렇게 최대한 잘라낸 것이 수학이다. 구조론은 구조다. 구조는 뼈대다. 논쟁의 대상인 살을 제거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논쟁할 수 없다.
팔로 논쟁하면 팔을 잘라내고, 다리로 논쟁하면 다리를 잘라낸다. 모든 것을 잘라내면 마지막에 하나가 남는다. 심장은 왼심장, 오른심장이 없다. 하나만 남겨서 논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구조론이다.
‘소승은 없다.’ 이것이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을 이해못하는 사람과 대화하지 않는다. 대화는 언어로 하는건데 언어를 부정한다면 대화는 불능이다. 언어이므로 옳고 그르고 간에 논쟁할 수 없다.
‘일체유심조는 없다.’ 이것은 언어다. 이해했는가? 자연의 현상들은 대개 A가 B를 낳고 다시 B가 A를 낳고, 다시 A가 B를 낳는 식으로 계속 연결된다. 수학을 투입하면 중간은 약분되어 소거된다.
중간의 반복을 소거하면, 최초의 A와 최후의 B만 남는다. 이때 A와 B를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시키면 에너지 입력부는 A다. 그러므로 B는 A에 종속된다. 이때 A를 ‘있다’, B를 ‘하다’라고 한다.
◎ 존재 : A와 B로 전개되는 사건이며 A는 있고 B는 한다.
A는 있고 B는 없다. 빛은 있고 그림자는 없다. 그림자는 ‘있다’의 포지션이 아니라 ‘한다’의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다. 기능은 나타날 뿐 임의로 통제할 수 없다.
영사기는 통제할 수 있지만 스크린에 비친 영상은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하려면 시나리오단계, 촬영단계, 편집단계, 상영단계에서 통제해야 한다. 원인측은 통제되고 결과측은 통제되지 않는다.
빛은 켜거나 끌 수 있지만, 그림자는 켤수도, 끌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없다. 이 규칙을 적용하면 대승은 있고 소승은 한다. 대승은 존재이고 소승은 기능한다. 그러므로 소승은 존재가 없다.
일체유심조는 없다. 마음은 주체가 아니고 기능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가 만났다면, 그 만남의 장의 존재 그 자체가 그 누군가의 마음에 앞선다. 일체는 마음이 아니라 만남에 달려있다.
너와 내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몸이 마음에 앞선다. 단 몸은 그 육체 뿐 아니라 그 공간, 그 환경 전체를 의미한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만나느냐가 마음보다 중요하다.
방송은 방송국에 없고 라디오에 없다. 둘의 사이에 있다.방송국과 라디오의 만남이 결정한다. 세상만사 라디오채널 맞추기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채널을 아무리 잘 맞추어도 방송국이 없으면 소용없다.
이 언어를 받아들일 것인가? 싫다면 떠나야 한다. 정글의 부족민은 골치아픈 수학이 없어도 멀쩡하게 잘만 산다. 문학을 하겠다면 문학을 하면 되고 수학을 하겠다면 수학을 하는 거다.
‘1 1=0이다.’ 좋다. 그러나 이건 문학이지 수학 아니다. 수학에는 정해진 답이 있다. 수학은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구조론도 같다. 구조론이 쓸모있으면 쓰고 아니면 떠나야 한다.
구조론의 대전제는 존재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거다. 사물은 반드시 짝이 정해져 있다. 칼날이 있으면 손잡이가 있다. 연필이 있으면 종이가 있다. 펜이 있으면 잉크가 있다. 예외는 없다.
칼이 있으면 도마가 있다. 총이 있으면 총알이 있다. 산이 있으면 강이 있다. 기둥이 있으면 들보가 있다. 천장이 있으면 지붕이 있다. 짝이 없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사물은 상대적 존재이다.
사물은 상대적이므로 상대어로 나타낸다. 짝이 있으므로 내가 잘해도 짝이 잘못하면 실패다. 그러므로 논쟁이 일어난다. 사건은 절대적이므로 절대어로 나타낸다. 짝이 없으므로 실패도 없다.
실패가 없으므로 논쟁도 없다. 구조론은 절대어를 쓰며 절대성의 세계를 규명한다.
투수는 잘 던졌는데 포수가 잘못받았다는 식의 말은 없다. 투수와 포수를 합친 배터리가 잘못한 거다.
구조론은 짝이 없다. 투수의 짝은 포수지만 배터리는 짝이 없다. 산과 강은 하나의 산하다. 총과 총알은 하나의 총기다. 펜과 잉크는 한덩어리로 존재한다. 구조의 세계에는 사건이 존재의 단위가 되므로 짝이 없다. 짝이 없으므로 일원론이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므로 소승은 없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사물의 관점이다. 사건으로 보면 달걀은 닭의 일부이므로 닭은 있고 달걀은 한다. 달걀은 닭에 포함될 뿐 독립적 존재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닭이 먼저다.
여기서 그래도 그 닭은 달걀에서 나온게 아니냐는 이의제기는 기각한다. 구조론은 에너지의 결을 따르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입력하는 A를 있다로 놓고 에너지를 수용하는 B를 한다로 놓는다.
그게 구조론 언어다. 이 언어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면 받아들이고 필요없다고 생각되면 꺼져야 한다. 구조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시비하는 분은 번짓수를 잘못 짚었으니 퇴출한다.
이런 이야기는 백번도 더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반복하게 만든다. 일반학교라면 저학년으로 유급시켜 보내버리면 간단한데 말이다. 구조로 보면 진보는 있고 보수는 한다. 한다는 존재가 아니다.
보수는 진보의 하부구조다. 보수는 독립적 존재자가 아니므로 없다. 진보가 진보에 성공하거나 혹은 실패하는 것이며 실패에 주목하는게 보수다. 둘을 하나의 사건으로 합쳐보는게 구조론이다.
이쯤되면 구조론이 말하는 진보의 의미는 국어사전의 사전적 의미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언어가 다르다. 구조론 연구소에서는 구조어를 써야 한다. 보수가 있다고 하면 퇴출된다.
마이산을 동쪽에서 보면 수마이산이 커보이고 서쪽에서 보면 암마이산이 커보인다. 왜 이쪽이냐 저쪽에서 보느냐 말이다. 자로 재보지 않고? 암마이산이 수마이산보다 7미터가 더 높다.
이쪽에서 보면 이쪽 말이 옳고, 저쪽에서 보면 저쪽 말이 옳은 법이다. 왜 투시도법으로 합쳐보지 않고 각각 나누어 보느냐 말이다. 사물은 나누어서 보고 사건은 합쳐서 본다. 소실점으로 본다.
사물로 보면 각자의 관점에서 옳지만 사건으로 보면 각자의 관점은 폐기된다. 이쪽에서 보거나 저쪽에서 볼 수 없다. 이쪽과 저쪽을 잘라낸다. 뉴턴은 만유인력을 들이대어 다른 것을 지워버렸다.
통일장이론은 다른 힘들을 지워버린다. 해가 뜨면 귀신들은 사라진다. 진짜가 나오면 잠정적인 것들은 사라진다. 이미 구조론이 나왔는데도 다른 잡다한 것들이 있다고 우기면 곤란하다.
P.S.구조론을 종교에 접목하는 행위는 비유하면 .. 한의사가 양의사를 찾아와서 ‘스테로이드를 뿌렸더니 한약이 잘팔렸어요.’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양의도 한의를 배우고, 한의도 양의를 배우고 서로 돕는 거죠.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어요.’ 말은 그럴듯하나 이건 범죄다. 사회에는 한의와 양의가 공존하지만 구조론에서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둘은 하나의 사건으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한의는 검증을 거쳐 양의의 하부구조로 편입되는게 맞다. 물론 양의가 거부하겠지만. 구한말이라면 중체서용이나 동도서기 같은 것이다. 단순한 속임수다. 동양문명, 서양문명 따로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근대문명이 있을 뿐이고 변방은 중심에 흡수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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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이 수학과 같은 일종의 언어임을 받아들이고 이곳에서는 구조어를 써야 합니다. 구조어는 절대어이며 각자의 서로 다른 관점은 폐기됩니다. 기분 나빠도 수학은 수학이고 구조는 구조입니다. 구조어는 A나 B를 보는게 아니라 둘의 사이를 봅니다. 대승과 소승의 공존, 진보와 보수의 공존은 불가능합니다. 객관식 문제의 답은 하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왼발과 오른발로 걷지만 구조론의 세계에는 왼발도 없고 오른발도 없습니다. 구조론의 걷는 법은 지렁이처럼 몸을 최대한 늘인 후 머리쪽만 남기고 나머지는 잘라 버리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 다른 걷는 법은 없습니다. 메뚜기가 뛰거나, 말이 달리거나, 물고기가 헤엄치거나, 새가 날거나 다 작용반작용을 이용하며 이때 반작용대상을 포함하므로 구조어에서는 소거합니다. 그건 과학이 아니라 초딩입니다. 만유인력이 다른 것을 소거하듯이 단번에 소거합니다. 반작용대상까지 사건에 포함시켜 보면 우주 안에 걷는 법은 하나 뿐이며, 왼발도 오른발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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