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것이 죽은 것에 앞선다. 산 것은 힘이 있고 죽은 것은 힘이 없다. 스마트폰은 24시간 살아있고 PC는 파워를 켜야 살아난다. 자연은 스스로 작동함이다. 스마트폰은 스스로 작동하니 자연과 같다.

입자는 죽어 있고 양자는 살아있다. 산 것은 에너지를 처리한다. 입자는 죽어있지만 이는 인간의 겉보기로 그렇다는 말이고, 현미경으로 보면 입자도 실은 자연계의 4대 힘을 맹렬히 처리하고 있다.

입자는 인간의 착각이고 실제는 모두가 양자로 존재한다. 입자는 인간의 편의로 생각해낸 관념일 뿐 자연의 본 모습이 아니다.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본 것이며 완전성이 아닌 불완전성을 본 것이다.

최홍만이 낮잠을 자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세포들은 살아서 빨빨거리고 돌아다닌다. 피가 돌고 맥이 뛴다. 호흡을 멈추지 않는다. 양자로 보면 가만 있는 석장승도 지구의 중력을 처리하고 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로 보자.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은? 식욕? 성욕? 생존욕구? 안전욕구? 그런데 욕구라는 것은 인간이 작위하여 지어낸 고도의 추상적인 관념이다. 자연에 욕구 따위는 없다.

인간은 발정기가 없는 특이한 동물이다. 왜 인간만 유별난가? 만약 동물이 인간처럼 발정기가 없다면 24시간 섹스하다가 굶어죽는다. 조절이 안 되는 것이다. 욕망은 조절되므로 인간만의 현상이다.

과학을 논할 때는 인간기준을 빼고 자연기준으로 논해야 한다. 자연은 제어되지 않는다. 시계태엽이 순식간에 풀린다. 자연에 욕망은 없다. 욕망이라는 비과학적 단어는 국어사전에서 지워야 한다.

욕망과 같은 고도의 추상적인 관념이 인간을 움직일리야 없지 않은가. 관념 들어가면 거짓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집단주의든, 개인주의든 ‘주의’ 탓을 하면 일단 가짜다. 자연에 주의는 없다.

식욕은 없다. 배고픔이 있을 뿐이다. 배고픔은 당중독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바로 산소중독에 걸린다. 산소만큼 생물에 해로운 물질은 없다. 산소는 맹독물질이다. 산화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태초에 지구에 출현한 생명체는 혐기성 미생물이었는데 이들이 산소를 생산했고 자기가 생산한 산소 때문에 전멸했다. 그래서 35억년 전에 등장한 생물이 30억년 동안 별 진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6억년 전에 처음 의미있는 진화가 일어난 것이 캄브리아기의 생물 대분화다. 무려 30억년을 미생물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술을 빚으면 알콜 도수는 청주의 알콜도수인 16도 이상은 올라가지 않는다.

알콜을 생산한 효모가 16도 이상이 되면 알콜사로 죽기 때문이다. 효모는 자기가 생산한 술에 빠져 죽는다. 생물은 산소라는 맹독을 생산하고 산독에 죽다가 호기성 미생물로의 진화를 일으켰다.

산소를 견딜 뿐 아니라 처리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산소중독이 생겨난 것이다. 술꾼들은 술욕구에 빠진 것일까? 아니다. 알콜중독이다. 흡연자는 담배욕구에 빠진 것이 아니라 니코틴 중독이다.

생물은 호흡욕구 때문에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산소중독에 걸린 것이며, 배가 고픈 이유는 식사욕구 때문이 아니라 당중독 때문이다. 당중독은 니코틴중독이나 산소중독, 알콜중독과 같은 반사다.

사람이 하품을 하면 그것을 본 개도 하품을 한다. 개가 하품욕구 때문에 하품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말이 되나? 식욕이나 성욕은 고도의 추상적인 관념이며 인간이 작위로 해석해낸 가짜 동기다.

위장이 반사를 일으켜 소화액을 내뿜으면 위장이 소화되어 통증을 느끼는게 배고픔이다. 배가 고플 때는 소화액이 무려 한 컵씩 쏟아져 나온다. 음식을 보면 침을 꼴깍 삼키는 것도 일종의 반사다.

침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 침꼴깍욕구 때문에 침이 꼴깍 나오겠는가? 반사는 기계적이다. 음식이 목구멍을 자극하면 목구멍이 저절로 움직여서 음식을 삼킨다. 삼킴욕이 발동해서 음식을 삼키겠는가?

무릎반사와 같은 단순 반사다. 삼킴욕구는 없다. 침꼴깍욕구도 없다. 하품욕구도 없다. 담배욕구도 없다. 술욕구도 없다. 호흡욕구도 없다. 식욕도 없고 성욕도 없다. 조건반사다. 지어낸 관념이다.

자연계에서 존재의 활동은 상호작용 원리에 지배된다. 상호작용을 하려면 반드시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데 그 파트너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스스로 파트너를 조작해 내는 것이 중독이다.

위장에 음식이 없는데도 소화액이 나와 위장을 소화시키면 당중독이다. 니코틴이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니코틴을 처리하면 니코틴 중독이다. 산소가 없는데도 산소를 처리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인체의 작동은 양자와 같은 불연속적 쌍으로 일어난다. 그 쌍의 일방이 없는데 스스로 만들어내면 중독이다. 남자가 여자와 섹스를 한다면 쌍이다. 여자가 없는데 섹스를 하면 자위행위다. 중독이다.

인간은 조절능력이 있으므로 자위를 해도 곧 그만둔다. 양자의 불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동물은? 동물이 자위를 배우면 끝없이 자위를 하다가 죽는다. 불연속성이 아니라 연속성에 지배되는 것이다.

사자는 하루에 평균 50회 교미를 하는데 우리 안의 온도가 2도 오른다고 한다. 드레스덴 동물원에서 암사자를 관찰했는데 8일간 360회를 했다고 한다. 이래서 동물원은 매우 나쁜 것이다.

야생에서는 여러 가지 환경의 간섭에 의해 이것이 적절히 제어되기 때문이다. 제어되는 이유는 파트너가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장이 뛰거나 호흡을 하는 것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스티븐 호킹은 뇌를 신체에서 독립시킬 수 있다고 말했지만 거짓이다. 이는 청중들의 희망사항을 중계해준 것에 불과하다. 뇌 역시 반사의 집합이며 반사는 양자와 같이 불연속적인 쌍을 이룬다.

신체에서 뇌를 분리한다는 것은 컵에서 바깥쪽을 빼고 안쪽을 분리한다는 말과 같다. 밖이 사라지면 안도 사라진다. 감자의 껍질은 필요없고 안쪽만 필요하다. 껍질을 벗기고 놔두면 껍질이 생긴다.

양파껍질은 필요없고 안쪽만 필요하다. 양파껍질을 벗긴 채로 상온에 보관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껍질이 생겨있다. 자물통이 사라지면 열쇠도 사라진다. 상호작용의 일의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뇌는 반사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큰 반사는 뇌반사다. 당중독, 산소중독, 섹스중독, 알콜중독 찜쪄먹는 뇌중독이다. 인간의 동기는 존엄에 지배된다. 문제는 존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간단하다. 뇌중독이다. 뇌는 의사결정에 중독되어 있다. 의사결정을 하려는 중독현상이 존엄이다. 의사결정을 하려면 의사결정권이 있어야 한다. 결정권이 없는데도 결정하려는 것이 존엄욕이다.

존엄이 마이크를 잡는 것이라면 자유는 그 무대를 장악하는 것이다. 마이크를 잡았는데 관객이 떠들어서 집중하지 않으면 자유가 없다. 청소원이 마이크를 잡았지만 아무도 무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가 마이크를 잡아야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다. 존엄, 자유, 다음의 사랑은 마이크 잡고 청중을 주목하게 한 다음 발언하는 것이다. 사랑 다음의 성취는 발언하여 청중의 반응을 끌어낸다.

마지막 행복은 박수받고 퇴장한다. 인간의 동기는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 뿐이며 이들은 일의성에 의해 통일되어 있다. 존엄이 양자면 자유는 입자고, 사랑, 성취, 행복은 힘, 운동, 량이다.

뇌는 뇌중독에 걸려있다. 식욕, 성욕, 호흡욕은 당중독, 산소중독, 알콜중독과 같이 하찮은 것이며, 조건반사에 불과하고 의사결정중독이 가장 중요하다. 의사결정중독이 근원의 동기부여가 된다.

실천하는 단계에서 자유, 사랑, 성취, 행복으로 전개하는 것이며 매슬로가 말한 자기존중, 소속애정, 안전욕구, 생리욕구 따위는 그러한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을 다르게, 혹은 틀리게 표현한 것이다.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지배한다. 문제는 존엄욕이 포텐셜에너지 형태로 잠재해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먼저 와서 다음 단계를 불러낸다. 순서가 중요하다. 왜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까?

우리가 관찰하기로는 뿌리가 먼저 나고, 다음 잎이 오고, 나중에 꽃이 피며 최후에 열매가 맺지만, 실제로는 열매가 먼저 와서 꽃을 불러내면, 차례로 꽃이 잎을 불러내고, 잎이 뿌리를 불러낸다.

가장 늦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먼저 관측된다. 자동차가 먼저 도착하고 다음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지만 실제로는 운전자가 먼저 자동차를 조작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상처럼 순서가 바뀌어 있다.

늦게 팬 장작이 위에 올라가는 양자의 법칙 때문이다. 양자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양자적 사고란 입자가 죽어있는데 비해 살아있다는 것이다. 물질은 자연계의 4대힘을 처리해야 하므로 살아있다.

여기서 순서가 무엇이냐다. 경기가 끝나고 월드컵을 들어올리지만 실제로는 월드컵이 팀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경주가 끝나고 금메달을 걸지만 실제로는 금메달이 초대하여 경기를 성사시킨 것이다.

금메달이 없는데 우사인볼트가 경기하러 오겠냐고? 만나고 난 다음에 결혼하지만 실제로는 결혼이 만남을 불러낸다. 섹스를 해야 아기가 생기지만 실제로는 잠재적 존재인 아기가 섹스를 불러낸다.

이러한 잠재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양자개념이다. 입자는 공간에 설정되지만 양자는 시간을 타고가기 때문이다. 공간을 설정하는건 가짜다. 자연에는 물질이 있을 뿐 시간도 공간도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텅 빈 좌표에 물질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물질이 약동하자 상호작용에 따른 시간과 공간이 설정된 것이다. 물을 운반하려면 컵이 있어야 한다. 물을 얼리면 물이 컵을 겸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은 컵이다. 물질은 컵에 담긴 물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물질이 시공간을 겸해야 한다. 물이 컵을 겸하는게 양자개념이다. 이때 시간을 타고가므로 잠재적, 확률적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

존엄이라는 보이지 않는 잠재적 존재가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을 차례로 불러내며 인간의 동기는 오직 존엄욕 하나에 지배된다. 그것은 의사결정욕구이다. 인간은 의사결정에 중독되어 있다.

식욕, 성욕은 단순히 했던 짓을 반복하는 것이며 이는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과 같아서 의미가 없다. 개가 꼬리흔들욕구의 발동으로 꼬리흔드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흔들에서 나머지는 결정된다.

인간은 태어나고 첫 호흡에서 나머지 모든 호흡이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단 한번 호흡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아때 단 한번 심장이 박동을 개시하고 그것으로 끝이다.

구조론에서 중복은 소거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 한 번 식사하고, 단 한 번 섹스하고, 단 한번 결혼한다. 나머지는 중복이므로 소거한다. 그러므로 식욕, 성욕은 없다. 호흡욕, 하품욕은 없다.

눈깜박욕, 귀쫑긋욕, 손까불욕, 머리쭈뼛욕, 발가락떨욕, 소름돋을욕, 응가쌀욕이 없기 때문에 식욕과 성욕은 없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단순한 반사다. 구조론은 오직 처음의 1회만 인정한다.

왕자로 태어나면 존엄하다. 존엄은 일회에 달성된다. 탄생과 동시에 존엄해진다.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면 위대하다. 김연아가 지난번에도 위대했는데 이번에도 또 위대했다는 식의 말은 없다.

위대함은 단 1회 달성되고 그걸로 끝난다. 깨달음은 1회다. 존엄이 먼저 와서 그대를 무대로 불러냈다. 인간이 신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일의성에 의해 신이 먼저 와서 그대를 불러냈다.

실은 나중된 것이 먼저 와서 불러내는 것이다. 승용차라면 가장 나중에 내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탄다. 운전사가 먼저 타고 차례로 승객을 태우며 모든 승객이 내려야 운전사가 마지막에 내린다.

원인은 무엇인가? 동기는 무엇인가? 가장 나중에 오는 것이 실제로는 가장 먼저 오는 것이며 곧 원인이다. 그것은 나중이라는 타이밍이 결정될때까지 확률의 형태로 잠재해 있다. 인정해야 한다.

주인공이 가장 늦게 무대에 오르지만 사실은 주인공이 청중을 불러모은 것이다. 가장 늦게 나타나는 주인공이 가장 먼저 와서 초대한 원인이다. 하객이 먼저 오고 신랑신부가 나중 입장한다.

하객들 때문에 결혼한건 아니다. 결혼 때문에 하객들이 모인 것이다. 진짜배기는 형식이다. 내용은 형식을 타므로 내용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형식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제 2의 사건이 일어나야 겨우 형식의 존재를 알아챈다. 동생이 태어나야 비로소 자신이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사실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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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3-09-2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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