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렇게 탄생했다
힉스입자의 발견이 정식으로 보고되었다. 바야흐로 양자론의 시대이다. 양자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세계관의 보급이 우리 인문학의 역할이다. 누구라도 그 일을 해야 하므로 필자가 그 일을 맡는다.
이야기는 관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논하는 것이다. 만약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면 입을 닥쳐야 한다. 보고 들었다면 보고해야 한다.
무엇을 보았든, 그것은 운동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된다. 관측의 원인은 운동이다. 그렇다면 운동의 원인은?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세상을 이해한다 함은 운동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운동의 원인은 힘이다. 힘은 진행방향의 꺾임이다. 우리는 살아있고 그러므로 운동한다. 그런데 운동을 방해받을 때가 있다. 잘 나가다가 진행방향이 꺾일 때가 있다.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존재다.
우리가 앞으로 가는데 어떤 방해자도 없다면 거기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반면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방해하는가? 물질이다. 세상은 물질로 되어 있다.
물질을 이루는 것은 질량이다. 질량은 어떤 것의 직진을 방해한다. 진로방해의 방법은 방향지정이다. 방향의 성립은 상호작용에 따른 게이지 대칭성에 의해 설명된다. 생겨난 방향이 꺾여야 물질이다.
양자론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일단 파동을 중심으로 양자론을 기술한다. 파동의 성질은 대칭성이다. 게이지 대칭성은 방향의 균일이요 이를 깨뜨리는 비대칭성은 쏠림이다.
방향쏠림은 구조론의 일의성에 따라 시소의 축 1이 날개 2를 담당하는 일인이역에 의해 일어난다. 시소구조에서 축 1이 날개 2를 동시에 지배하는 것이다. 양자론에서는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 한다.
컵의 몸통 하나가, 컵에 담긴 물과, 컵을 쥐는 사람 손의 둘을 동시에 통제한다. 하나가 둘을 동시에 해결하니 일인이역이다. 컵이 1인2역으로 담긴 물과 잡는 손의 대칭성을 깨는 것이 곧 일의성이다.
이에 파동을 기술하는 대칭성과, 입자를 기술하는 대칭성 깨짐으로 물질은 전부 설명된다. 대칭성이라는 평야에 비대칭의 산이 우뚝 솟아남으로써 세상은널리 이루어졌다. 천지창조가 완성되었다.
시작은 관측≫관측은 운동≫운동은 방해≫방해자 질량≫질량은 방향≫방향은 대칭≫대칭은 균일≫균일은 파동≫파동은 깨짐≫깨짐은 비대칭≫비대칭은 쏠림≫쏠림은 입자≫파동과 입자의 일의성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존재할 뿐더러 그것이 인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존재와 인식은 둘이 한 세트를 이룬다. 인간은 인식에서 출발하여 존재를 규명한다. 인식이 대칭성이면 존재는 비대칭이다.
인식에서 존재로 올라서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식과 존재, 파동과 입자의 대립과 모순이 일의성에 의해 해명된다. 축 하나가 날개 둘을 동시에 상대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이라는 집은 널리 지어졌다.
무엇인가? 물질은 큰 놈이 있고 작은 놈이 있다. 그 둘은 다르다. 다른 것을 다르다고 말하면 곤란하다. 다른 것을 같다고 하는 것이 과학이다. 빨강과 파랑은크기가 다를 뿐 빛의 파장이라는 점이 같다.
수소와 산소는 전자가 핵 주위에 있는 모형이 같다. 숫자 1과 2는 양이 다를 뿐 자연수로 같다. 형과 아우는 태어난 순서가 다를 뿐 부모가 같다. 서로 다른 것에서 같은 점을 찾으면 안다고 할 수 있다.
물질은 여러 종류의 서로 다른 소립자로 이루어졌는데 서로 다른 그들 사이에서 무언가 같은 점을 찾아내야 한다.모든 소립자는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 게이지 대칭성이다. 이것으로 거의 해결되었다.
모눈종이 위에다 소립자들의 위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지도 위에다 서울과 부산을 동시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서로 다른 서울과 부산을 하나의 지도 안에 집어넣었으니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서울은 서울이고 부산은 부산인가 하는 딱 하나의 의문이 남았다. 그것은 질량이다. 질량은 자연에서 운동의 진로를 방해한다. 축구를 하는데 수비수가 공격수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과 같다.
방해하는 정도로 포지션을 알 수 있다. 방해하지 않는 넘은 상대편 공격수다. 초장부터 방해하는 넘은 미드필더다. 막판에 방해하는 놈은 풀백이다. 최종단계에서 방해하는 넘은 골키퍼다. 답 나와준다.
게이지 대칭성은 바둑판에 흑돌과 백돌을 놓아서 물질들의 포지셔닝을 보여준다. 상관관계를 알게 한다. 건물의 설계도와 같다. 다만 평면의 설계도가 어떻게 벌떡 일어서서 우뚝한 건물이 되었느냐다.
설계도만으로 건물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을 벌떡 일으켜 세워 우뚝한 건물로 만드는건 별개다. 간단하다.어떻게 진로를 방해하는가만 보여주면 된다.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입체로 올려세우면 된다.
서울과 부산이 각각 어디에 있는지는 알았고, 이제 태백산이 왜 높고 동해가 왜 깊은지만 설명하면 된다.파동에서 입자로 변환시키면 된다. 그것이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다. 구조론의 일의성이다.
답은 나왔다. 문제는 해결되었다. 범인은 지목되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몫을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파동의 대칭성이 깨진다.그리하여 우뚝할 넘 위로 솟아나고 우묵할 넘 아래로 꺼져들어갔다.
들어갈곳 들어가고 나올 곳이 나오니 평면이 변하여 입체다. 그리하여 물질의 진로방해가 일어났다. 빛이 굴절하게 되었고, 날아가는 주먹이 벽에 막히게 되었다. 길 가다가 전봇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잘 나가다가 발부리가 돌에 걸려 자빠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곳에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운동은 힘에 의해 방해된다. 힘은 입자에 의해 작동한다. 입자는 질에 의해 우뚝 선다. 질의 일의성이다.
양자론은 미시세계를 해명하고, 구조론은 거시세계를 해명한다. 존재는 대칭성을 기본으로 다시 거기서 비대칭으로 도약하여 형태를 이룬다. 존재는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다시 거기서 입체로 솟아난다.
컵의 몸통이 컵에 담긴 물과 컵을 쥐는 손을 동시에 통제하는 현상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대칭적이다. 동시에 비대칭적이다. 머리와 꼬리는 대칭적이다. 동시에 비대칭적이다. 신호등은 대칭적이다.
신호등의 특정한 신호는 비대칭적이다. 모든 자동차는 횡단보도 앞에서 속도를 줄여야 하는 것이 대칭이고,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면 다른 방향은 빼고 나만 홀로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은 비대칭이다.
신호등은 혼자서 양방향을 통제한다. 이것으로 모두 설명된다.대칭을 다치지 않으면서 비대칭을 도출한다.대칭은 공空, 비대칭은 색色이다. 물질은 파동의 대칭성과 입자의 비대칭성을 동시에 가진다.
* 과학운동 하는 인문학 사이트 구조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