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비과학의 구분**

‘종교는 과학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했으면 좋겠다. 다 아는 사실을 구태여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는 필자가 어떤 개별적 사실을 주장하자는게 아니라 이를 추상화시켜, 만유에 공통된 보편적 메커니즘을 이야기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결론은 구조다. 살을 배척하고 뼈를 취하는 구조의 관점으로 보라. 먼저 그 관점을 얻으시라. 종교는 과학 중에 틀리거나 의견이 다른게 아니고, 원초적으로 번짓수가 다른 거다. 이발소그림은 그림이 아니고 전혀 다른 거다. 과학책에 절대로 종교 챕터가 들어가면 안 되고, 그림 코너에 이발소그림이 있으면 안 된다. 음식과 쓰레기만큼 차이가 있다. 음식을 쓰레기와 같은 공간에 두면 절대로 안 된다. 이를 개별적 사실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추상화시켜 메커니즘 수준에서 이해하자는 것이 구조론이다. 이러한 절대적 공존불가의 규칙은 다른 분야에도 널리 적용된다는 말이다.

“김종배의 사사로운 토크를 요약하면, 애덤 스미스는 주 4일만 일해도 된다고 했고, 상여금을 주되, 직원들이 과로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속에 착취와 수탈이 있으며, 이는 노동자에게 갈 부분을 자본가가 훔친거라고 봤다. 막스 베버는 천직과 검약이라는 미덕을 강조하는 칼뱅파 프로테스탄트들의 근면성 속에서 자본주의가 싹텄다고 말했지만, 이것이 절대조건이란건 아니었다. 칼 폴라니는 햇빛, 공기처럼 노동은 팔려고 생산한 경제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공산주의 방식의 국가단위 계획경제는 불가능하지만 협동조합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케인즈는 자본주의는 대공황 같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을 비꼬기보다는 인정하고 받아들인 상태에서의 문제해결을 주장했다. 공황이 일어나면 소비가 없어지고, 다시 생산도 못하게 되는 악순환을 돈을 풀어서 끊는 것이다.(하략. 페이스북에서 정기욱님의 글 발췌)

과학과 종교의 구분법을 경제학에도 적용해 보자. 이들 유명한 다섯사람 중에서, 올바른 과학의 관점에서 경제문제를 바라본 사람은 없다는게 인류가 맞닥들인 비극의 진정한 원인이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를 찾는게 과학이다. ‘닥치고 머리와 꼬리를 말해줘!’ 이런 거다. 이들은 모두 핵심을 비켜나 있다.

경제가 인간의 사회적 행위의 결과라는 관점을 배척해야한다. 수학자가 수를 탐구하거나, 혹은 물리학자가 물질을 탐구할 때 인간의 사회적 행위는 배제된다. 인간과는 상관없이 그냥 물질이 있고, 수가 있는 거다.

종교는 다르다. 종교는 모든게 인간과 완벽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는 자기를 개입시킨 것이다. 객관이 아니고 주관이다. 과학은 객관의 영역이다. 인간중심 사회학과, 자본중심 경제학의 분리가 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다섯 사람은 사회학과 경제학을 명료하게 분리하지 않았다. 왜인가? ‘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학은 숫자로부터 출발하고, 물리학은 소립자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화학은 분자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생물학은 세포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者, 字, 子)가 있다. 독립적인 의사결정의 최소단위인 자가 나와주어야 비로소 학문은 시작된다. 경제는 인간의 의도와 관계없이, 경제 자신의 머리와 꼬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에너지 입구와 출구가 있다. 말하자면 경제자가 있다.

칼 폴라니는 ‘인류에게 경제와 시장은 고대로 부터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18세기 영국으로부터 촉발된 산업혁명과 무관하게 경제는 있어왔다. 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나? 경제는 인류와 무관하게 자연에 있다. 생물도 경제원리를 따라 경제한 결과로 생장한다. 다를 수 있나? 경제라는 보편원리 안에 인간경제와 산업경제가 있다.

먼저 경제자를 찾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아직 경제자를 찾지 못했다면 과학의 자격은 없다. 학문은 공자가 6예를 분류하면서 처음 시작되었고,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분류로부터 시작되었다.

과학은 구분하여 과科를 나누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당의 주술과 의사의 치료는 분명 다른 것이다. 무당과 의사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물론 애매한 것, 어중간한 것도 있다.

전통 노동요는 가락만 있었고 가사라는게 불분명했다. 곡이 모호해서 어디가 노래의 시작이고 끝인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옹헤야’라든가 ‘퀘지나칭칭나네’가 대표적이다. 아리랑의 가사나 악보를 주장하는건 무리수다. 이는 노동요를 모르는 사람의 헛소리다.

후대에 누가 편곡하여 창가처럼 만들어놓은 근대의 아리랑은 다른 거다. 우리가 아는 아리랑은 잘못된 창가 아리랑이며, 이는 서양음악에 덧입혀놓은 가짜 아리랑이다. 학자의 본분은 이를 연구해서 출발점과 종결점을 찍어주고 독립적인 존재자를 일으켜 세우는 거다. 엄밀히 말하면 민요라는 것은 없고, 창가와 노동요가 있으며 둘은 형식이 다르다.

‘김매기 소리’를 하는데 김은 매지 않는다? ‘타작하는 소리’를 하는데 타작은 하지 않는다? 노동요는 노동과 붙어 있으며 뗄 수 없다. 우리가 아는 민요 중의 상당수는 이를 떼어낸 가짜다. 과학가라면 이 부분을 엄격하게 진단해서 어디가 머리고 꼬리인지 입자를 정해야 한다.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자가 발굴될 때 비로소 학문은 입지를 얻는다.

의학에 비유하면 병病이라는 관점이 서야 한다. 한의학처럼 음양의 조화가 깨졌다니 어쩌고 하면 피곤한 거다. 아프다는 것과 질병은 다른 거다. 때리면 아프다. 병 걸려서 아픈 것과, 매 맞아서 아픈 것은 다르다. 이를 구분하지 않으면 의학은 성립하지 않는다.

질병이라는 독립적인 의사결정단위가 나와줘야 비로소 의학이 된다. 병을 치료하는 데는 약으로 처방하는 법, 스님을 불러 독경하는 법, 도사를 불러 술법쓰는 법, 부적을 쓰는 법이 있다는 식의 동의보감 수준으로는 의학일 수 없다. 아닌걸 확실히 배척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의醫와 비의非醫를 구분하고, 병과 병 아닌 것을 구분해야한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로 숫자단위나 세포단위나 원자단위처럼 최소단위 의사결정 실체인 경제자가 나와주어야 과학의 범주에 드는 이야기가 된다.

앞의 유명한 다섯 사람에게서 그러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아담 스미스의 시장원리라든가 하며 비슷한 것이 제법 있지만 분류가 확실하지 않다. 접근법이 틀렸다. 원소기호 없이 화학하는 셈이다.

경제의 원자는 무엇인가? 정의되어야 한다. 경제의 출발점은 공간의 교착을 시간으로 변환하여 타개하는 문제다. 신용의 조달이다. 계획을 세우고 다음 실행을 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다.

시계와 같다. 시계태엽이 1초만에 다 풀리지 않게 조절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을 발명한 시점에서 시계는 발명된 거다. 시계 안에 앵커라는 것이 앞뒤로 오가며 되먹임을 하는데 그것이 시계의 원자다.

앵커가 바늘이 앞으로 간만큼 뒤로 되돌아가며 조속기 역할을 해서 시계가 성립된다. 진자의 등시성으로 조속하는 괘종시계도 있다. 자연에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그 역할을 한다. 시계는 자연에 있는 것을 복제한 것이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경제는 인류와 상관없이 자연에 있으며 그것을 복제한 것이 경제다. 경제를 처음 자연에서 유도하는 절차가 나와주어야 한다.

경제는 돈부터 찍어야 한다. 생산보다 계획이 먼저다. 수렵이나 채집은 엄밀한 의미에서 경제가 아니다.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수렵이나 채집이 경제면 쥐나 닭도 경제활동을 한다는 말이 된다.

비경제에서 경제로 도약하기는 매우 힘들다.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넘사벽의 장벽이 있다. 대부분 그 엄중한 장벽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논의가 산으로 간다. 앵커를 발명하지 못한 채로 시계를 만들려는 노력과 같다. 핵심인 탈진기(밸런스)가 없으면 거의 시계같지만 그게 시계는 아니다.

시계를 발명하기 전에 탈진기를 발명해야 하고, 탈진기를 발명하려면 핵심부품인 앵커를 발명해야 하고, 그 앵커를 추나 진동자로 흔들어주는 메커니즘을 통째로 발명해야 한다. 여기에 입력에서 출력까지 에너지의 1순환이 있다. 그런데 그 앵커가 구조론의 ┳다. 딱 시소모양으로 생겼다. 구조는 만유에 보편되며 이 구조가 없으면 무조건 가짜다. 앵커 없는 시계는 인정할 수 없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사냥꾼을 유목민으로 만들기 어렵고, 유목민을 농경민으로 만들기 어렵다고 한다. 된다 해도 같은 위도를 따라 같은 기후대에서만 된다.

그래서 문명은 동서로는 잘 가고 남북으로는 안 간다. 동서로는 유럽문명이 구대륙을 거쳐 일본까지 가고 미국까지도 갔는데, 남북으로는 유럽문명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해서 아직 수단까지도 못갔다.

수렵채집인이 유목민을 보고 배우거나, 혹은 유목민이 농경민을 따라하는 경우는 드물며, 대개 농경민이 정복하여 유목민의 땅을 뺏는 식이다. 왕족이 왕되고, 원래 상인이 장사하고, 유대인이 금융을 한다. 상商나라 사람만 상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의사결정단위라는 본질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원리가 시계의 탈진기이며 앵커이고, 구조론의 ┳다. 앵커가 1왕복을 하듯이 계획과 생산이 경제의 1 사이클로 기능한다. 여기에 경제의 머리와 꼬리가 있고,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있다. 구조론으로는 계획이 생산에 앞선다.

대개 이 부분에서 막혀 있다. 계획 다음에 생산, 생산 다음에 거래다. 아담 스미스의 시장원리는 거래원리다. 제 1원리, 제 2원리 지나서 제 3원리에 해당한다. 태엽과 탈진기를 지나서 밖으로 드러난 바늘이다. 계획과 생산을 끌어내기 위한 동기부여가 경제시스템의 상부구조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경제는 생산현장에서 일어나는 공간대칭을 시간대칭으로 전환한다. 농부가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 수확까지 6개월이 걸린다. 종자를 보관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1년의 계획이 된다. 누가 그 1년을 보장하는가이다. 이는 신용의 창출이다. 신용이 탈진기다. 인간이 직업을 잘 못바꾸는게 이 때문이다. 상나라 출신의 상인이 장사를 독점하듯이, 국가족이 출현하여 국가짓을 해서 된 거다.

탈진기의 핵심은 일의성에 있다. 동시에 결정되어야 한다. 생산한 다음에 나눠갖는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나눠가진 다음에 생산한다. 그러므로 산업화는 대개 시민혁명에 따른 신분상승에 의해 촉발된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물론 화폐도 기여한다. 투자자는 지분을 나누는 방식으로 공간의 교착을 타개하지만 노동자는 그게 안 되므로 화폐로 갈음하는 것이다.

일본이 비교적 빨리 근대화에 성공한데 비해, 중국과 조선이 늦은 이유는 국가족의 절대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수백개의 봉건소국이 있었는데 비해 중국은 황제 한 명이 있었고, 조선은 국왕 한 명이 있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외교간섭을 피할 의도로 외교 자체를 없앴다. 청나라 사신이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과 접촉하려는 외국인은 모두 청나라로 보냈다.

유럽 역시 국가족 숫자가 절대로 많았던 것이 강점으로 작용했다. 구조는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로 복제된다. 국가족의 의사결정을 하부구조로 복제하는 중간고리로 중세에는 기사가 그 역할을 하고, 근대에는 지식인과 중산층이 그 역할을 한다. 조선이라면 선비다.

현대는 의회가 국가족 역할을 한다. 국가족과 이를 내부에서 복제한 중산층이 먼저 분배하고, 후에 생산하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 신용창출이다. 결혼제도가 특히 그 선분배의 기능을 상당부분 담당한다. 자본주의는 결혼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입학과 취업의 신분고착화 경향도 선분배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노동조합에 대한 관점도 선분배 개념으로 풀어야 한다. 이 부분이 확실히 화폐역할을 대행한다.

경제하려면 생산하기 전에 돈부터 찍어야 하고, 창업하려면 직원 뽑기 전에 주식부터 발행해야 한다. 시중에 풀려나간 돈이 생산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은행으로 되돌아오지 않게 붙잡아두는 방법은? 시계태엽이 바로 풀리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탈진기의 역할은?

선분배가 정답이다. 한국의 과잉교육, 과잉스펙, 결혼집착, 가족집착, 부동산 폭등도 선분배 관점으로 풀어야 답이 나온다. 노동자의 임금도 신분안정과 현찰수익 중에서 선택하는 지렛대로 풀어야 한다.

정규직은 임금을 깎는 대신 안정된 신분을 보장하고, 비정규직은 신분이 불안정한 대신 높은 임금을 받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한국은 그게 거꾸로여서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할일이 있다.

생물학이라면 하나의 세포, 물리학이라면 하나의 원자, 수학이라면 하나의 숫자가 있다. 경제에서 그것은 계획과 생산의 1사이클이다. 구조론의 핵심은 일의성이다. 생산 후에 분배한다는 거짓말이고 먹고 튄다가 진실이다. 어떻게 양측을 일의적으로 동시에 결정하느냐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탈진기를 내장한 1경제단위 개념이 서야 비로소 경제학이 출발할 수 있다.

◎ 동기≫계획≫생산≫거래≫소비

◎ 신분≫신용≫산업≫유통≫문화

동기부여는 노숙자, 가정주부, 백수, 도둑과 같은 비경제족을 어떻게 산업활동에 종사하는 경제족으로 바꾸느냐의 문제이다. 탈진기가 있어야 하며 전통적으로는 가족제도가 그 역할을 해왔다. 현대사회는 국가의 선제대응 및 교육된 개인의 교양으로 대체해야 한다. 깨어있는 시민이 필요하다.

경제계획은 투자와 생산 소비까지 걸리는 시간간격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다. 대개 화폐가 기능한다. 종이화폐 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화폐역할을 하는 대체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 증권이나 보험, 부동산도 그 역할을 한다.

미국은 가족주의 강조로 때우려는 경향이 있고, 북유럽의 사민주의는 국가의 능동적인 역할로 가족의 기능을 대체한다. 근대의 교육제도는 가족주의 수준을 개인주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개인 단위에서 경제하는 동기를 조달하는 것이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어야 한다.

경제학의 목적은 가족이나 기업이 담당하는 신용창출을 국가와 개인으로 다원화 하는데 있다. 최종적으로는 사회관계의 밀도를 끌어올리고 상호작용의 총량을 끌어올리는 데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의도와 달리 경제학의 상부구조인 정치학, 사회학의 중요성을 말한 셈이 되었는데, 하부구조만으로 보면 시장원리가 탈진기 역할을 한다. 경제학은 경제영역 안에서 완결된 이야기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비유하면 건축과 토목은 다르다. 그런데 토목 없이는 건축을 못한다. 아마 건축과에서도 토목을 조금 배우긴 할 것이다. 어쨌든 건축은 토목이 아니며, 토목은 토쟁이가 하고, 건축은 집쟁이가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학, 혹은 사회학과 경제학은 담당분야가 다르다. 각자 자신의 탈진기 하나씩 가지고 있다.

야구선수들은 일도 하기 전에 계약금이라 해서 많게는 수백억을 받는다. 전형적인 선분배다. 월급쟁이도 취직만 하면 신용카드에, 마이너스통장에, 신용대출까지 거액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 결혼만 해도 신용창출이다.

이러한 부분은 국가의 능동적인 정책집행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이 부분을 강조하면 사회학이 되지만, 국가의 역할과 상관없이 경제의 메커니즘 속에 원래 그런 원리가 있다는 거다. 탈진기가 있다. 기업, 조합, 가계, 개인이 경제의 주체이듯이 국가도 경제의 한 주체다.

‘동기≫계획≫생산≫거래≫소비’로 이루어진 경제행위의 연쇄고리를 생명활동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은 호흡을 한 번 하고, 시계는 앵커가 한 번 움직인다. 고리 하나가 끊기면 전체가 죽는다.

대개 이들 고리 중에서 하나만 손보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망상을 갖고 있다. 시장주의자는 거래만 하면 다 된다고 믿고, 공산주의자는 계획만 하면 다 된다고 믿는다. 그 반대다. 이 다섯 포지션은 순환구조를 이루며 하나가 끊기면 전체가 다 죽는다는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

drkim's profile image

drkim

2014-01-05 23:33

Read more posts by thi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