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와의 약속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왕조시대로 돌아가 보자.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임금은 임금답게, 귀족은 귀족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각자 자기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인류의 본래 모습이고, 달리 뾰족한 수는 없다고 여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시대가 별 수 없는 봉건시대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학문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다만 소수이지만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각별한 문제의식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 시대는 별 수 있는 특별한 시대니까. 그들이 있기에 이 사이트가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인이 봉건사회의 미몽에서 벗어나 문명사회로 진입한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시카고에 100층짜리 마천루가 올라가고 있을 때 한국은 동학농민항쟁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꿈속의 꿈속이었다. 따지고보면 한국의 산업화는 7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거대한 변화의 시대였다. 아침 저녁으로 도시의 모습이 달라졌다. 확실히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짚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봄이면 보릿고개가 있었다. 필자가 피죽을 먹어본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요즘 사람들은 피죽이 뭔지, 송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72년 무렵에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기술자들이 초가집 처마밑에 애자를 달고 전선을 연결하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런데 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어제도 바뀌고 오늘도 바뀌었으니, 내일도 바뀌고 모레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걸로 끝이라니 황당하다.

필자가 소년시절에 50년 후를 상상한대로라면 지금쯤 일은 로봇이 하고 인간은 달나라로 이주해 있어야 한다. 그다지 달라진게 없다. 눈부신 과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종교를 신앙하고 있다. 여전히 낡아빠진 이념전쟁을 벌이고 있다. 여전히 테러와 범죄가 난무한다. 이게 첨단 과학문명이 맞아? 과학이 원래 이런거였냐고? 달라진게 없잖아.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온통 뒤틀려 있다.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20세기를 규정짓는 네 가지 학문은 마르크스의 사회학, 프로이드의 심리학, 다윈의 진화론, 아담스미스의 경제학이다. 이들은 모두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시대의 학문과 다르다. 새로운 파도가 들이닥친 것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다. 여기에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추가할 수 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흐르는 물결을 타고 가며 변화하는 물질을 논하고 있다.

뉴턴시대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다르다. 그렇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그릇에 담아내야 한다. 20세기를 뒤흔든 다섯 가지 학문, 물리학의 양자론을 필두로 경제학, 사회학, 진화론, 심리학이 모두 뉴턴시대의 입자중심 세계관을 깨뜨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공통분모가 있다. 유기적인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 뉴턴 시대의 입자 – 소승적 관점.. 금이 은보다 낫다.

◎ 새 시대의 양자 – 대승적 관점.. 팀이 개인보다 낫다.

그런데도 철학은 여전히 바뀐게 없다면? 여전히 인류는 뉴턴시대에나 통하던 입자중심의 낡은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면? 무엇이 다른가? 비유하면 소승과 대승의 차이와 같다. 소승은 어떤 개체를 논한다. 입자의 세계관이다. 대승은 시스템을 논한다. 세계관이 다르다. 철학이 다르다.

입자의 세계관이라면 사유의 모형이 필요없다. 왜? 입자는 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다. 이는 입자의 고유한 속성이다. 입자의 숫자만큼 성질이 있다. 철은 철의 성질을 가지고 구리는 구리의 성질을 가진다. 고유한 성질에서 답을 찾으면 된다. 그러므로 모형이 필요없다. 도표를 펼칠 필요가 없이 그냥 각각의 성질을 암기하면 된다.

금은 금이고, 은은 은이다. 쇠는 쇠고, 구리는 구리다. 임금은 임금이고, 귀족은 귀족이다. 평민은 평민이고, 노예는 노예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다. 흑인은 흑인이고, 백인은 백인이다. 그것은 개체의 내재적인 속성에 따라 분별되는 것이며 그 속성은 고유한 것이다.

입자를 넘어 완전성의 세계관으로 오면 달라진다. 입자는 개체지만 완전성은 팀이다. 팀이면 속성이 없다. 고유한 것은 없으며 대신 보편성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설탕 속에 단 것이 없고 소금 속에 짠 것이 없다. 금 속에 금이 없고, 은 속에 은이 없다. 그것은 모두 팀 안에서 관계가 만든 허상이다. 각각의 성질을 암기할 것이 아니라 좌표 안에서 포지션을 찾아야 한다. 도표를 펼쳐야 한다. 원초적인 접근방식이 다르다.

◎ 입자의 관점 – 각각의 고유한 속성을 암기한다.

◎ 완전성 관점 – 좌표 안에서 자기 포지션을 찾는다.

팀은 포지션을 가진다. 달고 쓰고 짜고 매운 것은 타고 나는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팀 안에서 포지션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진다. 오늘 투수가 내일 타자로 바꿀 수 있다. 오늘 노예가 내일 주인으로 바뀔 수 있다. 오늘 평민이 내일 귀족으로 올라설 수도 있다. 팀 안에서 각자의 역할은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속성을 암기할 필요가 없다. 원소번호를 외울 이유가 없다. 좌표 안에서 방향만 찾으면 된다. 경도와 위도만 파악하면 위치를 알 수 있다.

입자라면 선수 개개인이 중요하다. 류현진은 완봉을 하고 이대호는 홈런을 친다. 그러나 완전성이면 팀이 중요하다. 작전이 중요하다. 전략이 중요하고 팀플레이가 중요하고 포메이션이 중요하다. 코치와 감독이 중요하고 프런트의 역할이 중요하다. 배우가 노래를 부르고, 관객은 박수나 치는게 아니라 배우가 관객과 함께 무대를 만들어간다. 열린 무대가 된다.

입자는 선수를 본다. 선수로 보면 선수마다 다르다. 왕선수, 귀족선수, 평민선수, 노예선수가 있다. 남자선수 여자선수 있고, 호남선수 영남선수 있다. 완전성이면 팀이 중요하다. 노무현 감독의 작전이 중요하고 프런트가 중요하다. 상부구조가 중요하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왕선수도 되고 귀족선수도 된다. 선수의 시대는 19세기다. 20세기는 전환기다. 21세기는 팀의 시대다. 축구를 해도 지금은 단독드리블보다 유기적인 패스플레이가 중요하다. 펠레의 개인기는 가고 지금은 토탈 사커가 지배한다. 완전성이 입자를 대체한다. 입자는 개체로 있지만 완전성은 모형으로 존재한다. 그 모형은 팀에 대한 모형이다. 입자는 모형이 없다. 그냥 금은 금이고 은은 은이고 동은 동이며, 모형은 필요없다. 좌표는 필요없다. 나침반도 필요없다. 전략은 필요없다. 개체의 성질을 하나씩 외우면 된다.

21세기에 모형이 아니면 과학이 아니다. 복제시스템의 원본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 시스템이 아니면 학문이 아니다. 이발소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인류의 협동작업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의미나 가치는 그냥 있는게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소승은 가치없고 대승이 필요하다.

시스템을 벗어나면 인간의 가치는 많이 쳐서 600원에 불과하다. 비트코인의 가치는 컴퓨터에 찍혀 있는 숫자에 있는게 아니라 작동하는 시스템에 있다. 시스템이 붕괴하면 비트코인의 가치는 0이 된다. 남태평양 야프섬의 돌화폐와 같다. 돌화폐의 가치는 기억을 공유하는 시스템에 있다.

모두가 기억을 잊어버리면 돌화폐의 가치는 0이 된다. 거래하여 새로 돌화폐를 소유하게 된 사람은 구태여 무거운 돌화폐를 자기 집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나 기억을 바꾸는 것으로 거래를 성립시킨다. 반대로 우리가 기억을 널리 공유할 수 있다면 가치는 무한히 복제될 수 있다.

맥락을 아는게 중요하다. 삶의 의미, 진리의 의미 역시 시스템 안에서 기능한다. 시스템은 모형을 복제하고 에너지를 순환시키며 전체가 한 방향으로 성장한다. 개별적인 의사결정 단위를 모아 더 큰 단위로 의사결정의 층위를 꾸린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필자는 강신주의 소승놀이를 비판한 거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강단학계 전체를 비판하는데, 인류문명 전체를 비판하는데 개인 강신주가 뭘 잘못했느냐는 식이면 곤란하다. 당연히 강신주의 잘못은 아니다. 김동길, 이어령, 김용옥, 황수관의 잘못은 아니다. 어릿광대의 잘못은 아니다. 인류의 20세기가 통째로 잘못한 것이다.

소승적 사고에 사로잡혀 마르크스, 다윈,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아담 스미스를 담아낼 새로운 문명의 그릇을 제공하지 못한 인류 모두의 잘못이다. 뉴턴시대는 끝내야 한다. 뉴턴의 어떤 이론이 틀렸다는게 아니라, 관점이 틀리고, 사고가 틀리고, 시야가 틀렸다. 뉴턴시대의 시스템이 틀렸다.

뉴턴은 입자중심의 세계관에 빠져 있으며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변화를 보아내지도 못한다. 지금은 양자시대다. 양자는 입자와 달리 그 자체에 시간적 변화를 담고 있다. 입자는 시간개념 없어도 성립한다.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 공간의 장소에 뭔가 있으면 그것이 입자다.

왕과 귀족과 평민과 노예와 흑인과 백인과 남자와 여자는 그냥 공간에 있다. 여기 있거나 아니면 저기에 있다. 그러나 팀은 시간 속에만 있다. 시합이 끝나면 팀은 사라진다. 사건은 시간 속에 살아있다. 약속은 시간 속에서 호흡한다. 사회도, 진화도, 마음도, 경제도, 양자도 시간 속에서 숨을 쉬는 사건적 존재이며 시간이 멈추면 죽는다. 경제도 죽고, 양자도 죽고, 마음도 죽고, 진화도 죽고, 사회도 죽고, 우리의 21세기도 죽는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전시대의 금이나 은이라면 시간이 흘러도 금이고 은이다. 남자는 시간이 흘러도 남자고, 여자는 시간이 흘러도 여자다. 이건 옛날 방식이다. 이제는 변화와 사건을 논해야 한다. 주의해야 한다. 공간의 입자도 있고, 별도로 시간의 사건도 추가로 있는게 아니다.

시간의 사건만 있고 공간의 입자는 없다. 금이나 은도 양자단위로 쪼개고 들어가면 돌연 모습을 감춘다. 그것은 인간의 착각속에 피어난 환영이다. 소승은 입자를 보는 관점이다. 대승은 팀을 보는 관점이다. 입자는 색즉시색이다. 팀은 색즉시공이다. 보는 방향이 다르다. 바야흐로 스마트 시대다. 이제는 눈을 떠야 한다. 입자를 버려야 한다.

부지런한 강신주의 소통은 입자개념이다. 낡은 시대의 구닥다리다. 스님이나 목사도 강신주처럼 강연은 많이 한다. 그들은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하므로 진짜가 아니다. 이발소 그림과 같다. 대중이 원하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성철은 끝내 그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전두환의 면담요청은 거절되었다.

그리하여 큰 소통을 이루었다. 러셀의 무신론은 맞는 말이지만 힘이 없다. 왜? 믿음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진정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은 없다. 믿는 사람이 없는데, 믿음을 버리라는 말이 먹히겠는가? 바보냐? 믿음은 집단에 가치판단을 위임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원래 집단에 의지하여 가치판단을 위임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 위임하는 집단을 종교로 선택했을 뿐이다. 종교만이 순수하게 집단에 의지하는 인간의 본능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정치집단인 국가나 정당, 그리고 혈연집단인 가족에, 영리집단인 회사도 있지만 그런 집단은 고유한 목적이 있다. 종교만이 집단화를 목적으로 집단한다. 그러므로 과학이 신앙을 비판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에게 신앙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는 대신 위임한다. 그것은 공과 같고 허와 같다. 믿음에 대한 비판은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격이다.

무신론은 개인을 설득하는 말이다. 입자의 관점에 서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때 집단으로 도피하여 정치적인 기동을 한다. 종교는 집단에 가치판단을 위임하므로 종교인에게 신앙은 없다. 믿음이 없다. 단지 그것을 표방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 따른 것이다. 강신주의 소통개념은 러셀의 무신론과 같아서 공허하다.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에게 사리분별을 논하면 그것이 말이 되는가?

믿음은 사회적 시스템이다. 시스템으로만이 시스템을 깰 수 있다. 믿음은 대승이다. 대승으로만이 대승을 깰 수 있다. 믿음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에너지의 영역이다. 에너지로만 에너지를 깰 수 있다. 믿음은 팀플레이다. 팀플레이로만 팀플레이를 깰 수 있다. 오직 완전성으로만 불완전성을 이길 수 있다.

성철처럼 산에서 절대 내려오지 않는 사람, 수준이하를 고집하는 대중들과는 절대 말하지 않는 사람, 입을 꽉 닫아거는 사람이 필요하다. 대중이 원하는 그림은 절대 그리지 않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중이 원하는 뽕짝은 절대 연주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편한 옷은 츄리닝이다. 좋은 옷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팀플레이 안에서 호흡하는 것이다. 자신을 만족시키는 옷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동료의 패스를 잘 받는 옷을 선택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색깔의 차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도로를 멋지게 디자인하는 차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시스템적 사유다.

지금은 성철 할배가 온다해도 사람들이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때는 왜 삼천배를 하면서까지 그 높은 곳으로 성철을 찾아갔을까? 왜 그때는 입을 꽉 다물고 있었는데도 저절로 소통이 되었을까? 왜 지금은 강신주가 매일 강연을 뛰는데도 사방으로 소통이 꽉 막혔을까?

그때는 봤기 때문이고 지금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았는가? TV를 보았다. 이전에는 TV가 없었다. 무엇을 보았는가? 전등을 보았다. 이전에는 전깃불을 본 적이 없다. 호롱불 켜놓고 숙제하곤 했다. 세상이 바뀌자 사람들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성철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보이는 것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힘의 존재를 깨닫고 세상과 팀플레이를 할 맘을 먹은 것이다. 변화가 중단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만해졌다. 대승을 버리고 소승으로 도망갔다. 요즘은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넘어 아주 힌두교로 퇴행하는 판이다. 팀플레이 깨고 개인플레이 하는 시대다.

왜? 큰 변화가 거기서 그쳤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신통한 것이 나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리어 지금쯤 진짜배기가 나와야 한다. 한 동안 막혔던 물이 다시 세차게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짜 큰 변화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꼴찌 한국이 갑자기 일등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인에게 그것은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새누리당 찍고, 2등 아니 3등 아니, 원래의 꼴등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그렇다. 한국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백여국 중에서 꼴찌였다. 지금은 갑자기 1등으로 올라서려 하고 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이다. 당황해서 뒷걸음질 친다. 미국 뒤에 숨고 일본 뒤에 숨는다. 이해한다. 꼴등만 하던 녀석이 갑자기 1등하면 무섭다. 갑자기 주목 받으면 무섭다. 그러나 다 도망칠 수는 없다. 99퍼센트의 한국인들이 도망치더라도 우리는 남아서 무대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인류호의 팀플레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류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태리도, 스페인도, 네덜란드도, 프랑스도, 영국도, 미국도, 일본도 돌아가며 다 한번씩 했던 역할이다. 돌아가며 한번씩 무대에 올라 마이크 한 번 잡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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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4-01-13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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