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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의미는 동기부여에 있다. 물질의 근본이 에너지라면,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적인 동기다. 동기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얻어지며, 여기에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더하면 사건의 완결성이 된다.
인간은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려고 하며, 사회에서는 사건을 완결시키려고 한다. 인간에게 그것은 의사결정원리로 작동하며, 개인에게는 깨달음이 되고, 사회적으로는 권權을 형성한다.
◎ 자연 : 에너지≫시공의 완전성≫사건의 완결성
◎ 인간 : 동기부여≫개인의 깨달음≫사회의 권權
존재는 상호작용이며, 상호작용은 환경과 인간의 맞섬이다. 여기서 인문학의 전제는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위다. 소극적으로 환경에 적응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환경을 통제하는데 인문학의 의미가 있다.
자연에서는 공간만 보지 말고 시간까지 보아야 하고, 인간에게서는 개인만 보지 말고 사회까지 보아야 한다. 거기에 자연의 생장점이 있고 사회의 방향성이 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철학이다. 상호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 탈레스
시간과 공간과 그리고 물질의 삼위일체다. 셋의 관계에서 보편적인 지식이 얻어진다. 그것은 완전성이다. 물질이면서 공간적으로 망라하고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것의 좋은 예는 물이다. 강물이 흘러 바다에 이르며 그 과정에 전부 하나로 연결되듯이 세상은 본래 통합적으로 존재한다.
**◎ 소크라테스**
지식은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진술되는 지식의 전제를 추궁하면 개별적인 지식들이 낱낱이 격파되어 무지가 드러나지만, 역설적으로 보편적인 지식의 가능성이 포착된다. 불완전한 개별적 지식이 크게 얽혀서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 데서 진정한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 플라톤**
진정한 지식은 소크라테스의 귀납을 뒤집은 연역으로 얻어지며 여기에는 가정법과 모형화가 소용된다. 근원의 지식을 이데아로 가정하고, 질료와 형상으로 모형화 하면 보편적인 지식이 조직된다. 이를 근거로 인류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주의를 기획한다. 진정한 지식의 출발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연역을 하부구조에 적용하면 지식이 복제되어 과학을 이룬다. 그 방법은 분류학이다. 질료와 형상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계통을 이룬다. 계통을 적용하여 분류하는 것만으로도 지식이 대량으로 생산된다. 분류를 사용하면 샌님이 혼자서 백과사전도 거뜬히 쓸 수 있다.
◎ 알렉산드로스
탈레스의 자연을 소크라테스가 인간에게로 가져왔고, 소크라테스의 귀납을 플라톤이 연역으로 뒤집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일반화 시켰다. 알렉산드로스가 보편적인 세계의 건설을 실험함으로써 헬레니즘 문명의 이념을 완성했다. 가설≫적용≫검증의 일사이클이 완결되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원근법을 적용하여 세상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시범을 보였다. 탈레스≫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알렉산드로스의 전개에서 결함은 플라톤의 이데아가 수학적 가정에 의존한 거다. 포지션만 있고 내용이 없다. 이 부분을 조금이나마 채운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 예수
자연이 시간, 공간, 물질의 3박자를 갖추듯이 인간은 원죄, 사랑, 구원의 3박자로 통합된다. 과거의 원죄에서 미래의 사랑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그 극점에 통합적 진리가 있으며, 이를 신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구원이다. 이를 적용하면 인류는 하나의 통합된 존재라는 점이 드러난다.
◎ 석가
플라톤이 완성하지 못한 이데아는 사건의 기본단위다. 기본단위는 자연의 인과법칙이며 이를 적용하면 고집멸도 사성제가 되고, 삶의 생로병사, 사건의 기승전결로 복제된다. 8정도 12연기로 계속 확대되어 널리 망라한다. 연역의 근거가 되는 기본단위를 깨달으면 보편적 지식에 이른다.
◎ 대승불교
기본단위의 완전성에 상호작용을 적용하면 사회의 진보로 전개된다. 팀, 조직, 집단, 세포, 생명, 세력, 생태계 따위 모든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의 방향성을 이룬다. 외부 에너지를 받아들여 내부 역량을 가동하며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하는 형태로 내적 모순을 해소해 간다.
◎ 공자
완전성은 개인에서 군자, 사회에서 이상국가, 집단에서 세력화다. 완전성을 반영하는 내부의 본성은 인, 외부로 드러나면 의, 스타일을 이루면 예, 그리로 나아가면 지다. 공자는 플라톤처럼 핵심을 생략하고 가정법을 썼다. 완전성은 주역에 있다고치고 일단 현실에 적용해 본 것이다.
◎ 맹자
공자의 완전성을 발전시켜 미와 추, 선과 악, 의와 불의, 신과 불신, 지와 무지, 패도와 왕도로 대칭시켜 구체화 함으로써 동기부여라는 철학의 목적을 명확히 했다. 공자를 현실에서 실천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으나 분류학 대신 2분법적 대칭원리를 사용했다는 한계가 있다.
◎ 동중서
완전성은 하늘의 법칙이며 인간에게는 사회의 법칙으로 연역된다. 공자의 가르침이 막연하고 작위적인 도덕적 당위가 아니라 자연법칙에 근거한다는 말이다. 이는 도교의 유교비판을 받아들여 절충한 것으로 유교의 근거는 주역인데 주역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한 한계가 있다.
◎ 주희
하늘의 법칙인 이와 기가 인간의 법칙인 인의예지로 복제된다. 불교의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공간구조인 주역의 음양을 시간구조인 이와 기로 바꾸었을 뿐 주역의 난삽함을 말끔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이와 기가 플라톤의 질료와 형상을 연상시키는 점에서는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 왕양명
이와 기로 나눌 필요는 없고, 밸런스 하나로 통일된다. 자기 안에 밸런스를 갖추는 것이 진정한 동기부여가 된다. 선종불교의 영향으로 한 방으로 끝내려 했다는 점에서 일의성의 모색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 방에 끝내지는 못했다. 주역의 순환논리라는 함정을 극복하지 못했다.
◎ 노자
완전성은 공간이 아닌 시간, 멈춤이 아닌 변화에서 얻어진다. 역동하는 자연의 에너지를 얻는데서 인간의 동기부여를 이룬다. 그러나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인간의 우위를 추구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 제자리걸음을 극복하려면 소극적 적응이 아니라 적극적 통제라야 한다.
◎ 장자
자연의 에너지를 자기 안에 갖추어 동기로 삼는다. 노자와 달리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모색한 점이 각별하나 사회의 진보로 나아가지 못했다. 고립된 시골사람의 한계다. 대신 예술분야의 성취로 가닥을 잡았다. 모든 중국인의 예술혼에는 장자의 호연지기가 얼마간 스며들어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
플라톤의 이데아는 기독교의 신과 본질에서 같다. 신의 이데아가 이성이라는 형태로 인간에 투영된다. 신이 영혼을 질료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냥 플라톤의 사상을 표절하여 기독교에 이식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적 분류법은 그대로 교회의 조직체계에 베껴먹었다.
◎ 칸트
교회에서만 신을 찾지 말고, 개인적인 영혼의 구원만 바라지 말고, 사회에서도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참된 구원에 이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구조를 사회의 윤리, 도덕에 적용하여 일반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완전성의 근거제시 없이 말로 당위를 선언했을 뿐이다.
◎ 니체
영혼이니 구원이니 개수작 마라. 사회적인 권력욕이 기독교의 구원을 대체하여 삶의 동기부여를 이룬다. 기독교의 논리구조를 사회의 권력구조로 복제하여 설명할 수 있다. 플라톤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가져갔는데 도로 가져온 것이며 공허한 이데아 대신에 권력을 두었다.
◎ 샤르트르
실존이 기독교의 신을 대체한다. 기독교의 원죄≫사랑≫구원의 논리구조를 부조리≫저항≫실존으로 대체할 수 있다. 다만 하나의 아이디어를 던졌을 뿐 구체화 하지는 못했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는 선언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사회에서 답을 찾으려 한 점은 평가된다.
◎ 마르크스
사회의 권력관계 안에서 인간은 진정으로 동기부여 된다. 니체를 뒤집으면 진정한 동기부여는 강자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약자의 저항정신이다. 기독교의 원죄≫사랑≫구원은 마르크스에게서 모순≫저항≫이상주의로 대체된다. 환경에 대한 인문정신의 우위를 명확히 하지는 못했다.
◎ 마오
마르크스를 뒤집어 권력관계를 배제했을 때 오히려 진정한 동기부여가 된다. 장자의 호연지기에서 비롯된 예술가적인 열정에 큰 에너지가 있다. 모순에 맞선 대칭적 분노보다 순수한 사람의 비대칭적 열정이 더 강렬하다. 인문정신의 우위를 강조하다 허황된 정신승리로 빠진 셈이다.
◎ 프로이드
성충동이 직접적인 동기부여다. 그러나 이는 검증되지 않은 신념이다. 진정한 동기부여는 개인이 사회의 집단적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데서 얻어진다. 성욕 에 목숨 거는 사람은 없지만 푸틴에게 열받은 사람은 목숨을 건다. 차라리 융의 무의식 개념이 더 심리의 진실에 가깝다.
찾아보면 인물이 더 있겠지만 대략 이 정도로 정리하겠다. 예의 열거한 인물들이 실제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이는 필자의 구조론적인 해석이다.
철학의 중핵은 동기부여다. 물질은 에너지가 답이다. 에너지가 자동차도 굴리고 전구도 켜고 건물도 세운다. 밥이든 옷이든 집이든 다 에너지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삶의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완전성에서 온다.
인간은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고자 하며 거기서 에너지를 조달한다. 추한 것을 미하게, 악한 것을 선하게, 약한 것을 강하게, 느린 것을 빠르게, 죽은 것을 살아나게, 쓰러진 것을 일으키게 하는 데서 동기를 얻는다.
그것은 개인에게서 깨달음이고 사회에서 이상주의다. 예의 철학자들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근원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엔진이다.
단순히 미학적 완전성에 그친다면 약하다. 소승이 아닌 대승으로 나아가야 한다. 불완전한 것을 완성시키려는 의도가 개인적 취향이나 예술가의 근성이나 동물의 성충동이 아니라 사회의 불온한 공기에서 얻어질 때 힘이 있다. 집단의 스트레스가 진정한 동기를 부여한다. 에너지를 태워야 하는 것이다. 한 명을 움직이는 개인의 완성이 아니라 만명을 움직이는 집단의 이상주의라야 한다.
그것은 본래 자연에 있고 다시 인간에게 가져오며,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연역하고 다시 과학으로 일반화 시킨다. 엔진은 완전성이며 완전성은 공간의 대칭성을 시간의 비대칭성으로 바꾸어, 척력을 인력으로 바꾼다.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면 척력이다. 일정한 조건에서 만인대 만인의 사랑으로 바뀐다. 예수가 강조한 것을 다빈치가 입증했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석가의 아이디어를 보태야 완전하다.
처음 탈레스가 자연에서 완전성을 찾고자 했고,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인간에게로 가져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완전성을 묻고 다녔으며, 플라톤이 완전한 자연과 불완전한 인간의 관계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 곧 질료와 형상의 관계로 바꾸어 연역의 엔진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지식의 대량복제에 써먹었다. 지식은 졸지에 포드시스템으로 대량생산 되었다.
그러나 불완전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가정법의 남용이다. 수학적 장치로만 유의미하다. 플라톤은 막연하게 그런게 있다고 치고, 일단 채워야 할 공란을 비워놓고 과감하게 사유의 모형을 만든 것이다.
이데아를 실물로 보여준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그것은 하나의 영감에 지나지 않지만 그 충격파가 거대한 맥놀이를 일으켜 이후 근대가 일어났다.
학문의 계보는 탈레스≫다빈치≫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여야 한다. 순서가 바뀌었고 불완전하지만 그런대로 포지션이 채워져서 그럭저럭 철학은 여기까지 굴러왔다.
동양에서는 석가가 다빈치다. 석가의 깨달음은 군주의 통치목적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와 군주의 불편한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에서 다빈치는 주역이다. 그러나 주역은 영감을 줄 뿐 점괘가 틀려서 쓸모가 없었다.
유교는 최종근거를 공란으로 비워놓고, 누가 꼬치꼬치 따지면 음양이니 오행이니 하면서 대충 둘러대곤 했다. 음양은 공간의 대칭성만을 강조하므로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오행은 비대칭적이나 음양과 맞지 않아 겉돈다. 한의사나 풍수사들은 음양과 오행의 논리를 그때그때 편한대로 가져다 쓴다.
엔진을 공란으로 두고 하부구조만 발달시키다 보니 어색하게 되었다. 음양론의 순환논리에 빠져 과학의 대량복제에 실패하였다. 굳이 말하자면 석가≫공자≫맹자여야 한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철학을 기독교가 가져다 쓰는 바람에 철학이 기독교와의 싸움이 되었다. 샤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모호하게 말했지만 그냥 교회 가지마라는 말이다. 본질은 영혼이고 구원이고 천국이다. 그런거 없다. 인간의 삶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영혼에 해당하는 깨달음, 구원에 해당하는 진보, 천국에 해당하는 이상주의는 현실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
샤르트르는 점잖게 포지션만 말했고 니체는 노골적으로 핵심을 짚었는데 마르크스가 옳았다. 강자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약자의 저항정신이 진짜다. 더 완전성에 가깝다. 마르크스도 틀렸다.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 보다는 깨달음에 따른 순수한 열정이 더 강력하다. 그러므로 장자의 영향을 받은 마오가 더 진리에 근접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마오는 학교공부를 제대로 안했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불신이 있어서 지나친 정신주의로 기울었다.
이들을 각기 떼놓고 보면 모두 오류가 있고 한계가 있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커다란 지식의 나무 안에서 일정한 포지션이 있다. 각자 가지 하나의 역할은 해내고 있다. 그러나 탈레스≫다빈치≫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가는 패턴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 포지션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상 필자가 해석한 철학의 계보를 한 줄로 이으면 답은 명확하다. 존재는 상호작용이며, 그것은 환경과 인간의 맞섬이고,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위로부터 인문학은 출범하며, 먼저 탈레스의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가서 다음 다빈치와 석가에게서 완전성의 엔진을 찾고, 소크라테스의 역설, 플라톤의 연역, 아리스토텔레스의 복제로 시스템을 돌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부단한 상호작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답을 아는 것은 과학이고 환경에 대한 인문정신의 우위에 서서 상호작용을 계속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 길로 가면 소승의 미학을 넘어 대승의 열정에 이른다.
상호작용은 추를 미로, 악을 선으로, 불의를 의로, 불신을 신으로, 무지를 지로 바꾸는 데서 에너지의 낙차를 일으켜 동기부여하며, 그 동기는 부단히 발전하고 진보하고 성장하는 조직, 팀, 자본, 국가, 세력, 사회에서 실현되며, 사회적인 권의 획득으로 구체화 되고, 그 권은 강자가 아닌 약자, 지배가 아닌 저항, 탐욕이 아닌 복수, 패권이 아닌 복원에서 참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며,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대칭적 분노가 아니라, 그런 오염이 없이 순수한 사람의 비대칭적 열정에서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개인의 신념이나 충동, 욕망이 아니라 사회의 스트레스에 감염되고 동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큰 세상으로 나아가 호연지기를 얻어야 한다.
**다빈치의 의미**
밀로의 비너스상은 완전성을 반영하지만 약하다. 그 안에 에너지의 순환이 없다. 에너지가 들어가는 입구와 빠져나가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소승적인 미학에 불과하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13인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소실점에 잡혀서 전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비대칭, 그에 따른 팽팽한 긴장이 있다. 대승적인 미학이 있다.
비너스상을 보고 최후의 만찬을 봤는데도 머리에 총맞은 흔적이 없다면 실패다. 머리가 쾅 하고 뚫려서 구멍이 나야 하며 찬바람이 그 속을 왕래해야 한다. 세상을 통일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제공한 거다. 이후 그 충격으로 근대가 불붙듯이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공간의 대칭이고 사건의 완결이 아니라는 거다. 시간 속의 기승전결에도 찾아야 할 소실점이 있다. 그것은 석가가 해냈다. 다빈치와 석가를 합치면 구조론의 일의성이 포착된다.
밀로의 비너스상은 소승적인 내재적 완결성이 있다.
원근법이 적용되어 대승적인 사건의 완결성이 있다. 비너스상의 내적으로 닫힌 완결성이 아니라 거기에 관측자의 시선까지 포함하여 외적으로 열린 완결성이다. 예수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지구의 창조에서 심판까지, 13인에서 하느님까지가 통일성을 이루며 별개의 여럿의 집합이 아니고 원래부터 한 덩어리, 한 사건, 통째로 하나임을 역설하고 있다. 인간은 통합된 존재다.
잘 보면 예수님 머리 뒤에 후광이 있다. 그것이 없는 데도 그것이 있다. 이 두 그림을 뻔히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면 할 말이 없다. 8만 4천 법문이 이 안에 다 있다.
비너스상과 최후의 만찬을 합친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다. 천지창조는 약하지만 다빈치 석가로 가는 작은 단서를 제공한다. 공간의 대칭성과 시간의 비대칭성이 만나 일의성을 이룬다. 물론 비너스상과 최후의 만찬을 둘 다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세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기초를 세운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