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장자, 니체

70년대 마왕퇴에서 도덕경이 발굴된 이후, 그동안 학계에 새로운 보고가 많이 나왔다. 90년대에도 고분에서 도덕경이 일부 기록된 죽간이 나와서 노자에 대한 학계의 의심이 많이 거두어진 것이다.

심지어 노자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있었다. 문제는 노자폄훼가 유교측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도교측의 날조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도교는 학교를 짓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쉽게 한다.

김두한이 거짓 자서전을 쓰는 바람에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오해를 산 것과 같다. 기생 계월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공연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다.

전국시대를 전후로 도교가 유교를 맹렬하게 공격했는데 그럴수록 도교만 손해를 보게 되었다. 오늘날 진보가 선점전략이 아닌 반격전략을 쓰는 것이 반복적인 집권실패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과 같다.

노자는 재발견되어야 한다. 도교의 반유가적인 성격은 정치적 대립에 의한 후세의 조작이다. 노자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인의를 강조했음이 새롭게 드러났다. 인의가 유교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인의는 유교의 불교, 도교를 포함한 동양사상의 뿌리다. 사방으로 뚫려있는 중국의 황토지대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인의가 아니면 이러한 지정학적 구조는 절대 유지되지 않는다.

구조론으로 보면 도교의 큰 바운더리 안에 유교가 들어가야 한다. 도교가 질의 포지션이면 유교는 입자의 포지션이어야 한다. 도교는 상대적으로 리더의 철학에 가깝고 유교는 실무자의 방법론이다.

도교는 철학적이고 유교는 과학적이다. 그런데 도교가 유교를 공격하느라 자질구레한 트집잡기에 골몰하다보니 찌질해졌다. 도교가 리더의 호연지기가 아니라 찌질한 시비꾼의 딴죽걸기로 되었다.

큰 것을 건드려야 하는데 작은 것으로 이기려 한 것이다. 오늘날 진보도 큰 방향제시보다 작은 정책 아이디어로 승부하려는 찌질이 근성을 보이고 있다. 무상급식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이 그렇다.

진보의 작은 아이디어를 보수가 빼먹기 때문에 결국 남좋은 일 하게 된다. 청계천만 해도 진보쪽 아이디어였다. 진보는 큰 방향제시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 가면 지자체만 이기고 대권은 진다.

노자의 출발점은 한 마디로 역설의 힘이다. 그런데 역설은 상대성이다. 상대성은 구조론에서 비판하는 대칭행동이다. 그러나 도道라는 개념은 비대칭개념이다. 도가도 비상도의 참뜻이 거기에 있다.

역설은 포지션을 고정시켜야 하고 도는 그 역설을 넘어선다. 역설은 포지션을 나누고 도는 다시 그것을 합친다. 약자는 역설로 강자에 맞서지만 강자는 도로 약자를 다스린다. 역설은 도가 아니다.

그러나 노자의 제자들이 역설에 매몰되어 안티전문으로 나가는 바람에 자신의 입지를 축소시켰다. 진중권짓을 일삼은 것이다. 도교가 노자를 왜곡하고 노자를 파괴했다. 유교와 싸우려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도 마르크스를 발전시키기는 커녕 도리어 왜곡하고 파괴한다. 마르크스가 살아돌아왔다면 무뇌좌파들부터 때려잡았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큰 방향제시를 취하고 세부전략은 버려라.

그런 점은 유교도 마찬가지다. 증자는 유교를 종교화 시키면서 유교의 본질을 파괴한 사람이다. 학문의 본질로 보면 증자는 절대 공자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법가도 유교에서 나왔으나 공자의 적이다.

이렇듯 뒤로 갈수록 근본이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누가 예수를 죽이고 있는가? 성경으로 예수를 때려잡는 세력이 누구인가? 성경을 강조할수록 예수는 죽는다.

잘먹고 잘살았던 부자 솔로몬왕을 앞세워서 가난뱅이 예수를 때려잡는 세력이 일부 퇴행한 기독교다. 기독교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예수의 근본으로부터 너무 멀리까지 온 것이 사실이다.

노자의 의미는 힘을 발굴한데 있다. 자연법칙으로 설명하는 거다. 보통은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당위에 기댄다. 그런데 윤리, 도덕은 구체적인 사실에 기초한다. 사실과 가까울수록 진리와 멀다.

철학은 추상화 되어야 한다. 예컨대 누군가 근친상간을 했다고 치자. 그 소식을 듣기만 해도 당장 화가 나지 않느냐 이거다. 이런 접근은 설득력이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문명인 “사람을 먹다니 그게 인간이 할 짓이냐?”

야만인 “사람도 안 먹다니 위엄이 없는데 어떻게 인간행세를 하냐?”

‘근친상간이 뭐 어때서? 본인들이 좋아서 그러는데?’ ‘식인관습이 뭐 어때서? 위엄을 키우는데’ ‘할례풍속이 어때서? 위생에 좋은데’ ‘개고기 먹는게 어때서? 맛만 좋구만. 문화 상대주의 모르냐?’

윤리와 도덕이 무력화 되는 지점이 있다. 한국인도 별 수 없다. 논리의 근거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인간의 감정에서 찾을 수 없고 최종적으로 자연법칙에서 찾아야 한다. 에너지에 닿아야 진짜다.

노자가 발견한 에너지는 장기전이다. 강은 단기전, 유는 장기전이다. 강은 생존전략, 유는 세력전략이다. 강은 소승, 유는 대승이다. 세력을 일구고 팀플레이를 하고 장기전을 펼치면 승산이 있다.

이는 물리법칙이므로 맞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장자는 미학적 완결성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관점의 이동이 소용된다. 구조론적으로 수평에서 교착된 것을 수직에서 타개한다. 비대칭행동이다.

에너지가 대상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금의 가치는 금 안에 있는게 아니라 그 금과 사회와의 관계에 있다. 금보다 좋은 것이 발견되면 금의 가치는 사라진다.

여기서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에 대한 착각이 있다. 금의 가치가 금 안에 고유하다는게 상대적인가, 아니면 금의 가치가 사회와의 관계에 따라 변한다는게 상대적인가? 우리는 이를 거꾸로 알고 있다.

항우의 힘은 항우 안에 있다. 항우의 힘은 절대적이다. 유방의 힘은 유방 안에 없다. 유방은 장량, 한신, 번쾌, 경포, 소하 등을 거느렸고 유방의 힘은 그들 유능한 부하들에게서 나온다. 상대적이다.

언뜻 생각하면 항우가 절대적이고 유방이 상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항우의 힘은 넓은 공간에서의 회전에만 먹힌다. 좁은 골목으로 몰아넣으면 항우의 기동력은 차단된다.

우리는 세상을 거꾸로 알고 있다. 겉으로 절대적인 것이 실제로는 상대적이요 겉으로 상대적인 것이 실제로는 절대적이다. 유방은 팀플레이를 하므로 상황에 맞는 대응을 할 수 있으니 절대성이다.

노자가 막연한 직관을 제시했다면 장자는 이를 논리학으로 발전시켰다. 혜시가 대칭의 상대성으로 공격하면 장자는 비대칭의 절대성으로 방어한다. 문제는 역설과 역설의 역설을 구분하는 문제다.

구조론은 한 번 역설이 아닌 두 번 역설이다. 노자의 유柔는 대칭이다. 그러나 도는 비대칭이다. 역설을 한 번 하면 상대성이지만 두 번 하면 절대성이다. 그러나 대중은 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 방향성의 힘 – 구조론의 절대성

◎ 완결성의 힘 – 장자의 비대칭

◎ 역설의 힘 – 노자의 상대성

◎ 윤리의 힘 – 실천적, 감상적인 힘

◎ 권력의 힘 – 니체의 권력의지

진정한 힘은 집단이 가는 방향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척력을 인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만인대 만인의 투쟁을 만인대 만인의 협력으로 바꿀 때 강한 힘은 얻어진다. 대승의 힘이자 절대성의 힘이다.

팀플레이에서 나오는 에너지 낙차다. 노자든 장자든 니체든 실제로는 이 집단이 가는 방향성의 힘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막연히 짐작으로 말했을 뿐 구조를 정확히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장자의 힘은 예술분야에서 발견된다. 이는 신호등과 같다. 마주보고 교착되어 애를 태울 때 한 사람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한다면 순식간에 커다란 힘이 만들어진다. 혼돈에서 에너지가 연출된다.

때로는 무질서가 큰 질서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대란으로 대치를 이룬다는 모택동의 문화혁명 발상이 여기에서 나왔다. 문화혁명이 폭주하던 내부 에너지를 소진시켜 방향을 잡은 것은 사실이다.

노자의 힘은 상대성의 힘이다. 힘을 직접 작용하는 것보다 슬쩍 틀어버리는 데서 큰 힘을 얻는다. 정면을 치는 것보다 급소를 치는게 낫다. 정면으로 상체를 가격하는 것보다 슬쩍 딴죽을 거는게 낫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옆바람을 받아서 가듯이 힘의 진행방향을 슬쩍 틀어줌으로써 굉장한 힘을 얻는다. 그러나 상대성의 방법은 항상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살짝 딴죽을 걸기만 해도 힘 센 거인을 넘어뜨릴 수 있지만, 표도르 형님에게 딴죽걸기를 시도했다가는 뒈지게 맞는 수가 있다. 사람 봐가며 역설해야 한다. 노자의 역설은 항상 성공하는게 아니다.

역설은 폭주하는 상대방을 견제할 때만 효용이 있다. 역설은 참모의 꾀일 뿐 리더의 자질은 아니다. 저항, 비판, 안티만으로는 정권을 잡을 수 없다. 찌질한 수법 버리고 정면으로 큰 승부를 걸어야 한다.

윤리의 힘은 하부구조의 힘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실천에서 얻어진다. 윤리, 도덕은 언제나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구체적일수록 쉽게 힘을 결집할 수 있지만 역시 쉽게 방어할 수 있다. 약점이 있다.

대개 권위주의 정권이 윤리, 도덕을 강조한다. 쉽게 힘을 결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권위주의적인 독재자가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다가 부패로 망한다. 박정희의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다.

윤리, 도덕과 같이 구체적인 힘은 상대방의 회피기동에 약하다. 철학은 추상화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사실을 배제해야 한다. 현실보다 비현실에서 큰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비현실적이기에 도리어 현실적인 힘을 가진다. 장기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단기전이다.

단기전은 상대방의 회피기동에 막혀 교착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즉자적인 대응을 하는 시스템에서는 무조건 도망쳐버리면 된다. 우리는 모택동의 비현실주의를 본받아야 한다.

장개석 군대의 지리멸렬과 홍군의 의연함은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같은 중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소속에 따라서 사람이 180도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왜 허약한 중국인은 갑자기 강해졌을까?

공산주의? 아니다. 공산주의 사상 어디에도 그런 콘텐츠는 없다. 모택동을 따라간 농민은 스탈린도 포기한 바로 그 농민이다. 스탈린은 농민을 구제불능으로 보고 도시로 강제이주 시켜 버렸다.

농민과 혁명은 맞지 않다. 농민이야말로 철저하게 봉건적이고 반동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지주를 타도하자거나 재산을 빼앗자거나 이런 말로는 절대 농민을 움직일 수 없다.

중국 농민이 움직인 이유는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가지자는 작은 목표가 아니라 세계를 바꾸자’는 큰 목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장자의 방법이다. 중국인은 별수 없는 도교주의자다.

모택동의 사상은 실로 공산주의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수천년 간 중국인의 전통 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도교사상을 모택동이 공산주의로 포장하여 자극한 것이다. 이건 전혀 다른 것이다.

중국의 농민들은 장자의 대붕을 쫓아 순교자의 마음으로 장정을 떠났다. 그것은 정치적인 저항이 아니라 그 수준을 넘어선 종교적인 열정이었다. 모택동은 장자의 방법으로 큰 힘을 만들었다.

니체가 강조한 권력의 힘은 이미 있는 힘이다. 그 힘은 새로운 힘이 아니므로 그다지 의미가 없다. 물론 니체가 이 부분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누구든 실제로는 방향성의 힘을 말하고자 한다.

생각은 그렇지만 구조론을 모르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니체에게도 방향성을 제시한 예수와, 미학적 완결성을 제시한 장자와, 역설을 제시한 노자가 있었겠지만 실제 사회에 반영된 것은 인종주의다.

철학자의 발언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 해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때가 많다. 누구든 구조론이 말하는 진짜배기 힘을 말하고자 하겠지만 실제로 일관되게 그것을 가리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를 말했고 도는 집단이 나가는 방향성이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같다. 그러나 노자가 명확하게 도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알아도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노자에게 있을 리가 없다.

이는 그 시대의 한계로 보아야 한다. 석가도 마찬가지다. 대승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당시에는 없는 개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노자가 사회의 윤리 도덕이 아니라 자연의 힘을 이야기했다는 거다.

사회의 윤리, 도덕은 변하므로 상대적이지만 자연은 변하지 않으므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역설의 역설, 곧 절대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역설은 대개 상대성의 영역이다.

누가 도덕경을 낱낱이 해석하면 그럴수록 왜소해진다. 더 많은 노자의 실패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알려진 도덕경은 후세의 바보들이 왜곡해놓은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누가 노자의 진의를 알겠는가?

철학의 답은 행복이 아니라 상호작용 총량증대다. 이렇듯 추상적으로 말해야 한다. 구체화 될수록 잘못된다. 상호작용 총량의 지속적인 증가가 있어야 집단의 치고나가는 방향제시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다. 자연의 에너지로 말해야 진짜다. 노자는 자연의 에너지를 발견했고 장자는 미학적 에너지로 발전시켰다. 니체는 권력의 에너지로 비웃었다. 어쨌든 답은 에너지에 있다.

노자, 장자, 니체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의미없다. 단지 철학자 이름팔아 장사하는 김용옥 부류가 그 철학자에게 우호적이면 좋게좋게 해석해주는 것이다. 왜? 그래야 장사가 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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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4-03-1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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