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팟캐스트 녹음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노자 도덕경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풀이하는 취지로 한 설법이라고 한다. 화광동진은 큰 스승이 비범함을 감추고 평범함 속에 숨어있다는 의미다. 검색하면 나온다.
구조론에서는 ‘달이 뜨다’에서 반복적으로 훈련하는 ‘이중의 역설’이다. 한 번 역설로 부족하고 두 번 역설해야 한다. 한 번 역설은 상대성이고 두 번 역설은 절대성이다. 상대성으로 상대를 공격하면 안 된다. 역설적인 자기 소개가 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상부구조로 올라가서 절대성으로 공격해야 한다.
그 사람의 관점이 상대성이냐 절대성이냐를 포착하므로 나는 상대방의 글을 대개 3초 안에 판단해 버린다. 직관한다. 어려운 용어로 길게 써봤자 안 읽는다. 물론 성급하게 판단하였다가 잘못 볼 수도 있다.
노자의 도가도나 금강경의 색즉시공을 떠올려도 좋다. 뭔가 애매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보어의 양자론을 떠올려도 좋다. 역시 애매하다. 중력파의 발견으로 인플레이션 이론이 검증되었다고 한다. 역시 애매해야 한다. 그런데 애매한가? 마땅히 애매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왜 애매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건 애매하지 않다. 쉽잖아!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역시 애매하지 않다. 전자는 멈추어 있고, 후자는 운동하고 있다. 멈춘 것도 애매하지 않고, 달리는 것도 애매하지 않다. 그렇다면 잉태하고 있는 것은 어떤가?
◎ 멈추어 있는 것 - 산은 산이다.
◎ 달리고 있는 것 - 산은 산이 아니다.
◎ 잉태해 있는 것 – 산이면서 산이 아니고 다시 산이다.
조금 안다는 사이비들이 쓰는 수법은 달리면서 움직이는 상대성으로 멈춘 것을 치고, 움직이는 역설로 고착된 관측을 치는 것이다. 진짜는 잉태하고 있는 것, 내부에 품고 있는 것, 복제하고 있는 것, 맹렬한 상호작용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역설의 역설, 이중의 역설이 들어가야 한다. 모형으로 판단하므로 직관할 수 있다.
애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궁 속의 아기는 성장하고 있다. 그것은 멈추어 있지만 실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화광동진은 빛나고 있지만 어둔 자궁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현묘한 것이다.
도가도는 길이되 달리는 길이 아니다. 집은 달리지 아니하고 길은 머무르지 아니하며, 진정한 도는 머무르지 아니하되 달리지 아니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자이로스코프다. 가만이 머물러 있되 심장은 뛰고 있다.
모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자궁의 모형이다. 자궁은 자이로스코프를 닮았다. 마땅히 우주의 모습도 이러한 것이어야 한다. 인플레이션은 빅뱅 초기 시공간이 대칭성을 획득하지 못하였을 때의 모습이다. 우리가 말하는 시간과 공간은 에너지의 교환에 따른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상호작용은 대칭성을 가진다.
그러나 빅뱅초기에는 대칭성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그런 대칭적인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대칭적인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데 우주가 팽창한다는 말이 성립하는가?
앞의 ‘산은 산이다’와 뒤의 ‘산은 산이다’가 같은 산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멈추어 있는 것과 자이로스코프는 다르다. 멈추어 있는 것을 밀어 넘어뜨리면 넘어지지만 자이로스코프는 밀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절대성의 경지다.
죽었기 때문에 가만이 있는 것과 살았기 때문에 밀어도 넘어지지 않는 것은 다르다. 가만있는 배는 큰 파도에 넘어지지만 움직이는 배는 파도를 타고 넘는다. 인플레이션 개념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아서 헷갈리게 만든다. 아인슈타인은 그럴 때 과감하게 새로운 개념을 창의하는데 말이다.
정리하자. 진정한 것은 정이되 내면에 동을 감춘 정이 아니면 안 된다. 멍청하게 서 있는 정은 진짜가 아니다. 성철은 숭산과 달리 포교하지 않는다. 성철은 달리지 않는다. 그는 백련암에 멈추어 있다. 그 멈춤은 그냥 멈추어 있는 것과 다르다. 그것이 대승의 경지다.
성철부도 - 움직이는 동을 품은 움직이지 않는 자궁을 표현하고 있다.
소승은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대승은 움직이지 않는다. 꼬우면 니가 와라는 식이다. 그 안에 자이로스코프가 돌고 있다. 건드리다가 튕겨나간다. 무엇인가? 세상과의 팀플레이다. 세상이 변해서, 세상에 큰 사건이 일어나서, 세상이 큰 사상을 요구해야 비로소 큰 빛은 일어난다. 그동안은 화광동진이다. 큰 세상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와의 팀플레이가 아니면 안 된다. 21세기가 스스로 답을 낸다.
P.S.
기독교는 열심히 선교하지만 카톨릭은 ‘우리는 교황이 있다’ 이거 하나로 해결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교세가 늘어난 것은 카톨릭이죠. 불교계 내부에도 이 문제로 해묵은 논쟁이 있는데, 종교로 보면 이판과 사판, 대승과 소승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종교 안에는 진정한 답이 없습니다. 세상이 스스로 답을 내야 종교도 장단을 맞추는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그러한 면모가 있죠. 대중에게의 포교가 아니라 세상과의 대화로 해결합니다. 조계종의 노선이 그렇습니다. 선학원을 운영해서 그 자궁에서 큰 선지식을 낳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큰 변화의 시기가 아니면 성철은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대화,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거죠. 도법과 명진이 한때 그 역할을 했는데 요즘은 조용해 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