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과 대승
소승은 실패한다. 실패하는 이유는 소승 안에 대승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소승이라고 믿는 것이 실제로는 대승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말하면 소승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상을 추구하는 셈이다.
소승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고, 먼저 개인의 문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개인에게는 문제가 없다. 실상 개인의 문제는 집단의 문제가 투영된 것이다. 개인 안에 집단이 숨어있다.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 초능력자가 되려고 한다. 명상을 한다며 앉아있는 사람들은 턱도 없이 초능력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왜 그들은 생뚱맞게도 초능력자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내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고 믿지만 그 내문제 안에는 우주의 문제가 들어 있다. 우주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연히 초능력자가 되어야 한다. 개인으로서 개인을 넘어서는 것이 소승의 태도다.
그게 초능력이다. 곧 텔레파시를 보내는가 하면 외계인과 채널링을 하며 방언을 하고 귀신들린 행동을 한다. 그들은 뭔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대승은 팀플레이다. 한 사람이 깨달으면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깨달음이 존재하느냐가 중요할 뿐, 그것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골을 넣든 골만 넣으면 팀이 이기는 거다.
이기는 팀에 들면 된다. 진리의 팀에 들면 된다. 진리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진리와 내가 연결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세상 모두가 연결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연결되어 있다면 해결되었다.
부모라고 치자. 자식이 김연아라면? 자식이 금메달을 땄다면?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까? ‘메달은 연아가 땄지 내가 땄냐?’ 이럴 것인가? 월드컵 우승을 해도 ‘한국팀이 이겼지 내가 이겼나?’
이러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렇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승리는 곧 당신의 승리다. 나와 타의 경계는 원래 없으며 그것은 의사결정의 지점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한 답은 의사결정에 있다.
나와 타자가 구분되는 이유는 나와 타자의 경계지점에서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이 우승을 했는데 아버지는 결정할 일이 없다. 입장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석가는 소승이지만 소승이 아니다. 소승은 의사결정의 범위를 좁힌다. ‘요것만 하면 돼’ 하고 영역을 좁히는 자가 집단에서 짱을 먹는다. 유교를 하라고 하면 증자가 나타나서 ‘다 필요없고 효도만 하면 돼’ 하고 범위를 좁힌다.
소승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즉 집단 안에서 의사결정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소승이 생겨나는 것이다. 석가가 그어놓은 바운더리 안에서 당신의 의사결정영역을 정하려 하므로 소승이 된다.
그러므로 소승은 원래 없는 것이며, 집단 안에서 자기의 역할을 정하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모든 종교든 사상이든 과학이든 전체범위 안에서 ‘우리는 요것만 하면 돼’ 하고 범위를 좁히는게 있다.
‘지식인은 비판만 하면 돼.’ 하거나 ‘신자는 기도만 하면 돼’ 하는 식이다. 왜인가? 그런 식의 대칭행동을 통해 집단에 긴장을 조성하고 그리하여 팽배해진 스트레스에 의해 집단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에, 부족에, 가족에, 팀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러한 소속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사건이 터져서 코피가 나고 울고불고 해야 엄마가 쫓아오고 아 나도 가족의 일원이구나 하고 깨닫는다.
자신의 소속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 소승이다. 그러한 소속찾기 행동은 대승적인 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모든 소승적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대승적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내가 소속된 팀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고 팀의 문제다. 세상의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다. 대승이 발견되어야 한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하나 뿐이다. 첫째 절대적 진리가 있을 것, 둘째 진리와 내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 대승이 말하는 절대적 진리, 그리고 그 진리와 내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무의식의 요구 때문에, 의사결정을 통해서 그것을 육체적으로 체험하려는 소승적 퇴행이 있다.
소승적 수행을 하는 사람은 자기 몸을 건드려 수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의 기운을 느끼려고 한다. 대승을 느끼려고 한다. 그 기운은 자기 몸을 어떻게 한다고 느껴지는게 아니고 대승의 팀플레이를 통해 느낄 수 있다.
텔레파시를 느끼고 싶다고? 자녀를 낳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채널링을 하고 싶다고? 팀플레이를 하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소승은 자기 안에서 우주를 찾으려 하지만 외계인은 외계에 있고 우주는 우주에 있다.
외계인이 외계에 있으면 되었지 무엇이 문제인가? 구태여 지구 안에서 외계인을 찾으려 하는 심리가 우주에서 우주를 찾지 않고 자기 안에서 우주를 찾으려는소승적 태도와 유사하다.